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89화 북상하는 폭풍 (1)
“그럼 9월 1일. 그때 뵙는 걸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비행시간을 말씀해 주시면 차량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에이, 굳이 그러실 것까진 없어요. 그럼 끊을게요.”
뚝-
수화기를 내린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내 옆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이어진,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누구야?”
아무래도 갑자기 걸려온 전화가 궁금한 모양, 나는 그의 옆에 있는 서류 하나를 들며 가볍게 대답했다.
“전 실장님이요.”
그러자 잠시 고개를 모로 꺾던 이어진이 이내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나를 따라 다니며 몇 번인가 전진호 실장을 봤던 만큼 내가 말한 것이 누구인지 금세 떠오른 것 같았다.
“아 그 사람. 거참 그 사람이 갑자기 왜?”
“글쎄요. 아무래도 저희 뉴스가 들어갔나 본데요?”
“…설마 너희 할머니가 보자고 한 거야?”
“네. 평창동으로 당장 오라는 거 홍콩이라고 미뤘어요.”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리며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기지개를 펴며 내게 말했다.
“허 참, 용케 알아챘네. 다들 소로스나 타이거 쪽만 파느라 바쁠 텐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우리의 개입을 용케 알아챘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세계화 시대. 글로벌 시대라고 할지라도 아직까지 세계의 벽은 존재했다.
물론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그 절대 거리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아직까지 사람들 사이의 심적인 벽은 꽤나 두터운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아직까지 이런 면에서 취약하지.’
커진 덩치, 들고 있는 돈에 비해 체계도 힘도 노하우도 정보도 부족한 존재.
결국 선진국의 문턱에서 IMF라는 신고식을 호되게 치른 나라.
그것이 바로 한국, 그리고 이 당시 한국의 기업인들이었다.
갈라파고스 같은 한반도 내에서야 그나마 방귀께나 뀐다는 이들이겠지만 글로벌 투자 세력에 비하면 아직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이 당시 한국, 한국인인 것이다.
그러니 한성 쪽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파악, 먼저 연락을 기해 왔다는 것 자체가 꽤나 이례적이었다.
우리야 기본적으로 소로스와 퀀텀이라는 방패막이 뒤에서 암약했었으니까.
‘아마 저번에 금융사들에 보낸 메시지 때문이겠지.’
하지만 뭐 굳이 비밀로 할 일은 아닌 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마 그쪽에서도 나름 자료를 취합했겠죠.”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이러한 사항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 테니까.
“뭐 하긴 그렇겠지. 그런데 진짜 안 들어가 봐도 되겠어? 시간 좀 있으니 잠깐 들어갔다 와도 될 텐데?”
“됐어요. 기왕 들어갈 거 나중에 효도 선물 하나 더 가져가지고 들어가면 더 좋아하실걸요?”
“응? 효도 선물?”
“저희 할머니 아시잖아요. 뭘 제일 좋아할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성공, 구체적으로는 돈이었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이내 뭔가 깨달았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리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대단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여튼 할머니나 손자나 참 대단하다 대단해.”
“하하. 저희 집안이 좀 그렇죠. 그리고… 그게 아니어도 지금은 움직일 수 없어요.”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회는 한번 가면 다신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피식 가벼운 웃음을 입에 올렸다.
그 또한 그 기회가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뭐 그건 그렇지.”
아무튼 그렇게 잠시간의 대화를 마친 우리, 우리는 또다시 자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기획하고 있는 사업은 이전의 작전보다 훨씬 더 스케일이 큰 사업, 그만큼 그 사업에 걸린 이익 또한 큰 만큼 이번 일을 진행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는 필수였다.
“좋아요. 그럼 일단 우리 소로스 씨와 협약한 날짜는 언제죠?”
“오늘로부터 일주일. 그 이상 시간을 주면 저쪽에서 정신들을 차릴 테니까.”
“그럼 우리가 예측한 상대방들의 대책은요?”
“아마 별다를 건 없을 거야. 태국이랑 비슷하게 외환 방어, 그리고 통화밴드 완화 정도겠지”
“상대쪽 외환 총량은 예측 가능한가요?”
“아직은 미지수야. 이번 사태로 외환 보유고가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겠지만.”
“뭐 저희로서는 잘된 거죠. 그들의 황금 같은 외환이 태국에서 우리에게 들어왔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렇게 기본적인 사항들을 정리한 뒤,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했다.
“좋아요. 그럼 현재 우리 총알은 어때요?”
아무리 확실한 준비를 했더라도 총알이 부족하다면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는 게 이 바닥이었으니까.
그러자 잠시 테이블을 살펴보던 이어진, 그가 서류 한 장을 들어내게 내밀며 말했다.
“보자 일단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총알 20억 달러에 이번에 들어온 15억 달러. 그리고… 이번에 태국에 투자한 주식들을 정리한 자금 1억 달러야.”
“그럼 총 36억 달러인가요?”
“어, 최대한 정리해 보긴 했는데 아직은 이 정도야.”
생각보다 많은 금액.
3개월 전 처음 태국을 공격할 때 자금을 박박 긁어모아 20억 달러를 간신히 만들어 낸 것을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풍족한 금액은 아니죠.”
분명 많은 자금이긴 했지만 이번에 우리가 노리는 상대들.
그들을 상대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자금은 아니었다.
물론 거시적 규모의 통화전쟁.
그것을 진행할 때 온전히 자기 자신이 들고 있는 자금만으로 전쟁을 진행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리고 대부분은 자기 자본 이외의 자본으로 상대롤 공격, 레버리지 효과를 극대화 하는 데 몰두하지만 그렇다고 풍족한 총알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
압도적인 자금력.
