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심연 속으로 (1)
"정말요? 정말 제임스 카메론이랑 약속을 잡았어요?"
"그렇다니까? 영화 개봉이 얼마 안 남아서 조금 힘들긴 했는데 계속 연락해서 결국 대답을 받아 놨어."
이어진의 말이 끝난 그 순간 나는 주먹을 꽈악 그러쥐었다.
제임스 카메론이라면 터미네이터 시리즈, 람보2, 에일리언2, 트루라이즈 등의 영화를 연달아 흥행시키며 할리우드의 보증수표로 자리매김한 감독.
그리고.
총 제작비 2억 5천만 달러.
북미 흥행수익 6억 5천만 달러.
전 세계 흥행수익 21억 달러.
북미 박스오피스 15주 연속 1위.
역대 영화 흥행순위 1위.
1998년 제7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4개 부분에 지명되어 11개 부문에서 상을 수상한, 1997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된 영화. 타이타닉(Titanic)의 감독이다.
때문에 나는 할리우드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와의 접촉을 시도했었다.
만약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2억 달러에 이르는 타이타닉의 제작비와 그와 비슷한 규모로 들어간 마케팅비를 모두 다 뺀다고 하더라도 약 22억 달러. 러프하게 계산해도 2조 원이 넘는 돈이 내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임스 카메론 그의 또 다른 이름.
‘흥행의 귀재’
지금껏 그가 감독을 맡은 영화 대부분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만큼 앞으로의 가치 또한 어마어마했다.
‘타이타닉의 흥행으로 그가 벌어들인 돈만 약 1억 달러니까.’
하지만 내가 제임스 카메론 그에게 연락을 할 때마다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거절’.
때문에 지금은 반쯤 기대를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타이밍에 그와 약속을 잡아왔다고?
제임스 카메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생각하면 절로 심장이 떨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약속 잡은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계속 연락했었는데 그쪽에서 계속 거절했었잖아요."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 이어진, 그가 이내 손가락 하나를 펴며 내게 말했다.
"그랬지. 그래서 아는 사람의 손을 좀 빌렸어."
아는 사람? 그게 누구지?
"누구요?"
"로빈 월리암스."
"아."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그래 로빈 윌리엄스 정도의 인지도와 네임밸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제임스 카메론과 접점이 있을 수도 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어진이 피식 웃으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로빈 정도면 혹시 친분이 있을까 해서 연락해 봤지. 그랬더니 그쪽에서 알겠다는 연락이 오더라고."
"그랬어요?"
"어. 이른바 인맥의 승리지."
좋다. 뭐 이유야 어찌 됐건 제임스 카메론과의 만남이 성사된 이상 남은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철저한 계획으로 그의 마음을 훔치는 것. 그래서 그의 차기작, 타이타닉을 내 손에 쥐는 것 그것뿐이다.
"좋아요. 그럼 약속 장소는 어디에요?"
"가까워."
"어디요?"
"캘리포니아 북부. 세크라멘토."
나와 이어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
며칠 뒤.
캘리포니아 북부, 샌프란시스코와 요세미티 국립공원 사이에 있는 도시, 캘리포니아 주의 주도 센크라멘토(Sacramento)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제임스 카메론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어요?"
"1시. 시간은 충분해. 레스토랑 전체를 다 빌려놨으니까 자리 걱정도 안 해도 되고."
약속장소는 바로 엘크 그로브에 있는 채식주의 레스토랑. 제법 철저한 채식주의를 고수하는 제임스 카메론의 식성에 맞춘 선별이었다.
"빌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하셨네요."
"하하 고생은 무슨,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나라니까."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레스토랑에 도착, 직원들의 융숭한 접대를 받으며 자리에 앉아 있던 그때. 텅 빈 레스토랑의 정문이 열리며 세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영아."
"알아요. 봤어요."
들어온 세 사람들 중 가장 앞서 걷고 있는 사내. 덥수룩하게 기른 턱수염에 약간 바랜 머리칼과 평범한 청바지 차림의, 미국인 치고는 그리 크지 않은, 하지만 매서운 눈빛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남자.
그가 바로 1981년 데뷔 이래 터미네이터, 람보2, 에일리언2 등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 낸, 몇 년 뒤엔 타이타닉, 아바타 같은 할리우드 역사에 남을 만한 영화들을 만드는 명감독.
