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당신의 행복을 위하여 (2)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서울 대검청사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고, 중동의 화해무드를 진작시키던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총리가 유대인 극우파 청년 이갈 아미르의 총을 맞아 사망, 중동의 평화 무드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던 때.
나는 전 세계 금융의 심장이자 패션의 중심, 뉴욕 맨하탄에 패션 브랜드를 런칭했다.
“엄마! 이리 오세요! 브랜드 런칭을 했으니까. 고사를 지내야죠!”
“뭐? 고사? 준영아. 혹시 돼지 머리 가져온 거야?”
“하하. 아뇨. 돼지머리는 사람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 대신 돼지 그림을 준비했어요.”
브랜드의 이름은 바로…
오라클(Oracle).
내가 운영하던 투자 회사와 같은 이름을 가진 브랜드였다.
“이제부턴 엄마가 이 브랜드의 대표예요. 일단 초기에는 저와 저희 회사 사람들이 도와드리겠지만,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에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최대한 빨리 적응하셔야 해요. 아셨죠?”
“당연하지. 준영아 엄마 힘낼게.”
물론 처음엔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한 해 미국에서 창업을 하는 수천 개의 기업들 중 눈에 띄는 브랜드 가치를 지니는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새로운 브랜드가 런칭을 했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네요. 아저씨. 일단 다른 지점들 상황은 어때요?”
“아, 일단 동부 쪽에서는 보스턴, 필라델피아, 워싱턴 쪽에서 오픈 했다고 연락이 왔어. 그리고 서부 쪽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세크라멘토, 샌프란시스코은 내일 아침에 오픈할 예정이고.”
“매출 상황은요?”
“아직 첫날이라서 그런지 눈에 띄는 매출은 안 보여. 뉴욕에서만 1천 달러 정도. 나머지 매장에서는 그 이하의 매출이야.”
“그래요?”
“어. 이것도 뉴욕이니까 가능한 거야. 아무래도 아직 브랜드 가치가 낮으니까 한동안은 적자가 유지되겠지. 뭐 대부분의 회사들이 겪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을 거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런칭 초반, 인지도가 바닥인 상황에서 눈에 띄는 매출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일반적인 기업의 경우 빠르면 6개월 길면 3년차부터 흑자로 전환되곤 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가만히 않아 브랜드의 가치가 올라가길 기다릴 시간도 또 그럴 생각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저씨.”
“어.”
“광고 때려 주세요.”
매체를 통해서 브랜드 인지도를 강제로 끌어올릴 수밖에.
“광고?
“네. 일단은 신문 전면 광고를 때려 주세요.”
“얼마나?”
“하루 100만 달러. 그 정도까지 주요 도시, 일간지에 전부 광고를 박아 주세요.”
마셜 맥루한이 말했듯 미디어는 메시지. 그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때려 박다 보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라클이라는 이름을 선명히 박아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나의 지시를 들은 이어진. 그가 우리가 직영점을 개설한 도시들,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워싱턴, 로스엔젤레스, 세크라맨토, 샌프란시스코와 앞으로 진출할 도시들의 유력 일간지 전부에 브랜드 광고를 내걸어 버렸다.
[미래의 패션을 예언한다! 패션 브랜드. ‘오라클’ 전격 런칭! - USA투데이. 1995. 11. 05]
[그리니치 빌리지의 새로운 바람 ‘오라클’ 신규 개점! - 뉴욕 타임즈. 1995. 11. 05]
[젊은 디자이너들의 요람 ‘오라클’ 워싱턴, 브레이브가 입점 - 워싱턴 포스트. 1995. 11. 05]
.
.
100만 달러라는 힘.
돈의 힘이었다.
“몇 군데에 광고를 건 거에요?”
“일단은 가능한 곳 전부. 마음만 같아선 중소 도시 신문까지 전부 다 하고 싶었는데 그건 가격 대비 효율이 너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뒀어.”
“잘하셨어요. 그럼 총 얼마나 들어간 가죠?”
“하루에 50만 달러씩. 시일은 하루에서 일주일까지 다양해.”
그러자 런칭 초반 지지부진했던 브랜드 인지도가 차츰차츰 올라가기 시작, 곧 판매량 또한 상승하기 시작했다.
[11월 첫째 주 매출 : 130,000 달러]
↓
[11월 둘째 주 매출 : 240,102 달러]
↓
[11월 셋째 주 매출 : 701,029 달러]
인지도라는 장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제법 이름 있는 디자이너들의 디자인과 철저한 검수를 걸친 제품, 합리적인 가격대에 대중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저씨. 이번 주 매출은 얼마나 돼요?”
“드디어 마이너스 매출을 벗어났어. 런칭 초반인데도 이 정도 성적이라니. 대단한데?”
“그만큼 돈을 쏟아부었으니까요. 그럼 이번 주 최고 매출은요?”
“최고 매출은 20만 달러로 뉴욕, 그다음이 샌프란시스코랑 LA순이야.”
다행이었다.
만약 이래도 인지도가 올라가지 않았다면 약간 긴장할 뻔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분명 인지도의 상승과 함께 매출 또한 늘어나고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바에 미치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일단 한 달 매출 1천만 달러 정도는 꾸준히 나와 줘야 마음 놓고 어머니에게 브랜드를 맡길 수 있었다.
“좋아요. 그럼 이번 달 총 수익이 얼마나 되죠?”
“글쎄… 요즘 매출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아직은 마이너스 대야. 아무래도 런칭 초반에 손해를 본 게 좀 커서.”
