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40화 금 따는 콩밭 (1)
1997년 말 시작된 대한민국 외환위기.
한보그룹의 부도사채로 시작되어 대한민국을 뒤흔든 그 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어져만 갔다.
‘금융기관 외채만기 연장을 위한 정부지급보증 국회 동의!’
‘원화환율 사상 최고치 기록, 1975원!’
‘정부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 천명!’
‘재경경제원 제일은행과 서울은행 매각 결정!’
한보그룹 사태로 시작된 이번 사태의 파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대한민국 정부, 이번 사태를 초래한 주체가 공식적으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 국가 부도 사태를 피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취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부터 시작된 위기,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는 완화되지 않았다.
아니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재벌기업들과 금융권의 ‘부도’ 소식은 점점 더 빈번하게 그리고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굴욕적인 항복.
IMF에 사실상 무장해제를 하면서까지 들여온 구제금융(195억 달러) 또한 제법 큰 금액이었지만, 지난 수십 년간 끈끈한 정경유착을 통해 몸집을 불려온 재벌그룹들, ‘대마불사’라는 단어를 당연하게 생각해온 재벌들의 부실은 생각보다 더 크고 넓었던 것이다.
무려 평균 500%!
적으면 300%에서 많게는 1,000%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자기자본 대비 부채비율과 심각한 경영부실이 위기 상황에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재벌가라 어깨를 으스대던 자들이 쉴 새 없이, 하루에도 몇 군데씩 우스스 쓰러지기 시작했다.
‘1998년 1월 5일 모닝글로리 화의신청’
‘1998년 1월 7일 나산그룹 5개 계열사 부도처리’
‘1998년 1월 9일 극동건설 화의신청’
‘1998년 1월 10일 계몽사 부도처리’
그러자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재벌 그룹들의 매여 있던 중소기업들이 하루에서 수십에서 수백 개씩 도산, 그 회사에 다니고 있던 사람들의 가정 또한 휘청거렸다.
‘지영정밀 부도처리’
‘대영유통 부도처리’
‘신운상업 부도처리’
‘신흥전자 부도처리’
고개를 들면 언제나 흔들리는 사람들.
주변을 오가다 보면 보이는 ‘폐업’이라는 글씨들.
라디오를 틀 때마다 들리는 슬픈 이야기들과 TV뉴스를 가득 매운 사건들.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의 부도가 머지않아 보였다.
“젠장!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언제까지! 이대로라면 우리 가족 다 굶어 죽게 생겼다고!”
“빌어먹을 김 사장 그 새끼. 이거 며칠째 회사에도 안 나오는 걸 보니 나른 거 아니야?”
“뭐어? 설마 그럴 리가. 아니 이 회사에 물린 돈이 얼만데 설마 그렇게 하겠어?”
“그건 모르는 일이야. 들어보니까 옆에 있는 신화정밀 이 사장도 야반도주를 했다던데?”
“정말?”
“그래. 정말이고말고. 그치들이야…….”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지금 당장 움직이지. 집으로 가 보자고!”
그런데 그때.
새마을운동 단체 중 하나, 우리나라의 산재한 여성 단체들 중 한 곳인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꿀 한 가지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새마을부녀회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으로 모은 금 2445돈, 은 133돈 중소기업진흥청에 기부키로 해! - 경X일보. 1998. 01. 13]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이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국민들의 자발적 운동이자 이후 전 세계 경제학자들을 경악에 빠뜨린 희대의 사건.
‘1998년 대한민국 금 모으기 운동’의 시작이었다.
*
“우리가 할 사업은 금덩이를 캐는 일입니다.”
나는 선언했다.
그러자 내 앞에 있던 사람들, 나와 함께 오라클을 만들어 온 사람들, 그들이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금덩이를 캔다고요?”
첫 번째 말은 레이첼, 미국에서부터 지금까지 성실히 나를 보좌해 온 나의 보좌관에게서 나왔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말, 오라클의 다음 사업에 대해 논의하던 중 나온 말에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입니다.”
일순, 흔들리는 눈을 하던 그녀, 그녀가 이내 표정을 수습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 어디에서요?”
의문 어린 그녀의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손을 들어 발밑을 가리켰다.
“바로 이곳, 대한민국에서요.”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일단 레이첼은 다소 의아한 듯한 표정을, 그리고 그 이외의 사람들, 그러니까 이어진을 비롯한 한국인들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요? 정말 한국에 금이 나올 만한 곳이 있나요?”
“에이 그럴 리가. 아니 우리나라 금들은 이미 말라붙은 지 오래지. 아마 있던 것도 일제강점기다 뭐다하면서 죄다 말라 버렸을걸?”
“그런가요?”
“그렇지. 아마 북한 땅엔 그나마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남한 땅엔 어림도 없지 아마 남아 있어도 채산성 없는 광이 대부분일 거야.”
레이첼의 말에 이어진이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선 슬쩍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금을 캔다고?”
아무래도 내가 한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 같았다.
하긴 그들이 생각하기에 말도 안 된다 여겨지겠지.
일반적으로 남한에는 대규모 금광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하지만.
