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통과의례 (2)
어머니가 내 손을 꽈악 움켜잡았다.
약간의 떨림과 약간의 열기.
손끝으로 어머니의 동요가 여실히 느껴졌다.
‘···이런.’
나는 낭패한 기분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불편하기 그지없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몇 달 전, 나의 거취를 두고 딜을 했을 때 이후 처음 마주하는 두 사람.
아들이자 남편을 잃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엇갈리고, 보이지 않는 칼날을 마주한 듯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
"······."
한없이 어색하고 긴장된 분위기.
그렇게 보이지 않는 벽이 그 실체를 드러낼 즈음, 작은 이변이 나타났다.
혹시라도 손을 놓으면 뺏기기라도 할까 꽈악- 내 손을 잡고 있던 어머니가 슬며시 내 손을 놓더니, 조심스레 김귀란을 향해 고개를 숙인 것이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자 그 순간, 김귀란이 멈칫- 묵묵한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그리고 나선 또다시 정적. 하지만 좀 전과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뭐지?’
나는 생경한 눈빛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분명 전에 이 둘이 마주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둘 사이에 흐르던 분위기는 아주 날카롭고, 무거웠으며, 또 차가웠다.
그런데 어째 지금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은데?’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둘 사이에 쌓여있던 먼지, 지난 세월 쌓이고 쌓인 미움의 때가 조금은 벗겨진 것 같았다.
‘아니 도대체 언제···?’
슬쩍 김귀란의 뒤쪽을 바라보자 김명석과 그의 가족들이 불타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김귀란이 이곳에 온 이유를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나 또한 그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기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이거 단단히 미움 받겠는데?’
그때였다.
한동안 서로를 마주하던 두 사람. 어머니가 뭐라 말을 꺼낼 듯 슬쩍 입술을 움직이던 그 순간, 김귀란의 입이 열렸다.
"저······."
"···그동안 고생 많았다."
짙은 회한이 담겨 있는 목소리, 말하는 자의 씁쓸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순간, 어머니가 움찍- 몸을 떨었다.
뭐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방금 김귀란이 어머니에게 고생 많았다는 말을 한 거야?
설마 어머니를 비꼰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방금 전 김귀란의 말은 분명 나직한 목소리. 그래 차가운 기색이 사라진 목소리였다.
그렇다는 말은? 설마 김귀란이 어머니를 인정한 건가?
‘그럴 리가.’
믿을 수 없는 결론에 다다른 나는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
하지만 나는 내가 내린 결론의 진실을 알 수 없었다.
김귀란, 그녀가 이미 몸을 돌려 김명석의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일 저녁 식사를 할 테니 늦지 말고 오너라."
남은 것은 그녀의 목소리. 나를 향한 한마디의 말 뿐이었다.
"졸업 축하한다."
나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아무래도 뭔가 조금 변한 것 같다.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김귀란 그녀에게서도.
***
졸업식 이후 나는 무척이나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일단 주기적으로 인사동에 있는 김상교에게 연락, 혹은 직접 방문을 해서 그가 건강은 잘 챙기고 있는지, 또 그러면서도 그림은 잘 그리고 있는 지 체크. 부족한 것이 있으면 케어했다.
"김상교 씨! 김상교 씨! 문 열어 보세요."
"으악! 네, 넷! 하하 오··· 오셨군요."
지난 몇 년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살아온 그였기에 잠시라고 긴장을 늦추면 또 언제 과거의 라이프 스타일로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네.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이거 라면 냄새 아닌가요?"
"아 그게···."
"돈은 제때 넣어드리고 있는 것 같은데 라면이라니요. 혹시 또 외상을···?"
"아,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니고요! 그··· 그냥 그림 그리다 보니 때를 놓쳐서···."
그나저나 이 사람 내가 투자자라는 걸 알자마자 말이 바뀌었네.
아무튼 그를 최대한 오래 살려 최대한 많은 작품을 최대한 높은 가격으로 파는 게 내 목표인 만큼, 약간을 강압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의 건강을 챙겼다.
"후··· 오늘부터 라면은 무조건 금집니다. 삼시세끼 도시락 배달 시켜 놓을 테니까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아셨죠?"
"아··· 네··· 그런데 그래도 가끔은 라면을···."
"김상교 씨."
"아, 안 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사람 참, 안심할 수가 없네. 나오는 그림을 보니 작품은 걱정 안 되지만.
그렇게 김상교를 케어한 뒤엔 서초동에 있는 넥스트로 출근,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그들의 일을 도왔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아 김 대표님. 네. 혹시 무슨 일 있는 건가요? 개발팀 분위기가 어수선한데요?"
"그게··· 이번에 문제가 좀 생겨서···."
"네? 아니 뭐 때문에?"
내가 전문 인력인 그들의 일에 감 놔라 배추 놔라 할 것은 아니었지만 오롯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들.
예를 들어 현재엔 알 수 없는 오류나 버그들을 슬쩍슬쩍 짚어주는 일이나 그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사항들을 짚어 주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니까··· 게임 사용료를 어떻게 책정할지 문제 때문에 개발팀이랑 기획팀 의견이 완전히 갈렸습니다. 개발팀은 한 달에 정해진 요금만 사용료를 받자고 하고 있고 기획팀은 분당 사용료로 받아야 한다고···."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그게··· 사실 저는 정액제로 게임비를 책정하는 게 맞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분당 사용료로 게임이 서비스 되면 전화비에 추가되는 거라 가격부담이 상당할 거라서··· 후, 그런데 들어보니 단군의 땅 같은 경우에 분당 사용료로 받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회사 수익을 생각하면 또···."
