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포석을 놓다 (1)
미국에 있을 때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한성그룹.
대한민국 재계서열 9위, 시가총액 15조원. 연 매출 7조, 영업이익만 무려 3210억 원 달하는 거대 기업.
산하 하청까지 모두 합해 무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공룡.
하지만 본 역사에선 1997년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해일을 막지 못해 결국 공중분해 되고 마는, IMF라는 거대한 조류에 휩쓸려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는 그룹.
이 그룹을 과연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이었다.
물론 내가 다 먹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판국에 한성가 하나를 먹기 위해 아웅다웅하긴 좀 그랬다.
뭐 굳이 한성가가 아니더라도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자본이면 이제 곧 도래할 사건, 1997년 대한민국 외환위기를 묻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현재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이 얼마나 되죠?’
‘가용자금? 지금 당장은 3억에서 5억 달러 정도야. 일단 묶인 돈이 있으니까.’
‘연말까지 최대한 준비한다면요?’
‘최대한 준비한다면? 그렇다면 10억, 아니 현재 상태로 보면 그 이상도 가능해. 왜?’
‘아마 돈이 제법 많이 필요할 거예요. 그러니까 연말까지 가용자금을 모두 다 만들어 주세요.’
‘…한국에서 쓰려는 거야?’
‘네. 하지만 원화는 됐어요. 저희한테 필요한 돈은 달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또 한성을 과감히 버리자니 조금 아까웠다.
아니 한성가가 한국에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자산들.
예를 들어 한성가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한성가가 수십 년간 뿌려 놓은 자본. 그리고 한성가가 만들어 놓은 은밀한 인재들 같은 유형무형적 자산들이 자꾸 내 눈에 밟혔던 것이다.
말마따나 한성이 지난 세월 각종 경제 부처나 검경 기관에 뿌려 놓은 돈만 해도 내가 앞으로 할 일들을 보다 수월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
‘김귀란이 괜히 정치인들한테 누님, 누님 소리를 듣는 게 아니지. 들어보니 한성가에서 고싯밥 먹여 키운 검사들도 부지기수에 명절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고 들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소탐대실 할 수는 없는 법, 때문에 나는 고민했다.
먹을까? 아니면 말까?
먹으려면 먹을 수 있었지만 그 노력이 가치가 있을 것인가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한성가가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노리다 중요한 걸 놓칠 수 없지.’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한국으로 가자.
일단 한국으로 가서 김귀란, 그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고 결정하자.
그런 뒤 한성가의 현재 상태를 파악해 견적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성을 한입에 먹어치우는 거다.
뭐 그렇다고 온전히 손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야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통해 커버하면 될 테니까.
‘좋아요. 그럼 아저씨 오늘부터 한성가에 대한 정보들을 좀 취합해 주세요.’
‘뭐? 한성? 너 혹시…?’
‘네. 아마 아저씨 생각이 맞을 거예요. 그러니까… 확실하게 준비해 주세요. 자료 조사 결과에 따라 다음 행보가 결정될 테니까요.’
그리고 오늘, 나는 드디어 오랜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한성가.
한성그룹.
나의 할머니 김귀란의 모든 것.
그동안 고민했었던 계륵(鷄肋), 그것을 내가 먹어치우기로.
왜냐하면.
“그래. 그동안 연락 한 번을 할 여유가 없었단 말이냐?”
…김귀란, 이 양반이 아무래도 나한테 푹 빠져 있는 것 같거든.
나는 나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노파.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 앞에서 이성적인 시어머니 모습을 보이던 사람, 하지만 내 앞으로 오자마자 슬쩍 본색을 드러내는 인물,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그러자 잠시 멈칫하는 김귀란, 그녀가 이내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코웃음을 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할머니는 무슨, 그런 녀석이 2년 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 찾아오지도 않아?”
…아무래도 지난 2년간 내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것이 서운한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손자가, 그것도 15살 먹은 어린 손자가 해외에 나가서 2년간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는다면 자연 저런 모습을 보일 테니까.
문제는…
‘그녀가 그냥 일반인이 아니라는 거지.’
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穩尻?, 그녀를 마주 바라보며 짙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찌푸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에이, 죄송해요 할머니. 그동안 일이 너무 많아서요.”
“됐다. 아까 보니 제 엄마 치마폭에 아주 잘 숨어 있더구나.”
이 사?, 제법 애가 닳긴 닳았나 보네.
사실 처음부터 그녀의 속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 이곳,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판교에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한성가를 이용할지 안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지난 2년간 김귀란에게 일체의 연락을 하지 않? 만큼 그녀의 た? 대한 관심이 떨어냅? 수도 있다고 생▤薩? 때문이었다.
??扁? 몸【? 羚지?? 마음에서도 멀어測? 법이지.’
하지만.
