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거부할 수 없는 제안 (4)
아무리 거대한 짐승, 강력한 짐승도 피를 흘리기 시작한 이상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그것이 야생, 정치의 참 모습이다.
그리고 내가 본 이후의 일 또한 그러했다.
찌라시와 소소한 기사들도 예열된 우리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판.
그 판에 한X일보, 전 부터 김영삼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어조를 유지하던 간 큰 언론사가 선전포고도 없이 포탄을 발사하면서, 상어들이 피냄새를 맡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도 넘은 ‘측근정치’ 소통 부재의 대통령이 과연 문민의 대통령인가? - 한X일보. 1994. 09. 15]
김영삼 대통령의 도 넘은 측근 정치에 대한 비판이 경제, 정치계 안팎에서 쏟아지고 있다. 올해로 취임 2년차를 맞고 있는 김영삼 대통령은 전 정부 시절의 요정정치, 밀실정치를 비판하며 소통을 토대로 한 정치 기조를 만들어 나가겠다 선언했다. 하지만 실제 2년차를 맞고 있는 그의 정치는 그가 과거에 했던 선언이 무색하게도 측근정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거참. 아니 무슨 깡으로···.
아무리 군사정권이 끝나고 문민정권이 들어섰다곤 하지만 그래도 눈치는 좀 봐야 할 텐데?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이 기사가 나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현 정권의 정책기조를 비판하는 기사들과 앞전 정책들의 패착들을 비판하는 기사들이 연일 뉴스를 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감정적인 대북 정책 득일까? 아니면 실일까? - 조X일보. 1994. 09. 16]
지난 8월 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된 미-북 양국 간에 핵관련 3단계 고위급회담 1차 회의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대북 정책 전문가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핵을 가진 자와는 손을 잡지 않겠다”라는 논리로 북한과의 대화를 외면한 김영삼 정부의 이런 감정적인 태도를 두고 일각에선 ‘청소년 정치’, ‘구세대적 정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칫하면 북-미 양자간의 합의에 한국 정부가 참여하지 못한 채 비용만 부담하는 ‘들러리’가 될 수 있다는···
[김영삼 정부의 2년, 대형사고들로 점철된 ‘사고 공화국?’- 중X일보. 1994. 09. 17]
취임 2년차를 맞고 있는 김영삼 정부의 안전 의식에 대한 시민 사회의 비판이 점점 커지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 이후 벌어진 대형 사고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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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김영삼의 약점을 은근슬쩍 공격하면서 그의 정책을 비판, 김영삼의 입지를 흔드는 소문, 그리고 기사들이었다.
물론 평소였다면 이 정도의 소문, 기사들이야 정부 측에서 사람들에 의해 빠르게 수습되었을 것이었겠지만, 문제는 지금이 그 ‘평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무서운 노인네 하나가 소문을 주도하고 있거든.’
[잇따른 증언, 하나회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강제 예편 당했다 ‘억울함 호소’ - 충X일보 1994. 09. 20]
[전국 실향민 협의회 ‘김영삼의 강경대응은 한반도 평화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경X일보. 1994. 09. 19]
‘아니 실향민 협의회는 도대체 무슨 조직이야?’
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사람들도 연일 기사가 계속되자 하나둘, 기사의 의견에 동조 김영삼의 지지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사생아? 아니 맨날 전두환 노태우 욕하던 사람이 진짜로? 허허 이거 참···.”
“뭐 모르는 일이긴 한데··· 아무래도 사실 아닐까? 왜 측근들이 양육비도 줬다잖아.”
“거 참, 사람 속 모르는 거라더니 그렇게 깨끗해 보이던 양반이 쯧.”
그러자 지금껏 농축되어 왔던, 김영삼의 권력에 억눌려 왔던 불만세력들이 대가리를 치밀기 시작했다.
***
쾅-
커다란 손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러자 찌르르- 테이블이 떨리고. 그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검게 물들었다.
청와대.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생물의 심장부. 그리고 그 안에서도 가장 내밀한, 아주 위험한 일들을 처리하는 곳.
[청와대 비서실]
그 공간의 주인이 현재 분노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똑바로들 못하겠습니까!”
청와대 비서실의 주인, 김용관이 사나운 일갈을 내지르자 그 앞에 있는 사람들, 청와대 비서실 인원들의 고개를 푹- 아래로 꺾였다.
다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청와대, 그리고 그중에서도 김영삼 대통령의 리더쉽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와 소문들이 연일 커지고 있는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 것이었다.
그때.
“행정수석.”
한참동안 분노를 쏟아내던 김용관의 입에서 한 사람의 직급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1실장 8수석 46비서관 체제로 이뤄진 비서실 인원들 중, 치안과 국민행정을 맞고 있는 행정수석, 차현성이 떨리는 눈으로 김용관을 바라보았다.
“네, 넷. 실장님.”
방금 전 있었던 김용관의 일갈에 살짝 긴장한 낯이었다.
물론 미래, 그러니까 2020년 즈음의 비서실장과 수석의 관계였다면 이렇게 저자세를 보일 필요가 없었겠지만, 현재는 1994년, 아직 중앙집권적 권력구조와 수직적 조직문화가 일반적인 시기였다.