그 불같은 성격 때문에 촬영장의 스태프들은 그를 촬영장의 폭군, 혹은 촬영장의 조지 S. 패튼 장군이라고 불리는 남자.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었다.
"반갑습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님. 저는 오라클 인베스트먼트의 CEO 이어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희 회사의 소유주인 김준영이라고 합니다."
이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임스 카메론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잠시 이어진을 바라보던 제임스 카메론이 이내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11살에 한 회사의 소유주라. 캡틴의 말이 사실이었군."
아무래도 캡틴, 그러니까 로빈 윌리엄스에게 나에 대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뭐 전생이었다면 캡틴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방패를 든 근육질 남자를 생각했겠지만 이 당시 캡틴이라면 ‘죽은 시인의 사회’의 로빈 윌리엄스를 뜻하는 것이었다.
"로빈에게 들으셨나 보군요."
내가 묻자 제임스 카메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로빈이 그러더군 내가 흥미를 보일 만한 사람이 있다고 말이야."
그렇게 잠시 통성명을 마친 우리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정확하게는 나와 이어진, 그리고 제임스 카메론만. 나머지 수행원들은 레스토랑 내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이쪽을 주시했다.
"그래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용건이 뭐지? 되도록이면 빨리 말해 줬으면 좋겠군. 내 시간은 제법 비싼 편이거든."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시작한 말. 단도직입적인 제임스 카메론의 질문에 이어진이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감독님의 다음 영화, 저희가 투자, 배급하고 싶습니다."
일순 제임스 카메론의 눈빛에서 살짝 짜증이 스쳤다.
제임스 카메론. 그는 명실상부한 스타 감독. 그가 찍고자 하는 영화가 있다면 찍을 수 있었다.
솔직히 그가 영화를 찍고자 하면 수많은 제작사, 배급사들이 그에게 돈을 가지고 달려와 제발 영화를 찍어 달라 할 테니까.
그러니 그가 보기에 이어진의 제안은 말도 안 되는 일. 주제를 모르는 일이었다.
"투자라… 내가 무슨 영화를 찍을 줄 알고?"
이어진을 바라보는 제임스 카메론의 시선에 경멸이 서렸다.
자신이 가진 능력도 모른 채 욕심을 위해 달려드는 부나방을 그간 여럿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이타닉을 소재로 한 영화 아닙니까?"
이어진, 아니 오라클은 부나방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 제임스 카메론의 몸이 일순 움찔 거렸다.
1995년 중순, 이 시점에 제임스 카메론 그가 타이타닉을 영화화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문은 빠르군."
"아무래도 소문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서요."
"소문으로 먹고 산다라… 그렇다면 내가 폭스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제임스 카메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이어진을 바라보았다.
20세기 폭스라면 할리우드 주요 배급사 중 한 곳. 이른바 빅6에 속한 대형 배급사였다. 그런데 그런 회사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배팅이라니. 자연 이어진을 보는 제임스 카메론의 시선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 가능성이 충분하니까요."
"태평양이 갈라져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모험을 좋아하지만 내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 때만큼은 안정을 추구하니까."
"아니요 당신은 우리와 일을 하고 싶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의 물주들이 당신의 프로젝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이어진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순간, 제임스 카메론이 마치 칼에 찔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내가 과거에 듣기로 <트루 라이즈>에 이어 제임스 카메론의 ‘물주’가 된 사람들, 20세기 폭스 사의 임원들은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는 크게 네 가지.
첫째. 신세대 관객들이 100년 전에 있었던 일에 하등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과.
둘째. 타이타닉에 들어가는 엄청난 분량의 특수효과와 그로 인해 늘어날 어마어마한 제작비, 약 2억 달러에 이르는 거금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
셋째. 제임스 카메론이 이야기한 약 ‘세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 대한 부담과.
넷째. 당시 제임스 카메론이 가지고 있었던 ‘평판’ 그러니까 ‘SF액션물 전문 감독’이라는 이미지 상 그가 ‘금지된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위험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중에야 제임스 카메론의 극렬한 압박에 폭스 쪽에서 투자를 시작하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프로젝트가 올 스탑된 상황인 것이다.