방금 전 있었던 그녀의 등장, 그리고 김귀란과 어머니의 짧은 대화를 듣고 난 뒤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내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내가 한국에 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게.
그러자 흔들리던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 이거? 되겠는데?’
그녀의 기대, 그녀의 나에 대한 기대가 나도 모르는 사이 더 깊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 들어나 보자 도대체 뭣 때문에 연락을 안 한 것이냐?”
바로 내가 한성가를 날로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아시지 않아요?”
“잔망스러운 녀석. 네 입으로 듣고 싶다는 거다. 네 입으로.”
뭐 큰아버지들이랑 고모가 남아 있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김귀란 그녀의 의중이니까.
“하하, 뭐 간단해요. 미국에 가서… 사업을 하나 시작했죠.”
“…사업?”
“네. 투자 사업이요.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거. 그러다 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시간이 훅 지나가 버릴 정도로.”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멈췄다.
그러자 내 말을 들은 김귀란의 눈에 잠시 이채가 감돌더니 이내 스르륵- 그녀의 눈에 감돌고 있던 약간의 불만 사그라들었다.
사업 때문이었다는 나의 말, 그 말도 안 되는 말이 그녀의 마음에는 쏙 들었던 것이다.
“그래?”
“네. 물론이죠.”
하긴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녀는 원래 자신의 감정보다 자신의 사업을, 자신의 혈육보다 자신의 회사를 더 중시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뭐 듣기는 했다만. 제법 재미가 좋았나 보구나.”
“네. 제법 성과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그녀도 깜짝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할 때가 있었다.
“뭐 그렇다면 좋다. 성과가 있었다면 된 것이지. 그런데 학교는 도대체 어찌하고 여기에 온 것이냐?”
가벼운 그녀의 질문, 그 질문에 내가 작은 폭탄을 선사한 것이다.
“학교요?”
“그래. 내가 네 덕분에 내가 오랜만에 회장들한테 면이….”
“휴학했어요.”
순간, 그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뭐? 휴학? 아니 하버드를 휴학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진 그녀의 눈, 그 시선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다시 복학할 생각은 거의 없어요.”
“아니 왜?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복달을 하는 곳인데.”
“저에게는 이제 가치가 없어진 곳이니까요.”
“가치가 없어졌다고?”
“네. 이미 얻을 것을 얻었는데 아까워 뭐 하겠어요.”
그러자 잠시 내 속내를 확인하겠다는 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김귀란, 그녀가 이내 묵묵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 물론이죠.”
나의 대답 그 대답에 그녀가 불현 가벼운 미소를 입에 물었다.
“하, 그래. 뭐. 얻을 것을 얻었다면 아까워하지 말아야지. 이미 쓸모가 다한 걸 굳이 손에 잡고 있어 봐야 더 큰 것을 쥘 수 없는 법이니까.”
아무래도 내 대답이 내심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분명 그녀가 나에 대해서, 내가 이룬 공개된 성과를 통해서 나에게 기대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생각일 뿐 앞으로의 미래를 약속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김귀란 또한 사람인 이상, 그 생각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과감하게 나갈 필요가 있겠지.’
시간은 언제나 부족한 법이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내 앞에 있는 사람. 김귀란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그러자 김귀란, 그녀가 의문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젠 할머니라는 말이 술술 나오는구나.”
“그럼 회장님이라 해 드릴까요? 예전처럼 말이에요.”
“쯧, 녀석 말이나 못하면. 그래. 왜 그러느냐?”
“저한테 뭔가 바라시는 게 있는 거죠?”
순간, 김귀란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었다. 그 모습은 속내를 들킨 사람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약간 흔들리는 그녀의 눈, 나는 그녀의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가 이곳에 오셨으니까요. 그리고…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기시도 했고요.”
일순 가만히 멈춰선 그녀, 그녀가 돌연 그녀가 가볍게 웃음을 보였다.
“하, 평소의 모습이라. 녀석, 본 사이에 눈치만 늘었구나.”
그리고는 가볍게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고요히 대답했다.
“그래. 있다. 너에게 바라는 것이.”
그녀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지금까지의 웃음기, 지금까지의 감정,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가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입에 집중했다.
“그게 뭐죠?”
나의 물음, 그 말에 김귀란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후계자.”
그 말은 무거운, 하지만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후계자요?”
“그래. 평창동으로 들어오거라.”
묵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보이지 않게 짙은 미소를 입에 물었다.
아무래도 지난 2년 사이 그녀의 심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렇게 급작스레 내게 이런 제안을 던지지 않았을 테니까.
좋아 그렇다면.
“좋아요. 평창동. 들어갈게요.”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 상정.
내 대답에 그녀가 일순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
하지만. 나는 말을 덧붙였다.
“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뭐 들어가는 건 들어가더라도 염가에 들어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회사. 한성유통의 지분, 그걸 저한테 주세요. 그게 제 조건이에요.”
순간, 김귀란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