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운수 좋은 날 (4)
아니 그림을 못 그린다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김상교의 말에 이어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니 왜요? 왜 그림을 못 그린다는 거죠?"
그의 물음에 김상교가 머쩍은 미소를 띄우며 볼을 긁적였다.
"그게··· 빚이 조금 있습니다."
"빚이요?"
"네. 그동안 밀린 월세도 있고··· 화구들 산다고 외상을 한 것들도··· 거기다 저번에 어머니 아프실 때 변통한 돈들도 있고··· 후··· 그래서 다음 주부터 평화시장 쪽 공장으로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 그가 화방에서 돈을 빌리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
보아하니 그때 그동안 변통한 돈을 메우기 위해 그렇게 화상에게 매달렸었던 것 같다.
‘돈을 빌려 주기는커녕 모욕만 당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일견 이해가 안가는 일이기도 했다.
아니 도대체 빚이 얼마나 되기에 그림을 접는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빚이 얼마나 되는 데요?"
내가 묻자 김상교가 슬쩍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휴··· 그게 생각보다 좀 많아···."
"그래서 얼만데요?"
"그게 그러니까···."
자신의 치부 나 같은 어린 아이에게 말하는 게 부끄러운 듯,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우리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자 이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처, 천만 원 조금 넘어."
뭐?
천만 원?
아니 이천이나 삼천도 아니라 고작 천만 원?
하 나 진짜 고작 그것 때문에 화가가 그림을 접고 공장에서 일을 하겠다고 한 거야?
순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 했다.
"천만 원이요?"
"네··· 어머니 의료 보험이 안 되는 상태라 돈이 조금 많이 나왔었거든요··· 그래서···."
이어진의 물음에 김상교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하긴 이 당시 천만 원이면 준중형차 한 대 가격. 결코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돈도 신용도 인맥도 뭣도 없는 화가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 어쩔 수 없이 그림을 놓고 공장에서 일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겠지.
거참 2020년대 수십억 원대를 체납해 놓고도 배 째라고 들이대는 고액 체납자들이 보면 깜짝 놀라겠네.
하지만 그가 그림을 접고 공장으로 가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돌아가는 일의 분위기를 보니 그가 열 작품 남짓한 작품을 남기고 요절한 것 또한 그간 그림을 그리며 떨어진 체력과 공장에서의 혹사가 원인인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아저씨."
"알고 있어."
내가 이어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이어진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듯 눈을 찡긋 거렸다.
그리곤 김상교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과 어조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작가님."
"네, 네?"
"천 만원 정도의 금액은 저희가 충분히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이어진의 말에 김상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네? 정말요?"
오백 원짜리 동전만 하게 커진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어진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정도의 후원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애초에 그 정도의 능력도 없었으면 작가님을 후원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아······."
"그러니 중요한 건 작가님의 의사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잠시 말이 없던 김상교. 그의 얼굴에 수없이 많은 표정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아··· 그런데 그건 너무 죄송해서··· 이렇게까지 저를 좋게 봐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이지만··· 후··· 저 같은 거 재능도 없고··· 괜히 민폐만 끼치는 게 아닌지···."
그의 자신과 자존은 이미 바닥. 기회가 왔음에도 그는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어진이 슬쩍 웃어보였다.
"작가님."
"네···."
"앞으로 1년간 1억. 저희가 작가님에게 책정한 금액입니다."
순간, 김상교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네에?"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들바들 손을 떨기 시작했다.
"1··· 1억 원이요?"
"네. 1억 원입니다."
"아니 저 같은 거한테 그런 거금을···."
김상교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는 믿기 힘든 일일 것이다.
화상에 말에 따르면 한 달에 두 작품. 그것도 10만 원도 채 안 되는 작품을 파는 작가.
그 작가에게 1억 원이라는 거금을,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한 채 값을 후원하겠다는 거니까.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기가 아닌지 의심부터 했겠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가치. 대한민국 미술 경매상 단일작품 최고금액인 85억 5천만 원 경신한 그의 능력을.
이어진이 김상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히려 저희는 그 금액이 적지 않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작가님. 자신감을 가지시죠. 작가님 그림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어진이 ‘가치’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자 그 순간, 김상교의 얼굴이 멍하니 굳었다.
"정말······."
그리곤 곧바로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흐으."
타인의 인정(認定).
그동안 그림을 그려 오며 느낀 설움이 한순간 둑을 터지듯 터져 나온 것 같았다.
예민한 감수성을 보니 아무래도 천상 예술가네.
"···하아."
잠시 뒤, 감정을 추스린 김상교가 벌개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그럼 이제 저한테 1억 원을 주시는 겁니까? 제가 후원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아 물론 단서조항은 있습니다."
