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252화 묵직한 첫 걸음 (3)
“우리의 목표는 단순합니다.”
고요한 공간. 원래 대한생명의 사장의 개인 공간이었으나 이제 커다란 회의실로 탈바꿈한 곳, 그곳에서 나는 사람들을 향해 선언했다.
“앞으로 3년, 3년 안에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 통신을 장악하는 것. 그것이 오라클의 제1 목표 입니다.”
그러자 그동안 긴장 어린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던 사람들, 대회의 소집에 맞춰 오라클로 찾아온 사장단들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순간,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 그들 중 한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입을 연 사람은 한성전자의 사장인 경준혁, 과거 나와 몇 번 안면이 있던 사람으로 이번 합병 과정에서 내부승진을 한 인사였다.
“이유요?”
“네. 아무래도 조금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총대를 멘 느낌, 나는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정보가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해지는 시기, 정보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순 정적.
잠시 멈칫하던 그가 이내 천천히 내 말을 받았다.
“앨빈 토플럽니까?”
“네. 그렇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들어보기는 했습니다. 제3의 물결. 뭐 사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유행하긴 했던 책이니까 말이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감 있는 표정을 보니 그 책을 꽤나 정독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다른 분들도 다들 읽어 보셨습니까?”
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한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경선 씨는?”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읽고 있는 중이라….”
“그럼 한 분 빼고 다들 읽어 보신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주르륵 사람들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전 경 사장님이 말씀해 주셨다시피 저는 제3의 물결. 앞으로 다가올 정보화 시대를 대비하고자 합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시대를 이끌어 가고자하고 있죠.”
“설마 그럼 오늘 이 회의는….”
“맞습니다. 오늘부터 오라클의 모든 체계는 이 목표. 정보화 시대라는 키워드를 기본, 아니 기준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나는 진지한 낯으로 말을 맺었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혼란 어린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모든 사업을 말입니까?”
“네. 모든 사업. 그러니까 전자, 자동차, 유통을 막론한 오라클의 미래 사업은 정보화 시대라는 키워드를 향해 설정될 겁니다.”
“하지만 회장님.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분명 앨빈 토플러의 이론이 미래학자들의 이론들 중에선 제일 그럴듯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 이론에 맞춰 회사를 운영할 만한 가치는….”
“오지 않으면 만들면 됩니다.”
순간, 경준혁의 얼굴이 굳었다.
“만든다고요?”
“네. 정보화 시대. 소통의 시대.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는 시대. 그것을 저희가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을 스윽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을 우리의 편으로 만드는 거죠.”
“그런….”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하나하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휴대폰으로 영화감상을 하고 화상통화를 즐기며 여행지 비행기표를 예매하는 시대. 원격으로 차량에 시동을 걸고 인터넷을 통해 출장지의 위치를 안내받는 시대. 인터넷을 통해 쇼핑을 하고 불과 10초 만에 결제를 마치는 그런 시대.”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천천히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그런 시대가 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러자 잠시 말을 멈춘 사람들. 그들이 뭔가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닫는다.
“…….”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 보이는 모습들이었다.
내가 살던 2020년도에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 하지만 지금의 이들에게는 공상과학의 한 귀퉁이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 시대를 우리가 선점한다면 어떨 거 같습니까?”
그 말에 경준혁이 말을 받았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겠죠. 기존의 존재했었던 경제체제 자체가 변화할 겁니다.”
“구체적으로?”
“구체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것들 또한 빠르게 변화할 겁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소통은 늘어나지만 그만큼 깊이는 얕아지고 정치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세력이 달라질 겁니다. 문화는… 지금과는 천양지차의 모습을 띠고 있겠죠. 그리고….”
“그리고요?”
“그 모든 변화는 경제적 이익을 수반할 겁니다. 지금과 같은 단순한 생산, 소비의 관계가 아니라 조금은 다른 경제체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죠.”
놀랍게도 그의 말은 실제와 닿아 있었다.
의외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안정적이지만 그리 눈에 띄는 인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식견이 좋으시군요.”
“저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죠. 좋습니다. 그렇다면 경 사장님. 사장님이 생각하시기에 그 변화는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경준혁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선 저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네. 하지만 회장님. 그렇다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모두 무시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현실적인 문제요?”
