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 297화 붕괴를 딛고 (2)
“엑슨모빌, 로열 더치 쉘, BP, 쉐브론… 아니 이걸 다?”
이어진이 놀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이번에 내가 거둬온 성과를 보고 살짝 놀란 듯싶다.
그가 들고 있는 서류에는 오늘 내가 거둬들인 성과.
엑슨모빌, 로열 더치 쉘, BP, 쉐브론 흔히 세븐 시스터즈라 불리는 회사들의 지분 양도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물론이죠.”
“아니 정말?”
“이미 냄새가 나기 전부터 나스닥 시장에 대한 모든 투자를 정리한 사람이에요. 그런 만큼 그 위험도를 크게 보고 있겠죠.”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지분을 양도한단 말이야?”
“네. 잘 알고 있는 만큼 포기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라면 제가 들고 있는 상품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 다음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뭐 그 물건을 판 사람들이 누군지도 생각해 봐야겠지만 말이에요.”
그랬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상품, 그것이 만약 일반적인 회사에서 나온 상품이었다면 현재 내가 거둔 성과는 어려울 수 있었다.
골드만삭스가 이번 하락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닌 만큼 굳이 내가 거둘 수익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의 계약 주체가 누구인지가 문제였다.
벌지 브래킷.
골드만삭스와 함께 월가를 지배하고 있는 금융자본, 그들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상품인 만큼 그는 거부할 수 없었다.
경쟁상대를 뒤흔들 수 있는 패란 때론 천금을 줘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
“하긴, 생각해 보면 그러네. 아무래도 서로 그리 사이가 좋진 않을 거 아니야?”
“뭐 그렇죠. 협력이나 뭐니 해도 결국 파이는 하나뿐이니까. 게다가 1300포인트예요. 그가 예상한 것보다 더 큰 수치의 하락폭이죠. 그런 만큼 무시할 수 없었을 거예요. 만약 저희 예상이 그대로 이뤄지면 이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조금 아쉬운데?”
“왜요?”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좀 더 받아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의 표정에선 약간의 욕심이 깃들어 있었다.
“에이, 아마 이 이상을 원했다면 그쪽도 그대로 ‘다이’를 외쳤겠죠. 아무리 그래도 손해를 보면서까지 우리 물량을 소화하려 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아… 뭐 그래도 아쉽긴 하다. 아무래도 큰 자금이 들어올 거였잖아.”
“그것으로 2년이라는 시간을 샀다면 남는 장사죠. 게다가… 우리가 거저 준 것은 아니니까.”
내가 알기로 1년 뒤 미국엔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 전과 그 이후로 세계의 사회, 경제, 문화가 뒤바뀔 정도의, 그런 만큼 이 장사는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석유란 산업의 피였으니까.
“뭐 그건 그렇지. 그럼 우리가 올해 벌어들일 돈은 한… 450억 달러 정도 되는 건가?”
“풋옵션으로 벌어들일 돈만 보면 그렇겠죠. 지분으로 받을 물량을 빼놔야할 테니.”
“하, 1년 만에 50조가 넘는 돈이라니. 준영아 우리 그냥 그룹 운영하지 말고 주식이나 계속할까?”
“웬걸요. 이건 그저 이벤트일 뿐이에요. 지속성이 없다는 거 아저씨도 잘 알잖아요.”
나는 이어진을 바라보며 단언했다.
“중요한 건 힘이에요. 자본과 그것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힘. 그것이 필요하다는 거죠. 물론 그 와중에 주식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그가 피식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끝까지 안 한다는 소리는 안 하네?”
“돈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렇게 잠시간의 말을 마친 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자금이 들어오는 대로 운용할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그러자 이어진이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시일이 조금 걸릴 거란 건 알고 있지?”
“물론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또 아닐 거예요. 상품이 직관적인만큼 자금이 들어오는 것 또한 그럴 테니 말이죠.”
“……혹시 모든 돈을 한국으로 가져갈 셈이야?”
“일부는요. 하지만 대부분은 국내로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국내는 또 국내의 자금이 있지 않겠어요?”