“네 물론이죠. 아마 노다지 금광이었다는 운산금광보다 더 큰 광산일 거예요.”
분명히 존재한다.
어마어마한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는 금광이.
그러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이어진, 그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아니 우리나라에 금이 나올 만한 곳이 나와 있긴 해?”
“물론이죠.”
나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을 향해 천천히 폭탄을 쏘아 올렸다.
“추정 매장량 255톤.”
순간, 그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255톤?”
“네. 그것도 특상품의 금들이 잠자고 있는 곳이 있어요.”
그러자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 이어진이 나를 바라보며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255톤이라니… 설마… 너희 할머니가 알려 준 거야?”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묻자 이어진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너희 할아버지가 광산 하나는 그렇게 잘 찍으셨다며? 들어보니 예전에 폐광들을 싼 값에 사들이셔서 어마어마한 차익을 보시기도 했고. 그러니까 혹시나 해서.”
아, 참 뭔가 했더니.
아마도 예전 한성이 처음 시작될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과거 나의 할아버지 김정운이 한성광업을 창업, 폐광을 사들여 어마어마한 부를 이뤘다는 건 제법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런데.
“용케 기억하고 계셨네요?”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내가 묻자 그가 피식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도련님 일이니까. 그런데 네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닌가 보네?”
“물론이죠. 이건 그런 단순한 광이 아니거든요.”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슬쩍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이 광산은 바로 이곳, 이 도시에 있으니까요.”
일순 그의 눈이 꿈틀거렸다.
“…여기에 있다고?”
“네. 정확하게는… 사람들의 집 안, 장롱 속에 있죠.”
“뭐어?”
이어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변을 돌아보자 다른 이들 또한 비슷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분명히 존재해요. 무려 225톤에 달하는, 이제 고작 10톤 정도 남아 있을 한국은행 금 보유량보다 20배가 많은 금이 각자의 집에 자리하고 있죠.”
“너 설마 저번에 본 그것 때문에 그래?”
이어진이 조금은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얼마 전 내가 그에게 보여 주었던 신문기사, 새마을부녀회의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에 대한 기사를 기억해 낸 것 같았다.
“기억하세요?”
“기억하다마다. 그런데 준영아. 그건… 그냥 이벤트잖아. 들어보니 모인 게 몇 킬로 되지도 안겠더만. 기껏해야 몇 백 돈 정도로는 인건비도 안 나와.”
“아저씨.”
“왜?”
“분명 이전에 있었던 이벤트는 별 이슈 없이 지나갔죠. 하지만… 그게 전국구로 퍼진다면, 그리고 새마을부녀회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면 어떻겠어요?”
사람들이 멈칫 굳어 버렸다.
다들 내가 한 말의 파급력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예를 들어. 신문이나 지상파 방송, 그리고 정부의 의사를 통해 이뤄진다면 말이에요.”
그러자 잠시 멈칫한 이어진, 그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가능하다면야 엄청난 양이겠지. 하지만,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니 이런 시기에 아니 미쳤다고 누가 금을 내놔?”
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견 그의 의견도 타당했다.
경제 위기에서 합리적인 경제 주체는 유동성이 높은 자산을 매각하고 가치 변동이 적은 안전자산을 구매하여 안정성을 확보한다.
그렇다는 말은 절대로 금을 내놓을리 없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서고금 최고의 안전자산 중 하나인 금은 집안 꼭꼭 숨겨두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니까.
하지만.
“누구긴요. 바로 우리나라 국민들이죠.”
그 일이, 그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일이 일어난다.
바로 이곳에서.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국민들?”
“네. 저 밖에 있는 사람들, 이번 사태로 인해 힘겨워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요.”
“아니 준영아…….”
약간은 걱정스러워 보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나라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아저씨가 말하신 대로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런 시기에 금을 내놓을 리가 없겠죠.”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테이블 위 신문을 매만졌다.
신문 속에서 금을 모으고 있는 사람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것을 참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신문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외세의 침략에.”
“침략?”
“네. 침략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가의 환란, 민족의 위기에 가만히 움츠러들지 않아요. 그리고 도망가지도 않아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지.”
나는 단언했다.
“그러니까 며칠만 기다려들 보세요. 분명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날 테니까.”
*
며칠 뒤.
자금경색을 이기지 못한 그룹들.
재계서열 26위 아남, 28위 거평, 29위 대상, 32위 신호그룹이 차례로 흔들리고 있다는 뉴스가 신문을 탔다.
그러자 경제 위기 상황을 인지한 한 남자,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재계 인사들을 마포동 동교동 자택으로 불러들였다.
대통령 취임까지 이제 한 달,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대한민국 경제 위기, 그 해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다음날, 24시간의 릴레이 회의를 마친 사람들이 동교동 자택을 떠난 뒤, 한 가지 뉴스가 신문지상을 뜨겁게 달구었다.
[전국 106개 시민단체와 각계 인사, 한국일보, MBC, 농협과 함께 '외채상환 금모으기 범국민운동' 발대식을 개최 ? 조X일보. 1998. 01. 15]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1998년은 물론 지난 20년간 대한민국 사람들의 머릿속에 선명히 남을 사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