내가 묻자 경준혁 그가 진지한 자세로 몸을 바로했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회장님이 말씀하신 세상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시겠지만 현재 미국 나스닥 시장이 미친 듯이 출렁거리고 있고 나스닥에 상장한 회사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 가고 있으며 그 시장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죠.”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경준혁, 그가 약간은 고양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회장님 여긴 한국입니다. 미국이 아닌. 솔직한 말로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의 수가 채 100만 명도 안 되는 게 현실이란 말입니다. 게다가… 지금 현재의 인터넷. 그거 그리 완벽한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 쓸모 있는 도구이긴 하지만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현실화되기까진 어마어마한 기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가 자신의 말에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은 이 당시 일반적인 이들의 정보화 시대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었다.
“…경 사장님께서는 제가 다른 이들과 보폭을 맞추길 바라시는 겁니까?”
“약간의 안전장치를 하자는 겁니다. 솔직히 미국, 아니 일본에서 이뤄진 다음에 해도….”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일본, 그곳은 신경 쓸 바가 못 됩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미국이라면 모를까.”
그러자 갑자기 분위기가 적막해졌다.
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 사장님.”
“네. 회장님.”
“그렇다면 우리가 하면 어떻습니까?”
“네?”
나는 의문으로 커진 그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꽉 그러쥐었다.
“우리가 직접 그 세상을 만드는 겁니다.”
순간, 경준혁의 눈에 커졌다.
“네에?”
“방금 전 경 사장님이 말씀하신 문제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인터넷. 물론 느리죠. 저도 인터넷을 하다가 화가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주변에는 아직까지 인터넷이 뭔지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고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분명 요즘 인터넷, 과거 내가 경험했었던 네트워크 환경을 생각하면 사실 인터넷이라고 하기에도 우스울 정도의 속도를 자랑하는 모뎀, 분명 그것을 생각하면 내가 말한 것들이 이뤄지는 지는 일은 요원해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일로 생각되는 그 일이 이뤄짐을. 내가 말한 세계가 곧 도래함을. 나는 어디까지나 경험을 기로해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젭니다. 인터넷이 느리면 초고속 인터넷 망을 전국토에 깔아 버리고 인터넷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교육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불가능하다 생각하십니까?”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수조, 아니 수십조가 들어갈 수도 있는 일입니다. 회장님의 자산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전국토를 커버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살을 찌푸르며 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죠.”
“네?”
의외의 말을 들은 듯 나를 바라보는 경준혁, 그를 향해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요?”
“어떤…?”
“만약 그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일을 대신 해 줄 사람이요?”
“네. 정보화 시대를 불러오는 테 필요한 돈을 대신 내 줄 곳이 있다면, 그렇다면 과연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향했다.
“……말도 안 됩니다.”
“말이 됩니다.”
“아니 정말 그런 호구가, 그런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슬쩍 주변을 돌아보자 다른 사람들 또한 말도 안 된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표정을 확인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그리고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 비춰 들어오는 햇살, 그 너머를 바라보자 저 멀리 북악산의 그림자가 손에 잡히는 듯 했다.
“그런 곳이 있습니다.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사람들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
며칠 뒤.
대한민국 금감위는 경기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을 퇴출대상은행으로 지정했다.
[정부 ‘대한민국 제1차 금융 구조조정’시행! 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 금융사 퇴출 명령! - 한X일보]
[금감위, 1차 구조조정으로 퇴출된 5개 은행에 은행인수 협조 요구, ‘빠른 시일 내에 정상화 목표’ ? 경X일보]
[‘나 떨고 있니?’ 남은 부실은행 12곳, 정부의 큰 칼에 긴장, 자체적인 구조조정 착수 ? 중X일보]
그러자 퇴출대상 5개 은행 직원들은 은행인수 협조를 거부, 은행 내의 출입통제 및 전산망 봉쇄하며 인수은행 측이 퇴출은행 직원 승계 의무가 있다는 주장하며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퇴출대상 5개 은행 직원들! 출입통제 및 전산망 봉쇄로 은행인수 협조를 거부! - 매X경제]
물론 그들의 저항, 그들의 요구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빠르게 악화되었다.
기아차는 정부의 구조조정 제안을 받아들여 지방노동사무소에 노동자 4,830명 정리해고신고서를 접수하였으나 기아차노조는 사측의 정리해고신고서 제출에 반발하며 2차 시한부 파업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그에 호응해 현대차 노조 또한 부당 구조조정에 저항한다는 선언을 하며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IMF를 벗어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이 극렬한 저항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자 얼마 전 있었던 금모으기 운동의 여파, 대기업들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던 김대중 대통령 또한 잠시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은밀히 재계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인원 중에는….
[9. 오라클(Oracle) 그룹 : 김준영]
김준영.
재계서열 9위의 대기업, 오라클의 회장의 이름 또한 자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