"어떤···?"
이어진이 슬쩍 나를 바라본 뒤, 천천히 시선을 돌려 대답했다.
"분기마다 한 작품씩 <귀화(鬼火)> 정도의 퀄리티로 작품을 완성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만약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후원하는 금액과 별개로 그 그림들은 전량 저희가 매수하겠습니다. 적정한 가치에 맞춰서 말이죠."
"아···."
"어쩌시겠습니까? 후원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김상교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의 입이 열렸다.
*
결국 그는 우리와 계약을 맺기로 했다.
‘하겠습니다.’
士爲知己者死(사위지기자사).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우리에 대한 호의와 1억 원이라는 구체적인 액수의 돈이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계약서를 꾸미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일단은 가계약을 하고 나중에 정식으로 서류를 꾸며 공증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계약금.
천만원.
우리가 계약금 조로 곧바로 천만 원을 꺼내자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돈을 들어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우리와 함께 하나하나 인사동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니며 빚을 갚기 시작했다.
설마 돈을 받자마자 바로 빚부터 갚으러 나갈 줄은 몰랐기에 약간은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는 그를 따라다녔다.
"아! 선생님. 저번에 빌린 화구 값 갚으러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일찍 갚았어야 했는데···."
"명수야. 저번에 빌렸던 돈··· 아니아니 더 빌리려는 게 아니고 갚으려고. 뭐? 무슨 이상한 짓 한 거 아니냐고? 에이 아니야. 그러니까 빨리 받아."
"사장님. 전 분명 돈 갚았습니다? 그러니까 맡겨 놨던 그림은 제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그··· 병원비 보내 놨어요. 그러니까 그거 찾으셔서 병원비 내시고 맛있는 것도 사 드세요. 네? 돈이 어디서 났냐고요? 하하··· 그게···."
오늘 하루 그를 본 것 중에 제일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물어보니 그동안 빚 때문에 밥을 먹어도 얹힌 기분이었는데 그 돈을 갚게 되니 너무나 기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허허 이 양반 고액체납자는 못 될 양반이네.
하긴 전생에 나도 수중에 몇 만 원이 없어 애를 태워 봤던 몸이기에 그의 마음을 잘 알았다. 사실 없이 사는 사람들이 돈에 더 민감한 법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김상교가 사람들에게 빌린 돈을 다 갚은 뒤, 우리는 김상교의 후원자로서 그를 케어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한국대학교 병원]
병원부터.
애초에 그가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다가 아까 그가 하던 기침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 여기는···."
"진정하세요. 여긴 병원입니다."
"저··· 건강한데··· 왜 여길? 아 혹시 두 분 중에 아프신 분이 있으신 건가요?"
아니 이 양반?
우리가 김상교를 병원에 데려오자 그가 왠지 꺼리는 듯한 표정으로 병원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저희 말고 작가님이요. 몸 안 좋으시잖아요."
"아, 아니에요. 저 몸 건강합니다. 군대에서도 건강 빼면 시체라고···"
퍽이나.
걸치고 있는 전투복이 헐렁해 보일 정도로 앙상한 팔다리.
며칠은 못 먹은 듯 비쩍 곯아 있는 얼굴.
누가 봐도 환자다.
그런데 병원 가기를 꺼려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약간 이상했다.
분명 그 정도의 기침을 하는 걸 보면 그도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텐데···.
아 혹시?
"설마··· 의료보험 미납됐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러자 그가 주인에게 걸린 도둑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그게···."
그제서야 사태를 알아차린 이어진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저희가 걱정할 테니 작가님. 그냥 들어가시죠."
어이진의 강경한 말에 결국 김상교가 백기를 들었다.
"네···."
그리고 잠시 뒤.
만성 위염과 장기적인 영양부족, 그리고 초기 폐렴 증세와 비타민B 부족 증세가 있다는 의사 소견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하신 거예요."
설마 몸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지 이어진이 약간 나무라는 톤으로 김상교에게 말하자 김상교가 바짝 쪼그라든 모습으로 변명을 내뱉었다.
"그게··· 있으면 먹고 없으면 그냥 굶는 게··· 나중 가니까 배고픈 것도 적응이 되더라고요."
이 양반아 그건 적응이 아니라 몸이 포기한 거지.
거참 아니 20세기에 영양실조라니···.
아무튼 오늘 우리를 만나지 못했다면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머지않은 시기 요절했을 것 같은 건강상태였다.
김상교 또한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나자 약간 충격을 받았는지 의사가 하라는 데로 주사를 맞고 받은 약을 꼬옥 움켜쥐는 모습이었다.
