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266화 흔들리는 제국 (2)
고요한 공간, 가만히 커피를 마신다.
제법 고풍스러운 잔에 담긴 커피의 향, 하지만 그 커피의 향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커피를 버릴 수는 없는 법, 나는 천천히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순간 느껴지는 향과 맛, 그것은 야성적이지만 깊이가 없는 맛, 상대를 배려치 않는 거친 풍미였다.
때문에 나는 한 모금 커피를 머금은 뒤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탁-
그러자 그 순간, 내 앞에 앉은 노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떤가? 제법 비싼 커피인데. 내 자네가 커피를 유달리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히 내왔지.”
그는 바로 김우중, 대우그룹의 총수로 나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인연으로 묶인 자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기한 맛이군요.”
“그래?”
“네. 회장님과 같은 야성적인 맛이었습니다.”
순간, 김우중, 그가 어울리지 않게 짙은 미소를 보였다.
야성적이다. 평생을 해외를 떠돌며 살아온 남자, 한때 킴키스칸이라 불렸던 사람인 만큼 그 답이 나름 듣기 좋았던 듯싶었다.
“그거 참 다행이구만. 뭐 나야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사실 그거 콜롬비아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 사람한테 받은 거거든.”
그가 슬쩍 자랑을 섞어 말했다. 그의 말에서 과거에 대한 향취와 자랑스러움이 느껴졌다.
“콜롬비아라. 예전에 그곳에서 하셨던 사업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제법 큰 성과를 거두셨다고….”
“그랬지. 커피는 물론 원유나 금, 진주도 수입했었지. 그 동네가 그런 걸로 유명하니까.”
“아는 분도 많으셨겠네요?”
“많았지. 그쪽이 미국 텃밭이라 미국 놈들부터 남미 애들까지 죄다 만났었고, 뭐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해외에 먹을 게 더 많은 법이니까.”
잠시 과거, 그의 황금기를 곱씹던 김우중이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오랜만이야. 그래 이야기는 들었네. 인터넷 사업으로 잘 나가고 있다며?”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차가운 물 한 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네. 덕분에.”
“뭐 덕분이긴 하지. 그래. 들어보니 반포 땅들도 다 사들였다면서?”
그가 웃고 있는 얼굴, 하지만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반포에 있는 땅, 그 땅은 원래 대우에서 잡고 있었던 땅이었던 만큼 그의 심기가 드러났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는 한평생 싸워 온 사람, 땅을 빼앗기고 허허롭게 웃을 인물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이 자리가 아니라 어느 산골 주지라도 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괜찮은 매물이 나와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참을 수가 있어야죠. 돈이 한꺼번에 들어오기도 했고요.”
뭐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그저 당연한 것을 마시는 듯 입을 연다.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이내 피식 쓴웃음을 짓는다. 뭐 그가 나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거 참. 배가 아프구만. 내가 잡고 있던 땅을 내 돈으로 넘겨서 그런지 더할 나위 없이 배가 아파.”
“회장님 배 아프시지 않도록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잘 쓰지 말게. 내가 나중에 받아갈 테니까.”
그가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을 마친 뒤,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이내 묵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해 보게.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곳까지 왔나?”
아무래도 내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한 것 같았다.
뭐 이해는 할 만했다.
그와 나는 상극, 그와 나는 적, 그런 만큼 이런 만남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나와 그는 이미 한 차례 전투를 마친 후였으니까.
“제가 그냥 오다가다 왔다고 하면 믿지 않으시겠죠?”
내가 말하자 김우중, 그가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 그랬다면 웃기는 소리라고 배꼽을 잡았겠지. 우리 사이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건 자네도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 뒤 차가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의 시선에선 과거에 대한 미련과 분노가 엿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생각하시는 대롭니다. 아무래도 제법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이지 그게?”
“그나저나 회사가 참 분주하더군요.”
“회사가 분주해야 좋은 게 아니겠나. 큰 파도 밑에 큰 물고기가 있는 법이니까.”
그가 천천히 냉수 한 잔을 마시며 말했다.
“큰 건인가 보죠?”
“제법 큰 건이지.”
“국내 투자신탁회사들에 회사채 투자 비중을 제한 같은 건 말입니까?”
그러자 그 순간, 김우중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네….”
약간은 매서워진 눈, 그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의 역린 그것을 제대로 찌른 것 같았다.
“저도 그것 때문에 청와대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청와대?”
“네. 가서 각하를 뵈었죠.”
일순, 그의 눈이 깊어진다.
약간은 복잡해 보이는 얼굴, 그가 이내 거칠게 입을 열었다.
“각하라… 하, 그 양반 너무 믿지 말게. 원래 정치인이라는 건 얼굴이 여러개거든.”
아무래도 근래 들었던 말, 그와 대통령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가 이렇게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진 않았을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분이 제게 향할 얼굴은 하나뿐일 테니까.”
“두고 보게나. 정치 하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 하나 없으니.”
그가 천천히 잔을 내리며 말했다.
“…좋아. 그럼 여기 온 이유가 DJ 때문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니 DJ 그 사람이 자넬 보낸 게 아닌가 해서하는 말일세.”