“아직도요?”
“어, 적어도 1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은 계속 나와 줘야 손해를 메꿀 수 있을 거야.”
때문에 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인지도 쌓기를 시작했다.
일단 지금까지 효과가 있었던 신문 전면 광고를 주기적으로 내보내는 한편 유명 패션 잡지사들에 디자이너들과 우리 제품, 브랜드에 대한 리뷰를 의뢰했다.
그리고 난 뒤 TV광고를 준비하며 인터넷을 이용한 간단한 바이럴마케팅(Viral Marketing)을 시작했다.
광고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 하려한 것이다.
[옷 사러 갔다가 오라클에서 내 마음에 드는 옷 발견한 썰.JPG][조회수10,293][추천710][반대210]
[<리뷰주의> 브랜드 별 겨울 옷 비교(캘X클라인, X크제이콥스, 오라X 등 5개 브랜드)][조회수20,193][추천1049][반대430]
[이 가격에 이 품질 실화냐? 오라클 이 회사 무슨 땅 파먹고 장사함?]
[조회수7,502][추천501][반대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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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정말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띌 정도의 매출 상승이 일어났다.
[11월 넷째 주 매출 : + 810,300 달러]
↓
[12월 첫째 주 매출 : + 1,302,500 달러]
“준영아. 이번 주 들어서 매출이 갑자기 쭉 늘어났는데?”
“얼마나요?”
“저번 주 대비해서 40% 이상 늘어났어.”
아직 인터넷 초기, 인터넷을 이용한 광고하곤 단순한 배너나 팝업밖에 없는 시절이라서 그런지, 바이럴 마케팅을 이용한 광고가 생각보다 더 큰 효과를 일으킨 것 같았다.
‘면역이 없어서 그런가? 이상할 정도로 잘 먹히는데? 이거 댓글 부대도 한번 운용해 봐?’
하지만.
그렇다고 오라클이 단기간에 미주 대륙 전역에서 통하는 브랜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분명 런칭한 기간에 비해 브랜드의 인지도나 매출이 급격하게 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그런 것.
아직까지는 세계 유수의 패션 브랜드들에 비교해 매출은 물론 브랜드의 인지도 또한 매우 부족한 편이었다.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브랜드의 이미지.
그것을 대표할 만한 제품이 부재한 것이다.
“매출은 꾸준히 오르고 있고… 브랜드 평가들은 어때요?”
“브랜드 평가는 그럭저럭. 나름 괜찮은 디자인에 좋은 품질, 뛰어난 가성비를 가진 브랜드라는 평이야.”
“그래요?”
“어. 하지만 확실한 스파크는 튀지 않는다는 평이 많아서 한계점은 뚜렷하다고 하더라고.”
이어진의 말을 들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긴 사전에 미리 우리 브랜드의 미래를 예측할 때, 이쯤해서 저런 평가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리바이스(Levi’s)의 501 straight fit.
몽블랑(Montblanc)의 114 Mozart.
샤넬(Chanel)의 Chanel No.5.
구찌(Gucci)의 Double G.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대표적 작품이 없는 회사라면 어느 한계점 이상의 폭발적 성장이 어려운 것이다.
물론 아무런 특색 없이 가성비를 무기로 커 온 유니클로나 스파오, 탑10 같은 브랜드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2000년도 이후 세계 경제가 경직된 다음에나 나타나기 시작한 기조였다.
게다가.
‘내가 원하는 브랜드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브랜드니까.’
그렇다면?
가성비가 뛰어나지만 딱히 끌리는 없는 브랜드라는 이미지, 현재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 만들어야만 한다.
사람들에게 우리 오라클이라는 브랜드의 이름을, 아이덴티티를, 이미지를 선명히 때려 박을 수 있는 제품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이미 그러한 제품이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처음 브랜드를 런칭 하려 마음먹었을 때부터 내 머릿속을 맴돌던 디자인.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한때 폭발적인 유행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인접한 다른 나라에서까지 유행을 불러일으킨, 유행 이후 도대체 왜 저런 옷이 유행하지 않고 있었는지 의아함을 자아냈던 아이템.
나의 비밀 무기,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요?”
“무슨 소리야?”
“이제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해 보자는 이야기죠.”
나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어진에게 나의 무기.
미래에서 가져온, 사람들에게 오라클이라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각인시킬 그런 제품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벤치 롱 다운(Bench Long Down).
2015년 이후 우리나라의 겨울을 점령했던, 한 때 한국 사람들의 겨울나기 옷으로 각광 받았던 특이한 모양의 아우터.
일명 롱패딩이라 불리는 패션이었다.
순간, 롱패딩을 확인한 이어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거 돗빠(トッパ) 아니야?”
아무래도 롱패딩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닌 듯, 롱패딩을 들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긴 롱패딩의 유행 전에도 롱패딩 자체는 운동선수들이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특유의 보온성능으로 각광받던 제품이었으니 제품 자체는 모르지는 않겠지, 지금도 한국에선 간간히 이런 디자인의 옷이 보이곤 하니까.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한정적인 수요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보다 더 센세이션한 그런 수요. 미 대륙 전역에서 이 아이템을 찾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디자인 자체가 미국사람들에게 낯설다는 건데.
그런 것이라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우리의 제품이 사람들에게 낯설다면…
“아저씨.”
“어. 왜?”
그 낯섦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의 이유를 주면 될 테니까.
“할리우드 배우들 연락처 어디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