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거부할 수 없는 제안 (5)
“하하 정 회장님. 이거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정영주의 모습을 발견한 김용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영주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덥썩 정영주의 손을 잡고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흔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 정확하게는 저번 대선이 끝난 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물론 서로가 그리 반가운 관계는 아니었지만, 원래 정치라는 것이 그런 법. 목적을 위해서라면 원수와도 동침을 할 수 있는 것이 정치인이었다.
‘뭐 그건 이 늙은이도 마찬가지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의 손을 마주 잡은 정영주, 그 또한 환한 얼굴로 그의 인사에 화답하는 모습이었다.
“허허 현역에서 물러난 늙은이를 이렇게 맞아 주시니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거참, 정 회장님을 그렇게 말하는 건 정 회장님 본인밖에 없으실 겁니다.”
그렇게 잠시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던 두 사람. 그 둘이 인사를 멈춘 ? 천천히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오늘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수행원들은 모두 다 입구 쪽에 대기, 드넓은 라운지 안에는 김용관과 정영주 두 사람만이 자리해 있었다.
“비서실장님.”
“네. 회장님.”
정 회장의 노회한 눈이 김용관에 닿았다.
“요즘 힘드시죠?”
순간, 김관용의 몸이 멈칫 굳었다.
힘들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 회장 현재 자신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늙은이···.’
하지만 그렇다고 정 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는 일. 빠르게 표정을 수습한 김용관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왜 요즘 들리는 소문이 보니 제법 시끄러운 일이 많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가벼이 웃으며 말하는 정 회장의 말. 그의 말에 김용관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이 계절이면 바람이 많이 부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마 금세 사그라들겠죠.”
“바람이 많이 부는 계절이라··· 허허 9월이 태풍이 오는 계절은 아니지 않습니까.”
“···북풍이 불었으니 그 바람이 남을 만도 하죠.”
“아. 그건 그렇군요. 북풍이라. 하긴 그 정도 바람이라면 그럴 만도 합니다.”
정 회장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감돌았다. 찻잔을 들며 여유로이 차를 홀짝이는 그 모습에 김용관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 회장님.”
“네. 비서실장님.”
“저랑 선문답을 하려고 이렇게 절 부른 건 아니실 테고··· 혹시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겁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빙빙 돌리지 마시고 바로 말씀해 주시죠. 직설적인 걸 좋아하시던 회장님 아니십니까?”
약간은 날카로운 김용관의 말. 그 말에 정영주이 귀엽다는 듯 잔웃음을 입에 머금었다.
“허허 그랬죠. 나이가 드니 이거 말이 많아지더군요.”
“······.”
“좋습니다. 그럼 김 실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찻잔을 내린 정 회장이 천천히 김용관을 향해 말했다.
“비서실장님.”
“네. 회장님. 말씀하시죠.”
김용관의 거친 목소리를 밟으며 정영주가 선언하듯 말을 내뱉었다.
“지금 부는 바람, 제가 막아드리겠습니다.”
김용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지금의 부정적 여론을 제가 막아드리겠단 말입니다.”
“···여론을 말입니까? 정 회장님이?”
“네. 비서실장님과 대통령님께서 수락만 하시면 여론을 막아드리는 것은 물론, 역풍을, 대통령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만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광오한 말이었다.
일개 기업인. 그의 몸으로 대통령을 향한 국민의 지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일반적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소리치며 헛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을 테지만, 김용관은 섣불리 소리칠 수 없었다.
정주영. 그가 자신하는 일이라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
잠시 말이 없는 김용관. 한참을 숙고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 회장님의 능력은 잘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은 그에 대한 자신이 있으시다는 말이겠죠.”
정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회장님의 저의 입니다. 아시다시피 회장님과 저희 각하의 관계가 그리 원만한 관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말을 마친 김용관이 예리한 눈으로 정영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한 정회장은 자신의 이익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인물. 그리고 자신의 주인 김영삼과는 구원으로 얽힌 이였다.
그런데 그런 이가 도와준다고?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이야기. 자칫 잘못하다가 제 손으로 제 주인에게 독배(毒杯)를 바치는 일일 수도 있었다.
때문에 정영주를 바라보는 김용관의 시선에는 차가운 의심이 가득했다.
‘의뭉스런 늙은이······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김용관에 마음 한쪽에 자리한 생각.
만약··· 저 말이 진짜라면?
정말 정영주가 자신, 아니 김영삼을 도와주려 하는 것이라면?
그러다면··· 그보다 더한 우군은 또 없었다.
이 나라, 이 시점에 이보다 더 강하고, 노회하며, 치밀한 사람이 없이 때문이었다.
“······.”
김용관이 말없이 정영주를 바라보자 물끄러미 그 시선을 마주하던 정영주, 그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마도 비서실장님께서는 제 호의의 이유를 찾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정영주의 말에 김용관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네 그렇습니다. 그 이유. 제가 그리고 각하께서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그의 시선에 정 회장이 가벼운 미소를 입에 물었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유라··· 그건 간단합니다.”
정 회장의 시선이 김용관을 꿰뚫었다.