뭐 실패 끝에 배우는 것도 있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렇다고 정말 사소하고 쓸데없는 삽질까지 계속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표님."
"네."
"크게 보셔야 합니다. 지금은 작은 파이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 저 파이를 많이 먹을까 고민할 때가 아니라 어떻게 저 파이를 키울까 고민해야 할 때예요. 그러니 지금은··· 대표님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택하시는 게 맞습니다. 돈이야 앞으로 벌 기회가 있지만 시장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덕분에 넥스트의 게임 개발은 나름 순항 중, 얼마 뒤면 머드게임 ‘쥬라기 공원’이 출격할 예정이었다.
"후··· 알겠습니다. 듣고 보니 제가 너무 우유부단했네요. 감사합니다. 이사님."
뭐 아직 미숙한 부분들이 많긴 했지만 그건 차츰차츰 나아질 것이다.
‘어린 내가 말하긴 좀 뭐하긴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들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들.
판교에 있는 땅 5만 평과 각지에 흩어져 있는 땅 30만 6천 평의 체섯?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것을 빼 놓지 않았다.
땅이라는 게 그렇게 갑자기 오르락내리락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지만··· 혹시 아는가. 그 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에 의해 시세가 급변할지?
만약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시세의 급변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그리고 그중에서도 급락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추가적인 매입을 통해 수익의 확대를 노려 볼 생각이었다.
‘땅은 불패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먼저 움직였던 재산.
주식.
내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들의 시세 추이에 따라 적절히 거래하며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삼성이랑 현대차 주식은 꾸준히 올라가고 있고··· 어? 포항제철이 왜 이렇게 올랐어? 아저씨 이거 뭐에요?"
"기억 안나? 2월 말에 胎뗌?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정됐잖아. 그것 때문에 올랐지 뭐."
"아니 제2이옮戮? 사汰渼? 선경이 가져간 거 아니었어요? 재작년에?"
"그거 원래부터 말이 많았던 사업이었어. 아니 말마따나 노태우 사돈이 그? 회장으? 獵? ??? 떡하니 선정해 놓고 제대로 될 거라 생각한 게 도둑놈 심보지. 김영삼이 대표최고위원으로 있을 때부터 칼을 갈 던 거니까 당연한 수순 아니겠어?"
"아···."
하긴 정경유착으로 이뤄진 사업자 선정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설마 정권이 바뀌는 것과는 별개로 사업이 지속될 거라 생각한 건가?’
아무튼 그 덕분에 제법 짭짤한 돈을 벌 수 있었다.
처음 살 때 2만 5천 원 정도였던 포항 제철의 주식이 사업자 선정 이후 3만 원 선까지 올라가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21,739주가량의 주식가치가 6억 5천 2백만 원 정도로 껑충 뛰어 약 2억 가량의 시세 차익을 거둔 것이다.
"아. 아깝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사 둘 걸 그랬어요."
"에이, 어차피 발표가 나왔을 땐 이미 가격이 오를 대로 오른 후여서 얼마 재미 못 봤을 거야. 그래도 2억 정도 벌었으니 됐잖아 안 그래?"
뭐 그건 그랬다.
나로선 가만히 앉아서 아파트 한 채, 아니 잘하면 두 채 가격을 번 셈이니까.
"그건 그렇죠. 좋아요. 이미 흘러간 일이니 그건 넘어가기로 하고··· 그 저번에 말한 한국비료랑 대한중석 공개 입찰 언제예요?"
"그거? 한국비료는 7월 대한중석은 11월일 것 같은데 왜?"
"아니 얼마까지 올라갈지 궁금해서요."
"글쎄? 지금 한국비료가 10만 원 선, 중석이 3만 8천 선이니까 아마 11만, 4만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도 알짜 기업들이니까."
"그렇다는 말은?"
"그래.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알아서 돈이 들어온다는 말이지."
부자가 되기 위해선 나의 자본에게 일을 하게 하라.
그보다 더 맞는 말을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좋네요."
"그래 좋은 일이지. 그나저나 오늘 장 종료 때까지 있다 갈 거야?"
"아뇨. 오늘은 이만 집에 가 볼려고요."
"아. 맞다 요즘 너 바쁘지?"
이어진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집에서도 나의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엔 김귀란이 뽑은 정예 교사들. 한국대학교 출신의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도덕 과외 교사들에게 번갈아가며 수업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오늘은 고전시가 중 고대가요부터 향가, 고려가요 부분을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련님 그럼 오늘은 possive voice의 활용에 대해서···."
"오늘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
중학교 3학년까지의 과정을 불과 몇 달 만에 주입 받는 것이니 만큼 제법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뎠다.
지금 이 순간의 힘겨움이 나중에 천금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귀한 뒤로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어휴··· 이해는커녕 외우는 것도 힘들었겠지.’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과거에 비해 확실히 좋아진 기억력,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어진 사고력.
아무리 봐도 이건 결코 평범한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싱글 코어 컴퓨터를 쿼드코어로 업그레이드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회귀 때문인가···.’
하지만 나는 그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따지자면 즐겁고 반가웠다.
내가 변화한다는 것. 그것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곧 내가 성공을 향해 한발 더 빨리 발을 내딛을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고대가요 같은 경우 공무도하가, 황조가, 구지가, 해가, 정읍사 등의···."
"영어의 수동태 같은 경우 현재, 과거, 미래로 나눠지고 현재의 경우 be (not) + pp···."
"피타고라스 정리는 직각삼각형의 세 변의 길이 사이에 a2 + b2 = c2 인 관계가 성립···."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4월.
드디어 검정고시 시즌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