그것만 있으면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하든 무엇을 획책하든 상관없이 상대를 공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저씨.”
“어.”
“우리 자금을 구하죠.”
순간, 이어진이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자금을? 여기서 더?”
“네.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자금이 많을수록 좋잖아요.”
“아니 그건 당연하지만… 어떻게? 이미 우리가 아는 루트로는 죄다 땡겨 받았잖아.”
“돈 나올 구멍이야 만들면 있죠.”
“그런 구멍이 있다고? 너 설마 HMC나 카본 사람들 자금 생각하는 거야? 야. 아마 거기도 힘들 거야. HMC든 카본 사람들이든 우리가 박박 긁어서 투자 받았으니까.”
“네. 그렇죠. 하지만 아직 한 군데 돈이 나올 구멍이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한 군데만 집중 공략하기로 하죠.”
“…어디를?”
“일본이요.”
*
다음날.
일본(日本) 도쿄(東京).
인구 1,300만 명의 거대 도시이자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금융, 산업, 교통, 패션을 선도하는 도시.
학자에 따라 뉴욕,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도시 중 하나에 속하는 이 도시에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소년 한 명과 차가운 표정이 인상적인 남성 한 명이 도착했다.
“생각보다 더 빨리 도착했네요.”
“뭐 거리상으로 따지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 바로 시작할 거야?”
“그럼요. 시간은 금이니까요.”
그 뒤, 도쿄에 도착한 그들은 단 한 시간의 휴식도 없이 곧바로 도쿄를 돌아다니며 도쿄에 존재하는 시중 금융사 28곳을 차례로 순방, 일주일간 자신들의 상품을 팔았다.
“귀사에 상품을 판매하고 싶습니다.”
“네? 아니 그 무슨…?”
그들이 판매한 상품은 바로 옵션(option products).
정확하게는 앞으로 세 달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홍콩 등.
동남아 및 동아시아에 산재한 국가들의 시중 금리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하고 주가지수가 하락, 외환 가치가 폭락한다는 것에 영혼을 모아 베팅한 상품이었다.
그러자 그들의 상품을 확인한 금융사들은 당혹스런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상품이 너무나 극단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정말 귀측에서 우리에게 판매하고자 하는 상품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베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베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물론 처음부터 일본의 금융사들이 그 상품을 구매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들 또한 귀가 있고 눈이 있는 만큼 현재 동남아 경기가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헤지 펀드들의 공격에 의해 태국이 쑥대밭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정상적인 상황하였다면 이러한 극단적인 상품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위험이란 최대한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이었으니까.
“…사양하겠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상품은 취급하지 않는지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조건, 옵션이라는 것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만든 상품은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그런 말랑말랑한 상품이 아닙니다.”
“…무슨?”
“여러분이 놀랄 만한 옵션을 지급하겠다는 말입니다.”
무려… 150%
해당 국가의 경제 수치가 옵션에 미달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상품을 구매한 자금의 150%를 지급하겠다는 조건.
바로 과거 소로스가 판매했던 녹아웃 옵션의 강화판이었다.
그러자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이던 도쿄의 금융관계자들 그들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담보는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나스닥에 상장되어 있는 30억 달러 어치의 주식 그것이 저희 담보입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1분. 1분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이라면 저희는 바로 다른 은행으로 갈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
“좋습니다. 계약하죠.”
그들은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제법 많은 돈, 4억 불 이상의 돈을 가져갈 수 있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 금융사들, 두 사람에게서 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불안해할지언정 후회하지 않았다.
분명 위험성은 충분하지만 설마하니 모든 국가가 거의 국가 부도에 가깝게 경제 수치 폭락을 겪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상식이라는 틀이었으니까.
“저… 행장님. 이거 너무 위험한 계약 아닙니까? 자칫 잘못하면….”
“쓸데없는 소리. 자네 생각엔 저 국가들이 한순간에 폭삭 망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아마 1%도 채 안될 거야. 그러니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저 우린 가만히 있다가 한국 놈들이 가져다주는 돈이나 먹으면 되는 일이야. 알아들어?”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그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때로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행장님! 큰일 났습니다!”
“뭐? 무슨 일인데?”
"행장님! 지금 동남아가....!"
부하 직원의 목소리. 동남아라는 말에 눈을 번쩍 뜬 행장이 빠르게 부하 직원을 바라봤다.
때마침 묵혀 뒀던 돈이 나올 때가 되었다는 걸 기억해 낸 것이다.
"아 그렇지! 그래그래! 안 그래도 그거 관련해서 말인데, 이번에 돈이 들어오면 전 직원 요트 여행을 가는 건 어떤...."
"다 떨어졌습니다!"
"뭐?“
"다 떨어졌다구요!"
순간, 사무실엔 정적이 감돌았다.
부하 직원은 울상을 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희가 틀렸습니다! 그 한국놈들이 맞았다구요!"
[달러(USD) / 필리핀 페소 26.40 ▲ 3.70]
[달러(USD) / 말레이시아 링기트 2.52 ▲ 0.50]
[달러(USD) / 인도네시아 루피아 2165.12 ▲ 240]
"......"
직원이 내민 프린트를 행장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한참이나 종이를 보던 행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말도 안 돼....."
그는 그제서야 자신에게 상품을 팔았던 사람들.
짙은 미소를 짓고 있던 꼬마의 웃음을 떠올렸다.
그 당시엔 그저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의 웃음이라 생각했던 그 웃음이 지금 이 순간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이이이익! 이건 말도 안 돼!"
뒤늦은 비명이 도쿄의 한 건물을 흔들었다.
"말도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