“제가, 그리고 제가 믿고 있는 사람이 그걸 원하기 때문입니다.”
***
“김용관 그 사람, 과연 받아들일까요?”
김용관이 떠나가고 난 뒤 정영주 회장의 옆자리로 다가온 남자. 현대가의 4남 정몽현이 정 회장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저 멀리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던 정 회장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니. 아마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저래 봬도 저 사람, 의심 가는 걸 넙죽 받아먹을 만큼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아니 그렇다면 대체 왜···?”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몽현, 그 모습에 정 회장이 가벼운 미소를 입에 물었다.
“살 길을 열어 준 거지.”
“네?”
“지금에야 숨 쉴 구멍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점점 사태가 심각해지면 내가 했던 제안이 생각날 테니까.”
정 회장이 잔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랬다.
사실 정 회장, 그는 처음부터 김용관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현 상황이 시끄럽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평소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지금 당장 대통령의 권력이 흔들리거나 혹은 탄핵이 가능할 정도의 그런 소란은 아니었다.
그러니 대통령의 비서실장. 청와대의 안주인 겸 최측근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직 버틸 만하다는, 자신들의 힘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만했다.
현재 여론이 좋지 않다고 해도 현 정부가 2년차, 힘이 가장 강할 시기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말이야.’
정 회장이 차가운 미소를 입에 물었다.
분명 김영삼 정부가 현재 2년차, 아직 국민들의 지지가 높은 시기이기는 했다.
게다가 문민의 정부, 사상 최초로 군인 출신이 아닌 민주화 투사 출신의 대통령이 된 것이니 만큼 차후 수습여부에 따라 지금의 소란도 잦아들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만약 사태가 이보다 더 심각해진다면?
연일 목소리를 더해 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고 김영삼과 그 측근에 관련된 루머들이 많아진다면, 그때에도 그는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 수 있을까?
‘아마 견디지 못하겠지.’
때문에 정 회장, 그는 웃을 수 있었다.
그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만큼 얼마 지나지 않아 김영삼 측에서 백기를 들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김용관이 저 사람. 그리 인내가 길진 않은 이니까.’
그때.
“···저쪽의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가만히 표정을 굳히고 있던 김몽현이 정 회장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잠시 정몽현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 회장,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분명 하고 있겠지. 그치도 영 모자란 사람은 아니니까.”
“···아니 그럼 너무 위험한 것 아닙니까? 그러다 만약 김영삼이 그 양반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사색이 된 아들의 모습에 정 회장이 혀를 끌끌 찼다.
“몽현아.”
“네. 아버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녀석이 뭐 이리 담이 작아.”
순간, 정몽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백의 나이에 아버지에게 타박을 당한 것이 억울한 것이다.
“아버지 그건······.”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아들의 모습에 정 회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의심을 할 수는 있다. 그래 사람이라면 그게 당연히 하겠지. 하지만··· 중요한건 그치가 우리의 개입 여부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야.”
“그럼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조금 큰 어조로 말하는 정몽현, 그의 말에 정 회장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대통령. 그 사람의 의중이지.”
정몽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대통령이요?”
“그래. 중요한 건 김용관이가 아니야. 중요한 건 김영삼 그 양반이지. 그 양반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이야기가 달라질 테니까.”
말을 마친 정 회장이 슬쩍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랑 같이 갈지 아니면 내 손을 놓을지에 따라 말이야.”
그러자 잠시 정영주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몽현, 그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아버지. 정 회장이 이렇게까지 단언한 이상 더 이상의 의심은 독이 될 뿐이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몽현은 가장 근본적인 의심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님.”
“으응?”
“외람된 말씀이지만···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정몽현이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인다.
“정말로 성수대교···무너지리라 보십니까?”
그 말에 정영주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 다 따져보고 하는 일 아니냐.”
“그래도···그 큰 다리가···.”
“여기저기서 참 많이도 해먹었더군. 당장 무너지지는 않더라도 오래는 못 갈 게야.”
정영주는 피식 웃었다.
“차라리 일찍 무너지는 편이 김영삼 그 양반에게는 더 호재지.”
“예에? 그건 왜···?”
“알고 있는 참사만큼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
하기야 그렇다. 참사는 대비하지 못했을 경우 말 그대로 참사이지만 잘 알고 대비만 할 수 있다면 지지율 반전의 청신호가 된다.
지금 자잘한 찌라시들 때문에 은근히 골머리를 앓고 있을 김영삼에게는 나름의 호재인 셈.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지 그 양반께는. 우리에게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 그의 눈에는 이제야 일말의 의심조차 걷혀 있다.
하지만.
정작 확신을 가지라 말하는 아비의 눈에는 조금 다른 종류의 이채가 어려 있었다.
‘작은 선생이라···.’
이제 막 열한 살이라던 꼬마아이. 자기 손주나 손녀들은 인형이나 미니자동차 등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을 나이에 벌써부터 한 나라의 토목과 건축에까지 관심분야를 뻗어 가는 녀석.
정영주는 김준영이 건넨 성수대교에 대한 보고서를 보며 약간의 전율을 느꼈다.