“코스닥?”
“물론이죠.”
나스닥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코스닥 시장의 버블 또한 컸다.
예를 들어 1999년 상장한 회사 ‘인터넷으로 광고를 보면 현금을 준다’는 독특한 사업 아이템으로 규모를 키운 골드뱅크커뮤니케이션즈란 회사는 이후 시총 4,000억 원까지 1년 만에 무려 50배가 넘게 치솟았다.
그 밖에도 ‘무료 인터넷 전화’ 사업을 무기로 1999년 하반기에 상장한 새롬기술이라는 회사는 6개월 만에 무려 150배 가까이 폭등해 단숨에 코스닥 황제주로 자리 잡은 것은 물론, 올해 2월 시가총액 3조 원을 넘어서 벤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크기는 작지만 그 높이는 높은 것이다.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매한가지니까.
“아마 대한민국도 난리가 나겠지.”
“타격은 클 거예요. 뭐 미국보다는 덜하다고 해도.”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평범한 월가의 모습, 정장을 입고 퇴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월가의 명물 ‘돌진하는 황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아무 일도,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분위기. 너무나 일상적이고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 그 모습에 나는 손끝이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곧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 와중에 나는….
‘거인이 되겠지.’
태평양을 손에 쥘 수 있는 거인이 말이다.
*
‘떨어질 팀은 떨어진다’
그 말은 곧 피할 수 없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
뿌리가, 근본이 없는 존재의 형세란 허망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스닥 버블의 붕괴 또한 그러했다.
2000년 초반 컴퓨터 인식오류가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Y2K 대란’이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 버린 뒤, AOL과 타임라인의 합병으로 한때 5090선까지 치솟았던 나스닥 지수는 정점에 이른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다.
[AOL 78.00 ▼ 6.10]
[텍티컬닷컴 15.50 ▼ 1.10]
[일렉트릭아이덴티티 12.30 ▼ 1.30]
[젠틱 9.10 ▼ 0.90]
2000년 3월 초 사상 최대폭(10.0%)으로 급등하며 마지막 화려한 불꽃을 피운 주가가 2000년 4월 10일 11.4% 폭락하며 고통스러운 버블 붕괴의 ‘신호탄’을 쏜 것이다.
[나스닥 지수 ▼ 5090]
↓
[나스닥 지수 ▼ 4850]
↓
[나스닥 지수 ▼ 4530]
그러자 사람들, 대출을 받아 나스닥 시장에 투자를 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패닉에 휩싸여 버렸다.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미쳤어! 마이크로소프트, 시스코, 제너럴일렉트릭이 정말로 보유주를 팔기 시작했다고!”
지난 5년간 미친 듯이 상승해 온 나스닥 증시의 폭락, 불과 하루 만에 수백억 달러가 증발해 버린 것에 사람들의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다.
“뭐어? 아니 왜! 도대체 왜?”
“뻔하지! 그동안 올라갔던 주가가 더 뻥카였다는 거 아니겠어?”
“아니 왜? 분명 걱정할 것 없다고….”
“빌어먹을 투자사의 말이었지.”
그러자 자연 공포가 전염되기 시작, 무려 549개 종목이 하한가를 찍더니,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어 왔던 대형사들의 주식 또한 평균 10% 넘게 빠졌다.
그리고 오전 선물 시장 급락으로 사이드카가 발동, 오후에는 주식과 선물 매매를 일시 정지하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했다.
[마이크로소프트 150.00 ▼ 5.55]
[시스코시스템즈 70.10 ▼ 3.50]
[제너럴일렉트릭 110.40 ▼ 10.00]
‘내 돈이 마르기 전에 내 돈을 찾는다’
뱅크런, 아니 펀드런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물에 빠졌으니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가야지.”
“아니 이대로 그냥 나가 버린다고? 안 돼! 이대로는 손해야! 내 돈이 다 날아가 버린다고!”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지금이 아니면 그나마도 건질 수 없을 거야. 모든 게 끝나 버린다고!”
