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카모플라쥬 (2)
다음날, 한국국민학교 교장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는 박수한이라고 합니다."
한국국민학교의 교장인 박수한이 슬쩍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있는 대상.
재계서열 12위. 한성그룹의 비서실장, 전진호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진호라고 합니다."
굉장히 가벼운 인사.
분명 존댓말을 쓰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상대방을 압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순 박수한의 표정이 흐려졌다.
교사로서 그리고 한국국민학교의 교장으로서 한평생 존중받는 삶을 살아왔던 박수한이었기 이런 간단한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도 어린 놈이······.’
하지만.
"하하, 이거 전부터 뵙고 싶었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는군요. 영광입니다."
아무리 한국 국민학교의 교장 자리가 높다고 하더라도 교장일 뿐이었다.
한성그룹의 실세인 전진호와는 사회적인 위치를 비교할 수 없었다.
때문에 곧 박수한은 자신의 불만을 피부 아래로 감추었다.
그러자 전진호와 함께 교장실에 들어온 이사장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흘렀다.
자칫 잘못해 박수한이 표정 관리를 못했다면 소개를 시켜 준 자신의 면이 상하는 것은 물론,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성과의 거래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자 앉으시죠. 차는···?"
"커피로 주십시오."
그렇게 잠시 인사를 나눈 그들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잠시 교장이 내온 차를 마치던 전진호가 천천히 입을 열어 오늘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늘 제가 연락드린 이유는 저희 도련님 때문입니다."
순간, 박수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한성의 도련님이라면 분명 얼마 전 전학 온 아이. 한국국민학교 3학년 1반, VIP들을 몰아 놓은 반에 다니고 있는 10살짜리 꼬맹이였다.
일반 학생이었다면 교장인 그가 바로 떠올릴 수 없었겠지만, VIP 학생들은 교감과 교장이 직접 관리하고 있는 만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가만 보자. 그 애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다. 준영이였지.’
가까스로 준영의 이름을 떠올린 교장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준영 학생 말씀이시군요. 잘 알고 있습니다. 학업성취도도 뛰어나고 예의도 바른 학생이죠.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교우 관계도 아주 좋다고 들었습니다."
평소에도 이런 일, 그러니까 자식이나 손자의 학교생활이 궁금한 사람들의 물음을 자주 받아봤던 터라 대답이 자동으로 나왔다.
‘물론 이렇게 전학 오자마자 오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박수한의 말에 전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지내고 계신 것 같군요.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도련님 성적이 또래보다 더 나은 것 같습니까?"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박수한이 의아하게 전진호를 바라보았다.
일순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순간에도 그의 입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 물론입니다. 아직 기말 고사를 보진 않았지만 교사들한테 듣기로는 초등학교 3학년 수준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하더군요. 하하 어린 나이에 이리 뛰어난 것을 보니 앞으로 크게 될 학생인 것 같습니다."
박수한의 말에 전진호가 예리한 웃음을 입에 물었다.
"교장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네?"
"오늘 제가 여기 온 이유 말입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박수한을 바라보며 전진호가 입을 열었다.
"저희 도련님. 월반 가능하겠습니까?"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박수한이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월반제도(越班制度).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 상급반으로 건너뛰어 진급할 수 있는 제도.
대한민국에서는 학년별 학생수의 10% 이내로, 초등학교에서 3회, 중고등학교에서 3회에 한해 월반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제도를 이제 막 학교에 전학 온 애한테 적용하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박수한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월반제도 자체의 의의. 그러니까 획일화된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의의는 분명 그럴 듯하지만, 동시에 그 부작용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유명무실한 제도가 바로 월반제도였다.
‘이 작자들 욕심이 지나치구나.’
그때.
박수한의 옆에 앉아 있던 이사장이 박수한의 발을 탁하고 쳤다.
그러자 아차, 정신을 차린 박수한이 어색한 웃음을 입에 물었다.
"아, 아아 월반 말씀이십니까? 하하."
전진호가 날카로운 눈으로 대답을 종용했다.
"가능하겠습니까?"
"그게······."
박수한이 잠시 시선을 돌렸다.
월반이라··· 그동안 보고받은 김준영의 성적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월반제도의 문제점. 월반을 한 아이가 겪는 일들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잘못하면 월반은 월반대로 신경 쓰고 욕은 욕대로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있는 제도를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
잠시 고민하던 박수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능은 합니다."
"그렇습니까?"
"네. 학생의 학업 성취도에 따라 3회까지는 월반이 인정되니까요. 물론 학생의 사회성에 그다지 좋지는 않기 때문에 그다지 추천은······."
그때였다.
박수한이 월반제도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 하던 그 순간.
"좋습니다. 그럼 6학년으로 월반도 가능하겠죠?"
점입가경.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가 전진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네?"
박수한과 이사장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전진호를 바라보자, 전진호가 왜 그러냐는 듯 담담히 그들을 마주보았다.
"아까 이야기하셨잖습니까. 3회 가능하다고. 그러니까 한 번에 올려 버리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외국의 경우를 보니 성취도만 인정되면 한 번에 3학년을 올라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아니 그건······."
억지. 아주 뻔뻔한 억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호히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전례가 없는 일인 만큼 될지 안 될지 그 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아니 왜 이런 일이······.’
그때 이사장이 박수한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웬만하면 받아 주라는 표시.
허나 그는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 후폭풍은 온전히 자신이 져야만 할 것이 뻔했다.
‘다른 사람이면 그냥 안 된다고 하겠지만··· 어휴···.’
박수한이 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를 굴렸다.