이쯤 되면 정말로 다리가 무너지든, 무너지지 않든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이 정도 되는 떡잎을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가 값어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귀란 누이가 부럽구먼. 허허···.”
하지만 그는 남의 것을 마냥 부러워만 하는 남자가 아니다.
지금껏 늘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공격적으로 빼앗아 오기만 했던 남자.
하지만 핏줄이라는 것만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지라 그저 끙끙 입맛만 다실 뿐.
핏줄을 사 올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역시나 최선은.
“손녀사위가 답인가.”
기묘한 답을 도출해 내는 정영주 회장이었다.
***
“그러니까··· 현대가 그쪽 집안에선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깨끗하다. 그 말이야?”
표정 없이 묻는 김용관, 그의 말에 행정수석이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네 그렇습니다.”
간단한 말. 그 말에 김용관의 얼굴이 잘게 일그러졌다.
얼마 전 정 회장과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온 뒤, 김용관은 곧바로 대통령과 독대했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정부에 대한 부정적 여론.
기다렸다는 듯 자신에게 온 정영주 회장의 연락.
그리고 조금은 광오하기까지 했던 정영주 회장의 제안까지.
그 모든 사항을 마주한 순간, 이 사태를 불러온 원흉,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영주에 대한 공격을 지시할 수는 없었는데, 단순한 심증만으로는 재계서열 1위의 대기업 총수를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 실장의 말을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김실장도 알다시피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요.’
물론 평소, 그러니까 작년과 같이 여론이 김영삼 대통령을 향해 있는 상황이라면야 과감하게 선조치후증거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지금 그런 일을 벌이기에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정치적 보복을 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각하 확실합니다. 지금이라도 안기부를 움직여 현대가를 조사하는 것이···.’
때문에 김용관의 보고를 들은 김영삼은 그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단 한 가지.
단 한 가지라도 눈에 뜨이는 증거가 포착된다면, 그래서 그 증거가 김용관 그의 손안에 들어온다면, 영주에 대한 단죄를 시작하겠다는 지시를.
그리고 그 지시를 받은 김용관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건이 크기가 크기인 만큼 부스러기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다들 움직여. 목표는 현대가. 그리고 정영주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지금··· 김용관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 비서실 인원들을 맷돌 갈듯 갈아 정보를 모았지만 분명 나올 거라 생각했던 증거, 그러니까 정영주가 이번 사태에 개입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좋아. 그럼 정영주 그 늙은이는? 현대그룹이 아니라 그 늙은이 선에서 사람들을 움직인 증거도 없어?”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김용관이 행정수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잠시 김용관의 눈치를 보던 행정수석, 그가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게··· 네. 아무래도 그쪽도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 저번에 김일성이가 사망했을 때 조금 바쁘게 움직인 게 몇 가지 보이긴 하지만 그 이외에는···.”
김용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단 한 가지도 없단 말이야? 사소한 것도?”
“그렇습니다. 일상적인 후원은 존재하지만 눈에 띄는 사항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현대가 이외에 다른 재벌가에서 나온 정보들이 더 많습니다.”
행정수석의 말에 김용관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와 눈이 마주친 모두가 조심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었다.
하나같이 다들 증거가 없다는 듯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김용관이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후······.”
이쯤 되자 혹시 자신이 잘못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어.’
수십 년을 정치판에서 굴러왔던 촉이 말하고 있었다. 내가 찾은 것이 확실하다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이대로 증거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거라면 좀 더 과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김영삼 대통령과의 독대해 안기부를 움직이는 것.
물론 그만큼 위험부담이 큰 방법이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정영주 그 늙은이의 계략에 휩싸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막 위험을 감수하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정영주에 대한 보고를 하려고 마음먹은 그때.
갑자기 이변이 벌어졌다.
쾅-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비서실장실의 문이 열리더니 비서실 직원 하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들어온 것이다.
“허억, 허억, 허억, 시··· 실장님!”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사람들이 직원을 바라보았다.
“뭐야? 왜 무슨 일인데?”
“그게······.”
김용관의 물음에 잠시 숨을 고르며 뭔가 말을 하려던 직원, 그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입을 열다 이내 포기하고 김용관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 이걸, 이걸 봐 주십시오!”
직원이 내민 서류를 받은 김용관,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서류를 확인했다.
“뭔데 이리 호들갑이야.”
그리고 그 순간, 김용관의 얼굴이 청동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김영삼 대통령의 사생아 ‘가네코’ 현재 일본 거주 중 확인! ? 경X일보. 1994. 09. 30]
그것은 내일 일자로 된 신문의 기사. 김영삼 대통령을 둘러싼 루머가 사실이었음을 밝히는 기사였다.
“이거 어디서 났어?”
김용관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에게 서류를 건넨 직원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일 경X신문 1면 기사라고 합니다.”
“미친 새끼들. 이걸 내보내겠다고? 막아! 무조건 막아!”
순간, 김용관은 깨달았다. 이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임을.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자신의 생각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임을.
그런데 그때.
삐빅- 삐빅- 삐빅-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인터폰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순간, 김용관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수화기 너머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 실장. 정 회장한테 전해. 그 제안 받아들이겠다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