364화 진군하는 자 (1)
폭풍이 도래했다.
폭풍은 작은 기계 안에서 시작해 AT&T라는 거대한 기업의 중심을 뒤흔들었다.
“…이, 이건….”
“이렇게 부드러운 터치라니….”
“키보드를 디스플레이로 했다고?”
“이건… 용량만 충분하다면 휴대폰으로 영화도 볼 수 있겠어.”
AT&T의 핵심 인사들, 250조원짜리 기업의 목줄을 쥐고 있는 이들은 손 안에 들어온 작은 기계, 그것에 빠져 한참 동안이나 헤어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뒤.
“…그럼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오라클. AT&T에 파란을 일으킨 인물들, 그들이 떠나갔다.
그러자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 AT&T의 임원들이 묵묵히 자신들의 앞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 다소 멍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앞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은 한동안 자신들의 앞에 놓인 제안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뭘 본 거지?”
방금 전까지 자신들에 앞에서 펼쳐졌었던 광경. 자신들의 손에 들렸던 제품이 준 충격 때문이었다.
“제럴드. 저건 분명….”
순간, 제럴드 스탠키. 그가 손을 들어 임원들의 입을 막았다.
일순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오라클. 제법 괜찮은 제품을 만들어 내는 회사, 지금까지 꽤나 많은 점유율 상승을 가능케 해 준 그런 기업. 그런 만큼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는 선에서 그들을 길들이려 하고 있었다.
오라클 같은 기업, 그 기업을 잡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점유율을 상승시키는 데 꽤나 도움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미쳤어.”
방금 전 그들이 본 제품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손이 닿자마자 반응하는 정전식 터치 스크린, 전면 디스플레이를 채택한 고급스러운 외관, 놀람을 금치 못하게 만든 휴대폰 UI환경과 인터넷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의 인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의 휴대폰이란 단지 전화를 거는 것, 전화기에 사진기나 mp3 기능을 탑재하는 것에 만족했던 것들이었으니까.
그때.
“…오라클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임원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오라클이 지금 우리에게 블러핑을 거는 거란 말입니까?”
“네. 솔직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콘셉트 제품이 으레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기능을 쏟아 부어 만들어 놓고 나중에 파투가 나는, 그러니 이번에도 그런 일일 수 있습니다.”
제럴드의 말에 임원이 대답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들 또한 생각한 것이다.
이 정도의 제품, 이 정도의 완성된 제품이 지금 이 시점에 나온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라고.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컨셉의 제품이 나온다는 건 석기 시대에 철기가 나온 거나 진배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왜 그런 일들은 왕왕 있어 왔으니까.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제럴드, 그는 임원들의 걱정을 일축해 버렸다.
“…상관없다고요?”
“네. 물론 여러분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 오라클이 이번 제품을 가지고 블러핑을 치는 것일 수도 있죠. 하지만… 아니라면 만약 오라클의 말대로 그것이 양산 준비가 모두 다 끝났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만약 그래서 그들이 버라이즌을 택한다면 그땐 우리 목숨이 끝나는 겁니다. 저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제럴드,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그는 깨달은 것이다.
‘만약’이라는 단어에 모든 것을 걸고 회피하기엔 사안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이번 사건은 단순한 휴대폰, 일개 제품에 국한 되는 일이 아님을.
방금 전 그가 보았던 디자인, 그의 손에 닿던 감촉, 그리고 그가 직접 보았던 휴대폰의 기능들은 그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공급가에 25%를 저희 쪽에서 지출한다면 오히려 적자를 면치 못할 겁니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 허나 25%, 아니 50%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해야 합니다.”
“50%라고 하더라도요?”
다소 놀란 듯한 임원의 말, 그 말에 제럴드 스탠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도태될 테니까.”
순간, 사람들이 말을 멈췄다.
그것은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 그들이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미래였다.
“도태라….”
“부정하실 수 있으십니까?”
“부정할 수는 있지만 그럴 수는 없겠죠.”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임원의 말, 그 말에 제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바로 그가 기다렸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오라클 측의 제품 발표 시점이 언제라고 했죠?”
“…이제 두 달 정도 남았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두 달이라… 그렇다는 말은 올해 안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도 올해가 가기 전에 발표하겠다 생각한 거겠죠. 사람들의 기대란 원래 시작과 끝에 위치하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임원들 중 하나가 말을 받았다.
“좋습니다. 관련 인력들 모두 다 소집하세요. 다른 제품들은 어때도 좋습니다. 일단은 오라클, 저 제품을 어떻게 그것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가 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연락하세요.”
“어디로?”
제럴드 그의 시선이 임원들을 향했다.
“오라클 측에, 귀측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그것은 항복의 표시였다.