재벌가 사람들이나 정치인, 판검사들. 소위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계층 사람들의 자제들이 학생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한국국민학교.
그런 곳이었기에 평소에도 이런저런 소소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지만 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전진호가 당황에 빠진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교장 선생님의 입으로 말하셨잖습니까. 준영 도련님의 성취도가 뛰어나다고, 3학년으로 볼 수 없을 정도라고. 그러니까 올라갈 수도 있겠죠. 능력이 되니까."
"저··· 실장님··· 그렇다고 해서 3학년을 한 번에 월반하는 건··· 전례도 없고··· 또 학생들과의 형평성도···."
"교장 선생님."
전진호가 박수한을 불렀다.
박수한이 서둘러 땀을 훔치며 말했다.
"예. 실장님. 말씀하시죠."
"선생님께서 형평성을 지키고자 하는 게 중요한 만큼 저희 도련님이 수준에 맞는 교육을 받을 권리도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설마 한국국민학교의 교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공평과 평등을 헷갈리시지는 않겠죠."
"그건······."
"대신."
잠시 말을 멈춘 전진호가 박수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이 성공되면 선생님을 교육감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순간, 박수한의 얼굴이 흔들렸다.
교육감.
시, 도의 교육에 관한 사무를 통할하는 시도교육청의 장. 그리고 교육의 길을 걷는 자들이 마지막으로 다다를 수 있는 자리. 그 자리에 자신을 넣어준다고?
박수한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전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전진호가 자신감 있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습니까? 은퇴하시기 전에 뱃지 한번 달아 보셔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게······."
"뭐 선생님께서 싫다 하시면 굳이 권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알아 두시죠.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걸."
박수한의 욕심이 꿈틀거렸다.
한성. 재계서열 10위권의 다른 그룹들보다 그 규모는 작지만, 귀 좋고 발 넓은 친구들은 그에 못지않게 많다는 그룹.
그런 그룹의 비서실장이 하는 말이니 만큼 거짓을 아닐게 분명했다. 그의 말은 곧 그의 주인. 김귀란의 의사일 테니까.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박수한이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전진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교육감. 교육계 쪽에도 커넥션이 있는 만큼 하나쯤 호스를 이어 놔 나쁠 건 없었다.
"물론."
진전호의 머릿속으로 김준영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 * *
김귀란의 저택에서 테스트를 본 지 채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학교 선생님에게서 월반 시험을 준비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준영아. 2주 뒤에 월반 시험 볼 거야. 일단 학교에 있는 다른 학생들 중에도 월반 시험을 볼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그동안 준비하고 있어.’
아무래도 김귀란이 움직인 모양.
내가 월반이 가능하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례가 없는 만큼, 제법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빨리 학교 측과 이야기가 된 모양이었다.
‘적어도 몇 주 정도는 걸릴 줄 알았는데. 대단하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지금으로부터 2주 뒤, 시험 문제가 완성되는 시점에 시험을 보기로 했다.
물론 졸지에 계획에 없는 시험 문제를 내야할 교사들은 나를 볼 때마다 한숨을 쉬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한성에서 뭐라도 좀 챙겨 주겠지.’
그때부터 나는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원래대로였다면 국민학교 6학년. 굳이 시험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학교 측에서 이번 시험의 난이도를 어렵게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만큼 방심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난이도를 어렵게 해서 구설수를 피해 보겠다는 학교 측의 전략인 것 같았다.
‘하긴 자칫 잘못하면 재벌 특혜다 뭐다 해서 말이 나올 테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뭐 저번에 본 자체 테스트도 만점으로 통과한데다가.
지금은 학벌이면 학벌, 실력이면 실력, 예전에는 꿈도 못 꿀 만한 스펙의 강사들이 나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부터 너를 가르칠 선생들이다. 다들 한국대학교 출신들이니 쓸 만할 거야."
"아니 다섯 명 전부가요?"
"그래. 한 사람에 한 과목씩 맡아서 가르칠 거니까 열심히 하도록 해라. 만약 이번에 떨어지면··· 내 아주 혼을 내 줄 테니까."
물론 처음엔 다섯 명이나 되는 강사들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응할 수 있었다.
한 이틀 정도 시간이 지나자 어떻게 효율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지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인 것들은 제가 공부할 테니까 그동안 수업준비를 하시던가 아니면 숙제를 내 주세요.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볼 테니 그때만 대답을 해 주시고요."
"응? 처음 배우는 과목들은 모르는 게 많을 텐데? 그러지 말고 선생님이랑 같이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뇨. 그걸로 충분해요. 사실 처음 배우는 과목이 아니거든요."
"처음이 아니라고?"
"···네. 아무래도."
물론 강사들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들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걸.
아무튼 그렇게 2주라는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교사들 앞에 섰다.
"시험 시간은 총 2시간. 시험 문항 수는 총 160문제. 시험 도중 부정행위를 할 시 바로 시험을 중지할 테니까. 조심하고."
대부분 내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 표정. 갑자기 시험문제를 내게 된 것에 대한 울분이 담겨 있는 시선들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언제나 뒤집어지는 것.
시험이 끝나고 난 며칠 뒤 나는 나를 바라보는 당혹스런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준영아."
"네 선생님?"
"교, 교장실로 가 봐. 교장님이 부르셔."
예상했던 대로. 내 성적은 만점.
유례없는 난이도를, 유례없는 최고점수로 돌파해 버린 것이다.
[아아, 6학년 담당 선생님들 전원, 교장실··· 아니 6학년 연구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교장실에서 시작된 소란은 금세 모든 층의 교무실로 번져 갔다.
아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