하긴 그 또한 사람. 그동안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치여 몸을 혹사시켜오긴 했지만 살고 싶다는 욕망은 어찌 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 그가 지금 살고 있는 집.
그 개미굴 같은 집에 계속 산다면 아무리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도 점점 몸은 더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우리는 바로 다음으로 부동산을 찾았다.
"특별히 인사동에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네? 아, 아무래도 그게··· 애초에 여기 화구상들도 많고 또 화랑들도 많아서 그림을 보기에도 좋고··· 근처에 화가들도 많이 살고···."
"그러면 근처에 있는 집을 구해야겠군요."
"네? 집이라고요?"
"···언제까지 그곳에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작가님 몸은 이제 작가님 개인의 것이 아니에요."
그리곤 근처에서 가장 채광이 좋은 곳의 집을 전세로 계약, 공실로 남아 있던 곳으로 전격 이사를 한 뒤, 필요한 가구며 전자기기들까지 일괄 결제해서 배송시켰다.
"자. 작가님. 이제부터 이곳에서 작업하시면 됩니다. 근방에서 제일 채광이 좋은 곳으로 구했으니 마음에 드실 겁니다."
"허··· 이건···."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건가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아, 아닙니다. 마음에 들다마다요. 그런데··· 여긴 너무 비싼 것 같아서···"
"아뇨 딱히. 둘러보니 다른 지역들보다 이쪽 지역 매물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더군요. 그래서 전세가 3천만 원에 깔끔하게 계약 끝냈습니다."
"···3천만 원···."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마냥 고삐를 늦추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열심히 그려 주십시오. 1분기마다 <귀화(鬼火)> 정도의 퀄리티 작품 한 점입니다. 정해진 기간마다 저희가 원하는 퀄리티의 작품이 나오지 않으면··· 1회 경고 후 곧바로 30% 후원금 삭감을 할 테니까 긴장 늦추시면 안 될 겁니다."
우리와 김상교. 아니 정확하게 나와 김상교가 맺은 후원계약은 종래의 화랑과 작가가 맺는, 작가에게 소정의 후원금을 주거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개최할 기회를 제공, 작품 판매의 수수료를 받는 그런 식의 느슨한 후원 체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2000년도 이후의 후원 방식.
아직 생산되지 않은 작품을 미리 사거나 작품의 제작비를 지원, 작업실을 무료로 제공하는 방식의 후원방식에 추가적으로 눈에 보이는 리미트를 거는, 스파르타식에 가까웠다.
"···알겠습니다."
이정도면 그 또한 또다시 그 골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테니 작품 활동에 전력을 기울이겠지.
물론 처음 이런 지원책을 생각했을 때 걱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과연 이 사람이 바뀐 환경 하에서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 같은 열악한 환경이 아닌, 작품에 전력할 수 있을 만한 풍족한 환경에서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처음엔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가능하다.
과거 김상교의 최고 작품은 바로 <귀화(鬼火)>. 내가 5만 원을 주고 산, 미래에는 85억 5천만 원이라는, 종래의 우리나라 최고가 미술품의 이름을 갈아치운 작품이다.
그러니 그의 작가로서의 역량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일반인들이야 고흐나 박수근 같은, 평생 가난하게 살고 어마어마한 명작들을 남긴 사람들의 일생을 보고 예술가는 가난하고 열악해야만 명작이 나온다는 환상을 가지곤 했지만.
부유한 은행장의 5남으로 태어나 평생 부족함 없이 살았던 에드가 드가.
역사상 어느 미술가보다 부유하고 유명했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감히 계산조차 할 수 없다는 파블로 피카소.
추정재산 1조 889억 원의 데미안허스트.
그의 반례는 얼마든지 많다.
가난이 곧 명작의 필수요소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를 살리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한 사람을 살리는 길이고 또 한 사람의 예술가의 작품을 살리는 길. 그리고 내가 최대한의 이익을 보는 길이기 때문이다.
‘김상교한테 필요한 건 열악한 삶이 아니라 작품 활동에 필요한 건강과 집중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니까.’
게다가.
"정말 동의하신 겁니다?"
"물론입니다. 오늘부터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열심히 그리겠습니다."
당사자도 이렇게 의욕적인 것 같고.
아무튼 이대로라면 그의 커리어를 생각보다 더 빨리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분기에 한 작품씩. 아니면 그 이상 작품 활동을 하며 인지도를 올리면 과거보다 훨씬 더 빠른 시간 안에 그의 몸값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85억 5천만 원이 아니라 그 보다 더한 가격이 나올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 공과 돈은 모두 나에게 오게 될 것이다.
다이아몬드 알을 낳는 거위가 내 손안에 들어왔으니까.
그리고 기왕이면···
‘거위는 여러 마리가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