*
한참동안 전화 통화를 하던 레이첼, 그녀가 전화기를 닫으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뭐래요?”
“생각하시는 바가 맞을 겁니다.”
“AT&T가 백기를 들었군요.”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현재 우리는 뉴욕 맨하탄의 유명 한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네. 그쪽에서 저희 측 제안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습니다.”
“아무런 변동 없이?”
“아무런 변동 없이.”
순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의 말, 그 말은 곧 우리의 이득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라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이거 점심이 꽤나 맛있겠네요.”
“이미 맛있게 드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그녀가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 내 앞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는 세 그릇이 넘는 밥그릇과 막 추가 주문한 불고기가 자리해 있었다.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먹으니 잘 들어가네요.”
“…하긴 그동안 제법 느끼하게 먹긴 했죠.”
그렇게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은 레이첼, 그녀가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째섭니까?”
“어째서라뇨?”
“차라리 버라이즌 쪽과 접촉을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나 싶어서 말입니다. 솔직히 저희 제품이라면 그 정도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자신 몫의 물잔을 잡으며 말했다.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AT&T와의 접촉이 약간 의외였던 것 같았다.
“저희가 이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우리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이죠.”
“아침을 먹지 않았다?”
“네. 그리고… 버라이즌 쪽에서는 그와 반대로 생각하겠죠.”
일순, 그녀가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그러니까 버라이즌은 배가 부를 거란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죠. 정확하게는 배가 고플 여유가 없다는 말이지만.”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
“레이첼, 우리가 가는 길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이에요. 그런 만큼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죠. 그런 마당에 점유율을 높여야 하니 25%의 달하는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받아들일 자들이 있을까요?”
“…저희 제품을 보고나서도 말입니까?”
“물론이죠.”
그러자 그녀가 일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아뇨. 사람은 잘 변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또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하죠.”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요. 본래 특이점(特異點)이란 도래하기 전까지는 사소해 보이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이거든요.”
그랬다.
과거,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미래. 그때 애플이 아이폰을 처음 발표했을 때 시장은 애플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이폰 발표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스티브 발머 CEO는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전세계에 팔려나간 3억 대의 휴대폰의 60~80%는 우리의 소프트웨어가 차지하고 있고, 애플은 많아야 2~3%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고 모토로라의 CEO 에드 잰더는 “애플이 우리를 어떻게 상대하냐”고 대놓고 무시했다.
거기다 당시 세계 휴대폰 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던 공룡, 노키아 멀티미디어 그룹의 북미 지역 담당인 빌 플루머 부사장 또한 아이폰에 대해 “현상 유지의 진화”라고 평가절하 했으며,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였던 버라이즌의 최고 마케팅 책임자인 마이크 랜맨은 “애플의 제품은 시장 착오적 제품”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최초의 상용화 스마트폰, 지금으로 보면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것 같은 제품은 대부분의 휴대폰 제조사들과 통신사들로부터 무시당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런 만큼 방심할 수는 없었다.
끝내주는 제품을 만들어 놓고도 시장의 아집에 밀려 상당 기간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꽤나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네. 그런 만큼 우리는 2등과 발을 맞춥니다. 그들은 배고픈 자. 1등의 등판을 바라보며 칼을 가는 사람들인 만큼 인식 또한 그만큼 넓을 수밖에 없죠. 그들은… 자신들이 1위가 될 역량이 충분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만큼 가지고 올 수 있는 이익도 크고요.”
“언더독들을 노리시는 겁니까?”
“뭐 시가총액 250조 원짜리 언더독이지만 말이에요.”
AT&T.
과거 미국 전역의 부를 온전히 손에 쥐었던 이들, 하지만 이후 정부의 정책에 의해 강제로 찢겨 자신의 부를 잃어버린 자들, 그런 자들인 만큼 그들은 보다 더 극적인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럼 미국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도…?”
“맞아요. 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언더독들, 우리는 2인자들을 노립니다. 그리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들에게 요구해야겠죠.”
“요구요?”
“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진군로(進軍路)를 만들라고. 뭐 그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요.”
그리고 며칠 뒤, AT&T와 오라클간의 계약이 체결되었다.
계약의 결과는….
“…전례에 없던 일이 될 겁니다. 미스터 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부수어 버리는 것일 뿐이라고요.”
파격, 그 자체였다.
[오라클! AT&T와의 합작으로 신제품 독점적 공급할 것! 초기 물량의 가격은 무려… 299달러! 관련 기업들 ‘당황’ - 월스트리트 저널. 2004. 11. 11]
현재 일반적인 휴대폰의 공급가격은 평균 500달러 남짓.
우리는 일단 그 가격의 벽을 깨부수며 진군의 나팔을 분 것이다.
미래가 눈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