"아닙니까?"
이어진의 말에 제임스 카메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생각보다 더 정보력이 좋군."
보아하니 할 말이 많은 표정. 도대체 어떻게 그와 폭스사 사람들밖에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말씀 드렸잖습니까. 소문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이어진은 가볍게 웃으며 테이블에 있는 물을 한 잔 마실 뿐이었다.
그러자 잠시 상대를 꿰뚫을 듯한 시선, 예리한 눈으로 이어진을 바라보던 제임스 카메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세상에 비밀이란 없지. 하지만 그게 내가 당신들에게 내 작품을 맡겨야만 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이들을 믿느니 차라리 폭스사 임원들을 설득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만약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올해 개봉하는 영화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타이타닉과 비슷하게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대거 흥행에 참패하게 된다면, 그때도 과연 폭스사 임원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
"이미 올해 1월, 1억 달러가 넘는 돈을 들인 ‘컷스로트 아일랜드’가 북미 흥행 1천만 달러로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그리고 1억 7천만 달러가 넘는 돈이 들어간 ‘워터월드’까지 소문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선 아무리 통이 큰 투자사라도 투자가 꺼려질 수밖에 없겠죠."
이어진의 말에 제임스 카메론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워터월드가 흥행에 성공한다면 오히려 설득이 더 쉬워지겠지."
"하하.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이미 아시잖습니까. 워터월드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말을 마친 이어진이 제임스 카메론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묵직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워터월드 그 작품은 흥행 참패를 면치 못할 겁니다. 아마 손익분기점도 넘지 못하겠죠. 그렇게 되면 폭스사 사람들도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이어진이 가벼운 미소를 입에 띄운 채 말했다.
"감독님은 이미 ‘어비스(The Abyss)’라는 영화를 실패한 적이 있으니까."
순간, 제임스 카메론의 얼굴이 청동처럼 굳었다.
해양을 배경으로 한, 당시로선 거금인 7,0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었으나 북미 5000만 달러. 전 세계 9천만 달러라는 애매한 성과를 거둔 영화.
영화 제작비와 비슷하게 들어간 영화의 마케팅 비용까지 생각하면 흥행 실패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온 영화 어비스. 그것은 제임스 카메론 자신 스스로 겪은 첫 번째 실패이자 그가 극복하고 싶었던 과거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본 이어진이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저희와 함께 하시죠. 저희라면 감독님이 원하시는 타이밍에 원하시는 지원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타이타닉 호의 최후 생존자, 시대의 증인들이 사라지기 전에 말입니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는 제임스 카메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실히 준비를 많이 했군."
"그만큼 당신을 잡고 싶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기하는 게 좋겠어."
말을 마친 제임스 카메론이 불현 자리에서 일어났다.
폭급한 성격이라는 세간의 평에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그러자 자연 분위기는 파투. 이어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이어진의 말에 제임스 카메론이 슬쩍 입을 열었다.
"확실히 자네의 말은 인상적이었어. 하지만 그것으로는 사람의 믿음을 살 수 없지."
믿음을 살 수 없다.
그 말인즉슨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이쯤 되면 백답이 무익. 아무리 유려한 말도 그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무려 2조 원, 아니 나중에 그가 제작할 영화들까지 생각하면 약 5조 원에 달하는 돈이 지금 이 순간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100만 달러."
나는 가볍게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난 제임스 카메론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100만 달러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아무래도 갑작스런 나의 말에 일순 의아한 모습. 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말을 이어나갔다.
"들으신 그대롭니다. 100만 달러. 그 돈으로 당신의 하루를 사겠습니다."
그러자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제임스 카메론, 그가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지금 돈으로 내 시간을 사겠다고? 이봐 어린 친구. 자네한테 돈이 얼마나 있는진 모르겠지만 시간이란 건 그렇게 함부로 살 수 있는 게…."
"1,000만 달러."
"뭐?"
"이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살 수 없는 게 있는 것 같다면 그건 돈이 부족해서겠죠."
"……하?"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제임스 카메론, 그의 시선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말을 맺었다.
"그러니 당신의 하루. 제가 사겠습니다. 그럼 당신의 그 생각, 제가 완전히 바꿔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