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천지개벽 (2)
재계 서열 12위.
한성그룹의 본사 회의실.
"······."
김귀란의 명령에 모인 사장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을 때였다.
벌컥-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회장의 호위무사, 전진호가 뚜벅뚜벅 회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김귀란이 전진호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전진호가 가져온 자료를 김귀란에게 넘기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이었습니다. 오늘 오전을 기해서 실명으로만 은행거래가 가능하게 바뀌었고 실명확인 절차를 못 거친 기존 비실명 자산은 인출 금지되었습니다."
순간.
아.
누군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진호의 말.
그 말은 곧 금융실명제가 실제로 실행됐다는 소리. 그리고 며칠 전 김귀란 회장이 예상했던 것이 그대로 적중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다들 모였나?’
‘예.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지···?’
‘간단하게 말하지. 오늘부터 다들 금융실명제에 대비하도록 해.’
‘네? 금융실명제요?’
‘그래. 기간은 오늘부터 딱 일주일. 그 안에 깔끔하게 처리해서 내 앞에 가져다 놔.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다들 한성의 권력자 김귀란의 명이었기에 따르긴 했지만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이기에 그 놀람은 더 컸다.
그때.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 회장의 충성파 중 한 명인 한성유통 주세붕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김귀란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대단하십니다, 회장님! 아니 어떻게 금융실명제가 시작될 거라는 걸··· 앉은 자리에서 천리를 내다보시는 그 식견, 정말 본받고 싶습니다."
손발이 절로 오그라드는 아부였다.
그러자 사장들도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김귀란을 향해 공치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회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회장님이 건재하신 한 한성이 재계서열 11위로 올라가는 것도 이제 금방일 겁니다."
"무슨 소리! 11위는 물론 10위권도 가능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하."
다들 그동안 금융실명제의 실행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만큼 어떻게든 그동안 깎인 점수를 회복하려는 것 같았다.
물론 휘하 사장들의 충성경쟁이 더해질수록 김귀란의 주변에 앉아있던 그녀의 아들들. 장남인 부회장 김명진과 차남인 김명현 사장의 얼굴을 급격하게 굳어 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현재 한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또 누가 그들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지였다.
그렇게 한동안 사장들의 공치사를 듣고 있던 김귀란이 이내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지랄들 하고 자빠졌네."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김귀란이 바짝 굳어 버린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여기 놀러왔어? 바자회야?"
"······."
"입들 닫고 보고나 들어. 분명 내가 명령한 건 1주일이야. 그 안에 다 처리하지 못한 사람은 사표 쓸 준비나 하고 있고."
사장들의 머리가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본 김귀란이 이내 전진호를 바라보았다.
"비실명계좌들은? 어떻게 됐어? 다 묶였다던가?"
전진호가 슬쩍 사장들을 일별하며 말했다.
"예. 일단은 다 묶인 상탭니다. 하지만 정부쪽에서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닌지. 2개월 정도의 실명전환 기간을 두고 그 기간 안에 신고하는 계좌에 한해 전환을 인정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만약 모든 차명계좌를 동결한다면 금방이라도 쿠데타가 일어날 테니까. 김귀란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여상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대통령도 생각이 없진 않을 테니 당연하겠지. 그래 한 계좌당 얼마까지 봐준다던가?"
"그게··· 5,000만 원까지는 봐주고 그 이상은 소득세를 부과한답니다. 거기다 실명전환 기간 이후에 전환을 하면 60퍼센트까지 과징금을 때린다고···."
순간, 회의실 안에 침음성이 흘렀다.
60퍼센트의 소득세와 과징금. 그 말은 타협은 없으니 두 손을 들고 항복하라는 말과 같았다.
생각보다 더 강한 제한에 김귀란이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 완전 도둑놈 심보구만. 이번 봉황은 제법 성격이 있어. 안 그래?"
그리곤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중년의 사내. 한성그룹의 부회장이자 자신의 장남인 김명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명진 부회장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네. 아무래도 이 기회에 확실히 빗장을 걸어 두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허 참.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아니 말마따나 보면 그 사람도 그리 깨끗하지 않을 텐데."
"명분이 좋지 않습니까. 게다가 아직 정권 초기이기도 하고···."
김명진이 말끝을 흐리며 슬쩍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귀란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아직 정권 초기니까. 쯧, 그래 좋아. 부회장. 그럼 이에 대한 대응은? 어떻게 처리했지?"
중요한 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 김귀란에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따라 자신 앞으로 올 재산과 권력의 양이 달라졌다.
김명진 부회장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측근들 중 한 명이 그에게 자료를 건네주었다.
"일단 그룹에서 관리하고 있던 차명계좌 1,000개 중 선순위로 처리해야 하는 계좌, 그러니까 회사 외부인들의 명의로 된 계좌 500개에 들어 있던 돈을 3,000만 원짜리 소액구좌로 분산시켜 놨습니다. 그리고 은행에서 소화하지 못할만한 금액은 20년 만기 무기명 국민주택채권 채권으로 바꿔 놓은 상태입니다."
