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274화 미래를 선도하는 자 (1)
판텍.
1991년 IT열풍을 타고 각종 전자제품을 만드는 벤처기업으로 출발한 회사.
한때 휴대폰 제조업 시장에서 삼성 LG등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세계 5위의 벤처기업 신화로 불렸었던 기업이었으나, 큐리텔, SK텔레텍을 인수 후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경쟁력 상실, 결국 단돈 천만 원에 매각된 회사.
그것이 판텍에 대한 내 기억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판텍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출기업 판텍! 올해 수출 5억 달러 달성! IMF시기 뛰어난 수출 실적 거둬 ? 매X경제. 1998. 12. 20]
[매출 대비 R&D 비율 1위 판텍, 대한민국 평균의 두 배인 20% 이상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 한성일보. 1999. 01. 12]
[저돌적인 도전! 김상현 판텍 대표이사 ‘2000년도까지 수출 10억 달러 도달하겠다’ 선언! ? 한X경제. 1999. 02. 12]
그동안 끊임없이 오라클의 케어, 나의 케어를 받은 덕분이었다.
‘사장님. 디자인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그 빵이 맛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선 외관 또한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기술력과 디자인의 조화 그것이 필요합니다.’
‘……후우, 100만 원짜리 전화기라니 지금은 시기상좁니다. 틈? 지금 공무원 한 달 월급이 얼만데… 그게 얼마나 팔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가격조정을 좀 더 해야 해요. 삼성 정도의 덩치라면 모를까 판텍이 이 가격에 팔면 망해요.’
‘…큐리텔이 싼 값에 나왔다고요? 언감생심 거들떠 보지도 마십시오. 일단은 자체적인 R&D가 답입니다. 물론 모자란 기술 정도야 사 올 수 있겠지만 앞으로 한동안 M&A는 절대 금물입니다. 아니 ’걸면 걸리는 걸리버‘라니 그게 도대체 언제 적 멘틉니까!’
……꽤나 힘들긴 했지만.
아무튼 그동안의 케어의 결과 판텍은 제법 괜찮은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젠 판텍 하면 우리나라의 산재한 휴대폰 제조 업체들 중에서도 수위권에 드는 실력과 인지도를 가진 회사로 여겨질 정도가 된 것이다.
‘판텍이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기업들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성장이지, 다른 회사들은 이제 막 중소기업의 티를 벗을랑 말랑 하고 있는 게 일반적이니까.’
하지만 오늘, 오늘 방문한 판텍은 왠지 모르게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평소의 판텍이 그냥 반가운 옆집에 놀러가는 느낌이라면 오늘의 판텍은 첫사랑의 집에 놀러가는 느낌?
뭔가 막 설레면서도 두근두근한 그런 느낌을 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환영합니다. 회장님.”
내가 판텍을 인수했으니까.
나는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남자, 나를 향해 반가운 웃음을 보이며 손을 내미는 남자, 판텍의 사장 김상현을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사장님.”
“아이고 아닙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이젠 엄연히 제 보스신걸요.”
내가 인사를 건네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내 인사를 받는다.
사실 처음부터 판텍을 인수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처음 판텍에 투자를 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판텍은 작은 회사, 직원이라고 해 봐야 얼마 되지 않는 회사에 불과했다.
때문에 그동안은 단순히 투자를 하고 적당히 케어를 하는 선에서 기업들에 대한 투자에 선을 그었다.
최대한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려 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번 일을 거치면서 제법 욕심이 생겼다.
재계서열 3위.
확고하게 자리 잡은 초고속인터넷망.
한성전자와 대우전자라는 두 개의 기둥.
더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타이밍이 도래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본격적인 사업?’
‘네. 휴대용 통신기기. 휴대전화 시장, 우린 그 시장을 먹어치울 겁니다.’
그 미래는 꽤나 달콤할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솔직히 한성전자와 대우전자가 있긴 하지만 통신기기 쪽이 아니라 가전 산업 쪽으로는 영향력이….’
‘판텍을 인수합니다.’
‘응? 판텍을?’
‘네. 판텍을 비롯한 통신기기업체를 인수하고 판을 키웁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전자 산업 일체를 키웁니다. 방향이야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 제법 빠른 시간 안에 나의 영향력 아래 있던 회사들, 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추진, 곧 제법 많은 회사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판텍 3천억 원에 인수 성공했습니다.’
‘한영디지털, 1천억 원에 30% 지분 점유 끝냈습니다.’
‘대한텔레콤, 인수단 출발했습니다. 오늘 안에 결착이 날 겁니다!’
뭐 그들로서도 재계서열 3위권의 대기업이라는 우산이 매력적으로 보였을 테니까.
‘잡음은 없게 확실하게 처리했죠?’
‘물론입니다. 오히려 더 좋아하던걸요?’
‘더 좋아한다고요?’
‘네. 아무래도 저희 회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 보니….’
그때.
“자 그럼 회장님 이쪽으로 오시죠. 모시겠습니다.”
김상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판텍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빳빳하게 잘 다린 옷을 입은 채 기대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의 눈을 보니 그들이 가진 기대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들 또한 알고 있겠지.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미래가 어떤 식으로 변화해 갈지. 분명 명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겠지.
‘그들의 예상하는 것보다 더 큰 변화가 있다는 건 알지 못하겠지만.’