그가 그게 아니냐는 듯 나를 향해 가볍게 턱짓을 해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슬쩍 웃었다.
“회장님. 제가 누가 부르고 보내서 오갈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러자 잠시 말을 멈춘 그, 그가 쓴웃음을 보이며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네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 누군가를 또 잡아먹는다면 모를까.”
“네. 다행스럽게도 제 입맛은 까다로운 편이죠.”
“말은… 하, 생각해 보면 세월 참 빨라. 그때 제 할머니 손을 잡고 빨빨거리던 그 꼬맹이가 이리도 컸다니. 새삼 정말 후회가 되는구만.”
“후회라고요?”
“그래. 그때 자네를 치워 버렸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지.”
그기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새하얀 송곳니가 나를 향했다.
역시, 그는 이런 게 어울렸다.
나는 어느새 나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김우중, 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요즘 회사 많이 힘드시다고요?”
나의 말에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약간의 분기를 담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헛소린가. 누가 힘들어. 또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왔구만.”
“글쎄요. 제법 믿을 만한 정보통에게 들은 말입니다만?”
“자네 그 정보통 갈아야겠구만. 영 쓸모없어.”
그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니 그의 정곡을 찔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머리에 가까운 곳을 찌를수록 뱀은 꿈틀거리는 법이니까.
“큰일이군요. 정책기획수석과 경제수석쯤 되는 이들의 말이 쓸모없는 거라면 우리나라 망할 테니까.”
일순, 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누군가 했더니 그놈들이었나?”
“그렇습니다만.”
“하, 그놈들. 책상물림들 말이야 들어서 뭐해. 언제나 질질 짜는 것이 그들 일일 뿐인걸. 그놈들은 양놈들 통치에 발끈할 줄도 모르는 소인배들이야. 왜정 때였으면 독립군 팔아먹고 호의호식했을 놈들이란 말이지.”
그가 테이블을 탁-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선 정부 관료들에 대한 짙은 불신이 묻어났다.
하긴 이 당시 김우중 회장과 정부 관료들, 신진개혁 세력들 간의 다툼은 꽤나 유명한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 IMF상황을 헤쳐 나갈지를 두고 꽤나 극명한 대립이 일어났던 것이다.
‘김우중은 규제 완화를 통한 수출 위주의 경제 정책을, 관료들은 국내 경제주체들의 체질개선을 통한 경제 성장을 추구했지.’
하지만.
“뭐 그래도 어느 정도 그들의 방책이 효과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승패는 확실했다.
“효과?”
“네. 작년 말 경상수지는 흑자로 돌아섰고 올해 초 경제 상황도 나쁘지 않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IMF 조기 졸업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역사 속에서 김우중 그는 죽고 나라는 섰다.
차후 어떤 평가가 있었는지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물론 김우중 그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웃기는 소리. 제 놈들의 방책으로 이 나라가 서 있다고 생각하나? 다 사람들의 피로 만든 결과일세. 나나 자네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결과란 말이지. 아마 내 방책을 따랐다면 지금쯤 IMF놈들에게 빌린 돈쯤은 다 갚았을 게야.”
나는 나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말을 내뱉는 그, 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출 500억 달러 계획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그가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거. 1달러당 2천 원이 넘는 환율이라면 돌멩이도 팔수 있다고 그렇게 되면….”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우가 살 수 있겠죠.”
일순 그가 눈을 꿈틀거린다.
“뭐?”
그의 눈엔 당황이 선명했다.
“아닙니까?”
“……하, 대우가 사는 게 아니야. 이 나라가 사는 거지.”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왠지 그의 말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정말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쓸데없는 말게. 정말 나랑 이런 이야기나 하자고 온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닙니다. 제가 하려고 한 건 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죠.”
그가 쿵- 주먹으로 잘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좋아. 빨리 할 이야기나 하게. 나나 자네나 바쁜 사람들 아닌가.”
아무래도 마음에 여유가 사라진 모습, 나는 때가 무르익었음을 깨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이야기의 결과, 그의 제국과 이 나라는 많이 달라져 있을 테니.
“회장님.”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자 그가 천천히 나를 받는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단언했다.
“앞으로 6개월.”
“……6개월?”
의아한 듯 구부러지는 그의 몸, 그 모습을 향해 나는 선언했다.
“네. 그 안에 대기업 대우는 사라지게 될 겁니다.”
“뭐라고!?”
나는 뭐라 말을 꺼내려는 김우중의 대답을 뒤로한 채 무겁게 말을 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75조 원에 달하는 자산도 396개에 달하는 현지법인도, 15만 명에 달하는 직원들도 모두 다 사라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향해 그의 미래를 예견했다.
“…회장님은 해외를 전전하게 되겠죠. 어마어마한 오명을 뒤집어쓴 채 말입니다.”
일순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 그가 금방이라도 내 멱살을 잡을 듯 손을 떨었다.
“그러니까 기회를 드리죠. 저에게 넘기십시오.”
그가 가까스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입에서 허연 김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무엇을?”
나는 가볍게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 회사, 대우를 말입니다. 그럼….”
나는 말을 맺었다.
“회장님의 이름만은 살려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