다른 그룹들과 달리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있었던지라 한성의 차명계좌 정리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뤄졌다.
다른 그룹이 본 손해에 비하면 거의 10분의 1정도?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조심해야만 했다.
"그래? 흐음, 혹여나 꼬리를 밟히진 않았겠지?"
김귀란의 말에 김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줄 알고 그동안 키워 놨던 은행장들을 통해서 처리해 놨으니 뒷말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 정책 실행 전에 처리하기도 했고 또 그 사람들도 받아먹은 게 있으니···."
"받아먹은 게 있으니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혹시 몰라 따로 한 번씩들 만나서 다독여 놓은 상태입니다."
김명진의 말에 김귀란이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잘 했어. 돈놀이 하는 놈들 말 바꾸는 거야 여반장이니까 확실하게 조여 놔. 여차하면 말 못 바꾸게 꽃놀이도 한 번씩들 시키고."
"알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 300개 계좌에 있는 돈들은 회사 직원들을 동원해서 인출, 현금화 시켜서 내일 안에 평창동 저택 지하 금고 안에 옮길 계획입니다."
평창동 금고.
지하 5미터에 자리한, 1미터가 넘는 철근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5인치 두께의 강철 금고.
155mm 포탄이 근처에 떨어져도 안전한 곳이었다.
"거기라면 안심이지."
"네. 뭐 아직 100억 정도가 남아 있긴 하지만··· 아마 그 계좌들은 괜찮을 겁니다."
순간, 김귀란의 표정이 일변했다.
"···괜찮다?"
아무래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김명진은 김귀란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 뿐이었다.
"네. 그룹 직원들 명의로 되어 있는 거라서 지금 당장은 안심하셔도···."
쾅-
김귀란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야! 100억이야 100억! 생때같은 내 돈 100억을 남의 손에 맡겨 놓고 뭐? 안심하셔도 됩니다?"
김귀란의 노성에 김명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갑작스런 상황에 차남인 김명현을 제외한 사람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그러니까···."
김명진이 뭐라 변명을 해 보려 했지만 김귀란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고 지랄이고 빨리 가서 다 찾아놔. 지금이야 놈들이 아무것도 모르니 가만히 있지 조금만 더 지나면 지 통장에 들어 있는 돈 때문에 눈이 벌게져서 도망갈 궁리나 할 테니까. 알아들어?!"
그때서야 김명진이 아차 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아, 알겠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김귀란이 한심하다는 듯 그를 혀를 차더니 이내 사장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도 정신 차려. 괜히 설렁설렁 처리하다가 꼬리 잡혀서 누구 휠체어 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사장들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김귀란의 힘과 식견을 확인한 이상 괜히 불똥이 튈까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
뒷수습을 하기 위해 사장들과 그녀의 자식들이 회의실을 빠져 나간 후. 자료를 확인하던 김귀란이 갑자기 전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놈 뭐하고 있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한 전진호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놈이라 하시면··· 혹시 준영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놈."
김귀란이 건방진 10살짜리 혈육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전진호가 슬쩍 시간을 확인,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직 오전이니 학교에 계실 겁니다."
"그래? 흐음, 요즘도 증권사에 자주 가던가?"
"아닙니다. 저번에 회장님께 혼난 것 때문인지 요즘엔 하교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저번에 대출 받았던 돈은?"
"그 다음날 바로 상환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만······."
김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근 십 년간 그녀를 모신 전진호는 그녀가 진짜 하고픈 말이 그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 금융실명제 때문에 그러십니까?"
순간, 김귀란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자네··· 계륵이라고 아나?"
계륵고사(鷄肋古事).
조조의 속내를 알아차린 양수를 조조가 참수한 사건.
그녀의 입에서 계륵이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니 전진호가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린 것이 자못 불편한 것 같았다.
그러자 전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괜찮아? 뭐가?"
"회장님께서 제 목을 치시겠다면 웃으면서 내어드리겠습니다."
전진호의 말에 김귀란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전진호의 이런 자세가 좋았다.
얼마 전까진 만약 전진호가 제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원 사람 참, 늙은이가 할 말 없게 만드는구만. 쯧, 그래. 금융실명제 때문에 좀 마음에 걸려서 그랬다네. 자네도 봤다시피 그놈이 말한 대로 됐잖은가."
그 또한 김귀란과 준영의 대화를 들은 사람. 금융실명제가 실제 준영이 말했던 대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예. 솔직히 놀랍습니다. 제법 눈치가 빠른 사람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도련님이 파악하신 거니까요."
"그렇지. 그만큼 비밀리에 이뤄진 일이야. 그런데 그놈은 어떻게 알았을까?"
진진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번 조사해 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조사. 김준영의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김준영이 만나는 사람들의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하는, 김귀란의 적을 파악할 때에 사용하는 조사를 뜻했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는 김귀란이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중요한 일은 남한테 맡길 순 없지."
"그럼······."
"그래. 내가 직접 가겠네. 어차피 녀석에겐 치러야 할 대가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