좋아 그렇다면.
“앞장서시죠.”
나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판텍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미래를 변화 시킨다.
그리고 그 미래를 잡는다.
이곳에서.
*
판텍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곧바로 판텍의 생산 시설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그러자 곧 놀라운 광경, 어마어마한 광경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생산공정, 판텍의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는 생산시설의 모습이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풍경, 그것은 예전 텔레비전 뉴스 속에 나오던 광경.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기계들과 하얀 방진복을 입은 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생산된 제품을 테스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이게…….”
“네. 이번에 신설한 생산 시설입니다. 한 달 1백만 대 생산을 목표로 만들었습니다.”
나의 질문에 김상현,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과거 조그마한 규모였을 때의 판텍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 모습이 약간 생경했다.
그나저나 1백만 대라, 그 정도라면 이 당시 국내에선 손꼽히는 정도의 생산량이다.
뭐 나중에야 해외 진출을 통해 대규모의 생산시설을 갖추는 회사들이 많아지지만 이 당시 휴대전화란 그 정도의 보급력을 가지는 기기가 아니었으니까.
“시설은 충분합니까?”
“현재로서는 충분합니다.”
“직원들 복지는요?”
“현재 3교대 근무를 통해 생산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일단 시간 외 수당을 충분히 지급하고 있으며 그 외 복지 정책들도 진행 중입니다.”
“직원들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제법 긴 길이니까요.”
“알겠습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잠시, 짧지만 강렬한 광경을 목격한 나는 판텍 김상현 사장의 안내에 따라 회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공정시설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마련된 사무실, 그곳에서 이번 사업의 핵심, 이번 전쟁의 첨병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회장님.”
판텍의 신제품.
Oracle-1.
그동안 쌓아올린 판텍, 그리고 오라클의 주요 계열사들의 기술과 나의 아이디어가 결합된 제품이었다.
“이게 그 제품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판텍의 기술력과 회장님의 아이디어가 가미된 작품입니다.”
나는 눈을 돌려 제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법 세련된 모습의 휴대폰, 과거 모X로라 사의 히트 상품인 ‘레이저’ 모델과 흡사한 디자인을 가진 폴더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디자인은….”
“예전에 회장님이 주신 아이디어에 산하 디자이너들의 솜씨가 가미된 작품입니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제법 괜찮군요.”
“하하, 원래 디자인이 원체 좋아서요. 산하 디자이너들이 말하길 거의 손댈 것이 없는 디자인이라고 하더군요.”
하긴 그렇겠지.
그 제품의 디자인만으로 과거 위기에 빠진 모X로라사가 기사회생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잠시 고개를 끄덕인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판텍의 신제품, 오라클-1을 손에 들었다.
그러자 곧 묵직하면서도 서늘한 감각, 메탈 특유의 감촉이 손에 깃들었다.
“제법 묵직하군요.”
“일단 기본적으로 메탈이라서 말입니다.”
“무게라는 요소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일단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기능들이 많았으니까요.”
김상현, 그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기능이 많다라….
제법 자신하는 모습에 나는 슬쩍 입을 열었다.
“어떤 기능이 있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은 MP3기능을 탑재했습니다.”
“MP3기술이라면… 디지털캐스닉의 기술입니까?”
“네. 협업했습니다. 아무래도 이쪽 분야는 디지털캐스닉의 기술이 독보적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디지털 캐스닉, 과거 내가 투자지원을 했었던 회사, 세계 최초 MP3상용화로 이슈를 받았던 회사로 연간 100만 ? 정도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회사다.
그런 만큼 협업 또한 가능할 것이다.
디지털 캐스닉 또한 이번에 우리 회사의 그늘로 들어온 회사 중 한곳이니까.
“그렇군요. 그리고?”
“그리고… 완전 컬러 화면에 최대 32MB의 내장 메모리 카드, 일반인 기준 7일 동안 지속되는 강력한 배터리를 탑재했습니다.”
“7일이나요?”
“네. 연속 270분 통화까지 감당할 수 있는 대용량 배터립니다.”
허 참,
이 정도면 꽤나 대단했다.
과거, 그러니까 내가 판텍을 인수하기 전부터 슬쩍슬쩍 던져준 아이디어에 이번에 전해 준 아이디어만으로 이 정도의 제품을 뽑아낸 거니까.
‘뭐 지금 이 시기에서는 오버 스펙이라고 부를 만하지.’
그런데?
말을 마친 김상현과 임원들 그들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뭔가 말할 듯 말듯 웃음을 머금고 있는 모습, 그 모습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남은 게 있나요?”
“네. 그렇습니다.”
“그게 뭐죠?”
“그건….”
그때 잠시 말을 멈춘 김상현, 그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휴대폰을 조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 기능이 탑재됐다는 말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능이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상현, 그가 뿌듯함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이 주신 아이디어를 현실화시켰습니다.”
아무래도 내 놀란 모습에 만족한 모습이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건 된다.
이건 무조건 된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올라갈 것이다. 위쪽으로.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럼 양산준비를 시작하도록 하죠.”
서두를 수밖에.
“네, 네? 이렇게 빨리 결정하신단 말입니까?”
“당연하죠.”
나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재고가 모자라게 될 테니까요.”
미래가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