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거인(巨人) (3)
“회장님의 첫 사랑 살아 계세요.”
내 말이 끝난 그 순간, 정영주의 철벽이 무너졌다.
“뭐?”
당황한 놀람이 가득한 눈동자.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짙게 웃었다.
과거, 그러니까 내가 살던 2020년, 나는 한 가지 자료를 읽었다.
[현대그룹 정영주 회장이 대북 사업을 추진한 진짜 이유.jpg] [조회 124,561] [추천 3,451]
그것은 바로 정영주, 내 앞에 있는 존재의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 회장의 첫사랑은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그러니까 당시 경성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를 통천에서 유일하게 구독하는 집의 딸이었다.
정 회장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정 회장은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이장집으로 가 전날 나온 동아일보를 받아오곤 했다곤 하는데, 그때마다 20리 길도 더 떨어진 길을 마치 달리기 선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갔다고 한다.
하루 종일 농사일에 지친 몸이었지만 신문을 받으러 이장 집에 갈 때마다 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고운 얼굴의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던 정영주와 통천 최고 부자인 이장집 딸과의 결혼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결국 그는 경성으로가 변호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두 살 많은 이장 집 딸,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농군의 모습이 아닌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수많은 이산을 만들어 낸 전쟁에 의해 두 사람의 오작교는 영영 막혀 버린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꿈을 위해 혈혈단신 이남으로 내려온 정영주가 온갖 고생을 경험한 끝에 꽤 큰돈을 번 이후의 일이다.
‘아니 왜! 왜 하필 지금!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중에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년 뒤, ‘2000년 김대중, 김정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정영주 회장이 북측에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 이 정도면 내 말의 신빙성을 만들어 줄 증거로 충분했다.
2000년 이전까지 정영주의 첫사랑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정영주 그 자신을 제외하면 내가 유일할 테니까.
‘그리고 첫사랑이라는 증거에 대한 증거는 곧 일어날 김일성의 죽음이 될 테지.’
물론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첫사랑 따위로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겠지만.
정영주 회장.
그가 첫사랑에게 가지는 집착을 생각하면 가능했다.
아니 오죽했으면 적대국 수장에게 뜬금없이 첫사랑을 찾아 달라 이야기 하고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마자 첫사랑과 같이 살 저택을 구매해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을까.
이 정도면 말이 좋아 로맨티스트지 스토커, 스토커 중에서도 진성 스토커였다.
‘2000년이면 부인도 살아 있을 땐데 말이야.’
아무튼 내가 말을 마치자 정영주 회장이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게··· 사실이냐?”
그의 얼굴에는 그가 받은 충격이 고스란히 들어났다.
철인(鐵人)이라 불리는 인물. 불도저처럼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데 익숙한 인물의 당황이기에 나는 그 값어치를 헤아리며 웃을 수 있었다.
“네. 살아 계세요. 회장님의 첫사랑. 그러니까 고향 이장님 댁 따님이요.”
“아니 어떠··· 아니다아니야. 그러니까 어디 어디에 살고 있다고?”
나는 불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정영주를 향해 자신감 있게 입을 열었다.
“함경북도 청진.”
“···통천이 아니라?”
“네. 아무래도 전쟁 때 통천이 많이 망가졌던 모양이에요.”
그러자 잠시 말이 없는 정 회장. 그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내가 던진 폭탄에 조금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통천이 망가졌다. 그래. 그럴 만하지.”
실향민의 비애. 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증거가 될까요?”
“······그래.”
그러자 우리의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귀란이 슬쩍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짙은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전히 정영주를 위한 시간. 그녀의 호기심을 풀어 주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두었다.
“후우··· 이거 참.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구나. 분명 내가 그런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어떻게 알았지?”
혼잣말을 하는 듯 정 회장이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루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우유잔을 들었다.
커피였으면 좋았을 텐데.
이 당시 어른들은 이상한 곳에서 보수적인 면모가 있다.
나는 애가 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정영주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궁금하세요?”
그러자 정 회장이 쿵-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궁금하다마다. 생각만 같아서는 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나 열어 보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그건 좀.
그의 진지한 눈을 보니 아무래도 진담인 것 같다.
하긴 첫사랑. 지난 수십 년간 바라마지 않던, 죽기 직전까지 그리며 연모하던 그 여인의 거취를 11살 꼬맹이가 입에 올렸으니 궁금해 죽을 심정이겠지.
하지만.
“죄송하지만. 그건 비밀이에요.”
그렇다고 내 비밀을 말해 줄 건 아니지.
그러자 잠시 기대로 물든 던 정 회장의 눈빛이 뒤바뀐다.
“이 녀석이, 지금 나랑 장난을 치자는 것이냐?”
괄괄한 목소리.
현대가 후계자들이 다 장성한 후에도 감히 아버지에게 대들지 못했다더니. 잠시 목소리를 바꾼 것만으로도 위엄이 흘렀다.