“빌어먹을….”
그때, 이변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혼란에 쌓여 너도나도 나스닥이라는 전쟁터에서 탈출하고 있던 그때. 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Fed에서 현행 금리를 5.15%에서 4.95%로 낮출 것이라는 정보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 시스코, GE 등의 나스닥 대형주들을 중심으로 폭락했던 주가가 보합세를 유지. 곧 대형금융사들 측에서 ‘한 달 안에 현 사태는 회복될 것이며 그렇게 판단했을 때 현 상황은 매력적인 벨류에이션을 기대할 수 있는 타이밍’이라는 발표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곧 AOL과 타임라인의 합병에 버금가는 거대한 규모의 합병이 있을 것이다’라는 증권사발 정보가 돌기 시작하면서 아노미 상태로 치닫던 나스닥 시장의 폭락이 잠정 정지, 유지되기 시작했다.
“이거 버틸 만한 거 같지?”
“……아무래도?”
낙관주의. 그동안 나스닥 시장을 만들어온 지긋지긋한 낙관주의가 또다시 대가리를 들이민 것이다.
“후, 큰일 날 뻔했네. 아니 그럼 그렇지. 5000까지 오른 지수가 이렇게 한 번에 무너지겠어?”
“그렇지. 이게 무너지면 한두 사람이 큰일 나는 게 아닐 텐데. 아무래도 정부 차원에서 손을 쓰겠지.”
“그렇지. 그러니까….”
“왜 다시 움직이게?”
“아니 말마따나 이제 다시 올라간다면 조금 더 투자하고 나서 정리해도 될 거 아니야.”
그러자 사태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움직이려 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공포에 질려 시장을 빠져나가려던 사람들 사이에서 차츰 매수세가 일어나더니 이내 흔들리는 주가가 횡보, 오라클 사람들의 입에서 ‘위기’라는 단어가 나올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보스.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습니다. 하락 일세였던 나스닥 지수가 횡보하고 있습니다.”
“떨어지고 있던 지수가 횡보하고 있다라… 아무래도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네요. 현재 지수가 얼마나 되죠?”
“현재 4480포인트입니다. 어제와는 15포인트 차이입니다.”
“4480포인트라면 어제보다 조금 올랐군요.”
“네. 아무래도 AOL의 채권단 측에서 AOL의 추가 자금 지원 의사를 내보이면서 일반 투자자들의 기대 심리가 상승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시장을 지지하고 있는 대형사들의 오피셜도 매수를 촉진하고 있고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상황이 반가웠다.
“네? 그 무슨….”
왜냐하면.
“이제 곧 이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테니까요.”
지수가 높을수록 그 안에 들어간 자금이 많을수록 높이 올라갈수록 그 충격이 더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 아무리 테이프로 구멍을 막는다고 해도 침몰하는 배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새로운 국면 말입니까?”
“그렇죠. 이제 곧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겁니다. 이미 나스닥이라는 이름의 배는 회생 불가능한 상황이니까요.”
그리고 얼마 뒤, 횡보하던 지수가 차츰 상승국면을 띠려 하던 그때.
폭탄이 터져 버렸다.
[나스닥 지수 ▼ 4490]
↓
[나스닥 지수 ▼ 4300]
↓
[나스닥 지수 ▼ 4250]
골드만삭스.
나의 의뢰를 맡은 용병들이 벌지브래킷, 그들의 뒤통수를 쳐 버린 것이다.
[버블 결국 터지나? 골드만삭스, AOL에 대한 채권 지불 유예 거절! ? 월스트리트 저널. 2000. 03. 15]
‘골드만삭스 은행이 나스닥 상장사 AOL의 채권 지불 유예를 거절했다. 이는 근래 일어난 나스닥 시장의 혼란과 관계된 것으로 골드만삭스 측은 AOL 이외에도 24개 회사에 대한 채권 지불 유예를 거절한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AOL을 비롯한 나스닥 상장사의 상당수가 자금경색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결정은 나스닥 상장사들의 만연한 부실과….’
붕괴가 시작되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