그런 만큼 자신의 목줄을 잡고 있는 비서실장,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현정부의 안주인의 말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사태, 어떻게 수습하고 있습니까.”
김용관의 물음에 침을 꿀꺽 삼킨 차현성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이 심각성인 만큼 지금의 대답에 따라 앞으로 그의 앞날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네. 그게··· 일단 개개의 뉴스들 위주로 수습하고 있습니다. 현재 후속 기사들을 올 스탑 시켜 놨고, 앞으로 나올 예정이었던 뉴스들도 마찬가지로 정지 시켜 놨습니다. 그리고 또··· 비서실 인원들을 총 동원해서 신문사 측에 경거망동 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으니 조만간 소문들 또한 잦아들 겁니다.”
차현성이 식은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는 김용관, 그가 차현철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미 나간 기사들과 소문들은?”
후우, 김용관의 반응에 차현성이 보이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가 택한 방법이 김용관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좋아 그렇다면···.’
차현성이 자신감을 가지고 말을 이어 나갔다.
“아 네. 그러니까. 그 다음으로는 일단 신문사들을 통해 정정기사를 내고···.”
이번 사태를 잘만 넘기면 자신 또한 더 위를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 그에게 허락된 것은 황금빛 미래가 아니었다.
“행정수석.”
돌아보자 그곳에선 비서실장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넷. 실장님.”
갑자기 바뀐 김용관의 눈빛에 차현성이 긴장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김용관이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정신 있는 거야?”
“······네?”
차현성의 말에 김 실장이 쿵- 테이블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생각을 좀 하란 말이야. 생각을. 아니 누군가 우리 집에 물을 뿌리고 있는데 지금 지붕 고치고 수로 파고 끝내겠다는 거야?”
“아니 그게···.”
“빌어먹을! 껍데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우리한테 물을 뿌리고 있는 놈을 잡아야 할 것 아니야! 잡아서 그 껍데기를 벗겨 버려야. 그래서 본때를 보여 줘야 다른 놈들이 잠잠해지지!”
순간, 천천히 몸을 펴던 사람들이 다시 바짝 몸을 웅크렸다.
그제서야 김용관이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던 것이 이해가 갔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차현성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상황. 그에게 다른 기회는 없었다.
“안보수석”
차현성의 일그러진 얼굴, 그 얼굴을 대신한 안보수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 실장님.”
“그래. 찾으라던 꼬리는 잡았어?”
김용관의 말에 안보수석이 머리를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잠시 표정을 굳힌 김용관, 그가 감정을 조절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윤곽도 안 나오는 거야? 아니 분명 정보가 샌 구멍이 있을 테니 바짝 조이면 뭐라도 걸려야 하는 것 아니야?”
“그게··· 저희 선에 걸린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안보수석이 송구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선이 너무 많습니다. 사회, 경제, 문화 어느 쪽 선인지 특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 죄다 걸려들어서··· 아무래도 하나하나 조사를 하고 있긴 하지만 단시간 내에는 힘들 것 같습니다.”
김용관이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 며칠 째 비서실의 정보는 물론 안기부 쪽에 협조를 얻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범인의 꼬리를 잡지 못하다니.
어느 놈인지 모르지만 아주 독한 놈에게 걸렸다고 그는 생각했다.
설마 북한 놈들인가?
잠시 생각하던 김용관이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럴 리 없었다. 대중에게야 북한이 무시무시한 존재,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존재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현재의 북한에게 그럴 역량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어떻게 해서든 현재의 사태를 완벽히 파악, 정리한 뒤 자신의 주군인 김영삼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 지금 이 야료를 부리는 게 누군지 내일 아침 보고 전까지 찾아내지 못하면 나도 당신들도 다 같이 옷 벗는 거야. 다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말을 마친 김용관이 비서실 인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비서실 인원들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다들 나가 봐. 나가서 뭐라도 빨리 찾아오란 말이야!”
그렇게 비서실 인원들이 분분히 떠나간 뒤, 홀로 남은 김용관,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
갑자기 흘러나오기 시작한 청와대의 내밀한 비밀, 그동안 자신을 비롯한 측근들만이 알고 있던 사실들, 그 사실들이 어느 순간 찌라시를 타고 신문을 타고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에 그는 요즘 들어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잘 막고 있긴 하지만.
이러다가 혹시나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물론 자신의 주군. 김영삼까지 잘못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이 사태를 수습해야만 했다.
문제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느냐는 거지.’
그의 한숨이 깊어졌다.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최선만으로는 부족했다.
최선을 다 했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속만 쓰리구만.’
그런데 그가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있던 그때.
“저··· 실장님.”
슬그머니 문이 열리며 비서실 직원들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비서실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기에 짜증이 확 솟구쳤다.
하지만 그래서는 자신의 평판만 깎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가까스로 화를 참아 내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란 말 잊었습니까?”
김용관의 말에서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린 직원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 죄송합니다. 그런데 급한 연락이라···.”
순간, 김용관의 표정이 변했다.
급한 연락.
이 시국에 급한 연락이라면 사실 뻔했다.
“···설마 각하께서?”
김용관이 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도 탈탈 털리고 나온 판국이었기에 절로 손발이 찌르르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닙니다.”
아니라고? 김용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리고 직원에 입에서 나온 이름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의 이름이었다.
“현대 정영주 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