나는 떨리는 손끝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제 장사 밑천인걸요. 회장님께서도 아실 거 아니에요. 장사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밑천을 드러낼 순 없죠.”
그러자 정 회장이 묵묵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그리고 어서 말을 하라는 듯,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
“······.”
그러나.
이미 깃발은 이쪽으로 넘어왔다.
분명 그가 가진 힘을 거대하지만 이미 약점을 보인 이상 그의 기세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정 회장을 마주보았다. 그러자 일순, 쑤욱- 온몸에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더니 정 회장의 압박에 대한 부담이 덜해졌다.
‘뭐···?’
그런 나를 본 정 회장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싹이 좋군. 그래 네 말이 맞다. 장사꾼이라면 아가리 속에 칼을 들이밀어도 밑천을 까지 말아야 하는 법이지.”
···그 와중에 나를 시험해 본 것 같다.
‘이 양반이···.’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나저나 네 말대로라면 그 빌어먹을 김일성이 죽는단 말이지?”
“네.”
“흐음, 그래? 그럼 다음은 김정일이 그 땅딸보 놈이겠구만.”
그리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들며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이거 앞으로 몇 년은 재미있겠어, 안 그래?”
약간은 소년 같은 정 회장의 표정에 김 귀란이 혀를 쯧- 차며 입을 열었다.
“재미는 무슨, 사방에서 짖어대는 소리가 시끄럽기나 하겠지. 어린놈이 정권을 잡았으니 얼마나 칼을 들고 살풀이를 하겠어.”
“단도리를 치지 않으면 지가 죽을 테니까. 원래 아비가 갑자기 죽으면 아들의 손에 피가 마르잖는 법 아닌가. 그 정도 피바람이야 당연하지.”
다들 북한 정권이 무너지리란 생각은 하지 않는 듯했다.
분명 보통의 11살은 따라갈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나에게는 이것보다 더 흥미로운 대화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 두 사람 모두 김일성이 겪은 일들과 비슷한 일들을 겪기 때문이다.
절대 군주였던 창업주들의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한 자식들의 상쟁(相爭).
그 결과 한 사람의 그룹은 완전히 몰락하고 한 사람의 그룹은 위엄을 잃고 쪼개진다.
그러니 지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나로선 그들의 대화가 생경할 수밖에.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하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이제는 골육상쟁으로 쓰러지는 그룹도 쪼개지는 그룹도 없을 것이다.
왜냐고?
그야.
‘내가 있으니까.’
눈앞에 있는 맛좋은 먹이들. 나는 그들이 세운 왕국을 먹어치울 것이다.
그들이 죽음에 이르기 전에.
그때.
“그나저나 귀란 누이. 그런데 저 녀석 진짜 11살 맞아?”
정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정 회장과 김귀란 두 사람 모두 나를 보며 쑥덕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럼 어디서 주워 왔을까?”
“아니 그게 아니라 영 11살 같지 않아서. 몸뚱아리는 영락없는 핏덩이 모습인데 안에 들어있는 건 그렇지 않은 것 같단 말이지.”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해. 괜히 흰소리 하지 말고.”
“부럽기는······ 하지만 뭐 조금 탐이 나긴 하는구만.”
아니 당사자를 바로 앞에 두고 무슨 말들이람.
하지만 뭐 이런 말들은 익히 듣던 말들, 나는 익숙한 태도로 그들의 말을 담담히 웃어넘길···
“우리 손녀 사위하면 딱 잘 좋겠어. 안 그래?”
뭐?
예상치 못한 말에 바로 고개를 돌리자 정 회장이 짓궂은 얼굴로 씨익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내 반응을 보려고 일부로 말을 던진 것 같았다.
“하하 놀라는 거 보게. 농담이야 농담.”
하지만 그의 눈은 단단하게 굳어 있어 아무리 봐도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던 정 회장. 정 회장이 테이블 위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몸을 내 쪽으로 주욱 빼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작은 선생(先生).”
“네? 저요?”
“그래. 영 어린 애 같지 않으니 선생이지.”
고개를 끄덕인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선생 말은 믿어. 하지만 그렇다고 100% 신뢰할 수는 없지.”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실제 김일성이 죽기 전까지는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말인 듯했다.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죠.”
그러자 정 회장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이해한다니 다행이구만. 원래 이 나이쯤 되면 의심이 많아지는 법이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영 믿지 못하겠다는 건 아니야. 어느 정도는, 아니 사실 거의 믿고 있어. 그래야만 내가 내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
그리곤 고개를 들어 나를 정면으로 직시했다.
“하지만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단 한 가지야.”
그가 손가락 하나를 펴며 말했다.
“공짜 점심은 없다.”
일체의 장난기를 싹 지운 정 회장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러니 묻지.”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의 내 얼굴이 묻어났다.
“나에게 원하는 게 뭔가, 작은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