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폭풍전야 (5)
“거참 활기찬 집안이구만. 안 그래?”
차가운 목소리. 분명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 회장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깊고 무거웠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
김귀란.
그녀가 천천히 서늘한 시선으로 자신의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만.”
그녀의 시선이 자식들을 내리눌렀다. 그 모습에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 차갑게 얼어 버렸다. 마치 한파를 맞이한 동상들처럼.
뚜벅뚜벅-
정 회장과 김귀란이 만찬장 안으? 완전히 들어섰다.
그들과 시선을 마주친 사람들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사용인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그때.
“오, 오셨습니까, 어머니”
김명석이 나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김귀란과 정 회장에게 장남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어필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오시긴. 내 집? 내가 오甄? 뼈犬??”
그녀에게서 돌아온 것인 차가운 질책뿐이었다.
순간, 김명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와중 우르르 쏟아져 버린 그의 위신. 김명현이 고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원래 호랑이가 돌아온 산의 여우는 꼬리를 숨기고 도망치는 법.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가 돌아온 참이야.
‘목덜미를 물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겠지.’
이윽고 자리에 앉은 정 회장과 김귀란. 그들이 말없이 한성가 자제들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슬쩍 피하는 막내 김성아.
묵묵히 고개를 숙이는 삼남 김명준.
찡그린 인상의 차남 김명현과 창백한 얼굴의 장남 김명석.
그리고 그 외에 숨을 죽이고 있는 한성의 핏줄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정 회장이 잔 미소를 입에 물었다.
“김 회장. 자네 집엔 재미있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아. 안 그래?”
누가 봐도 약간의 놀리는 어조. 정 회장의 말을 들은 김귀란이 서늘한 시선으로 자제들을 바라보았다.
“가져갈 텐가?”
순간 움찔. 김귀란의 말에 사람들이 몸을 꿈틀거렸다.
아니 가져가라니. 설마 우리들을?
냉정하기 그지없는 김귀란의 말에 그들의 얼굴에 모멸과 당혹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불만도 제기할 수 없었다.
김귀란과 정 회장이 오기 전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인 데다가, 이 자리를 차지한 두 마리 호랑이, 그들의 위엄에 불만을 제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져가라고? 거참 우리 누이는 참 농담도 잘해. 아니 안 그래도 집안에 골치 썩히는 놈들이 쎄고 쎘는?내가 못하러 남의 집 화상들까지 책임지겠어. 뭐··· 작은 선생이라면 내 두말하지 않고 데려갈 테지만.”
정 회장이 슬쩍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시간 날 때마다 손녀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이 순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김귀란. 그녀가 어림도 없다는 듯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사양하지.”
“쯧, 그럼 나도 거절이야.”
“아쉽구만. 이 기회에 집안에서 정신없는 것들을 정리할 수 있으려나 했는데.”
김귀란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사람마다 움찔 몸을 멈칫 거렸다.
분명 실제 이뤄지지 않을 일이겠지만 그만큼 김귀란의 시선이 따가웠던 것이다.
그렇게 어색하고 삭막했던 분위기, 김명석과 김명현의 대립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만찬장의 분위기는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에 의해 정리되었다.
물론 그 정리가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제법 반가운 변화였다.
마음에 안 드는 가족들의 시선을 받으며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이는 것보단, 지금처럼 김귀란 정영주이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낯선 것 보단 그래도 익숙한 게 나은 법이지.’
그렇게 자리에 앉은 김귀란과 정영주, 그들을 위한 식사가 새로이 차려졌다.
물론 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두둑이 식사를 마친 상태였지만, 이견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식사가 진행됐을 즈음,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은 정 회장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래. 부회장이랑 사장은 나랑 구면이지?”
갑작스런 물음. 그의 말에 당황한 김명석과 김명현이 정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게··· 네. 회장님. 어렸을 때에도 몇 번 뵈었고 근래에는 신년에 있었던 전경련 모임에서도 한번 뵈었었습니다.”
김명석의 조심스러운 대답. 그런 김명석을 흘겨본 김명현이 서둘러 자신을 소개했다.
두 사람 모두 기대 어린 눈빛. 방금 전 김귀란과 정영주으로부터 받았던 모멸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잠시 기억을 헤아리던 정 회장. 그가 곧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기억 나는구만. 그래 그때 분명 제2이동통신 사업자 문제 때문에 모였었지.”
“네. 맞습니다, 회장님. 기억해 주셨군요.”
“뭐 재계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헤아려 보면 또 그리 많지 않으니까.”
김명석의 말에 정 회장이 대답했다.
말을 마친 늙은 거인의 시선이 이번엔 옆에 있던 김명준과 김성아에게 닿았다.
“가만 보자 그럼 이쪽에 있는 사람들이 셋째랑 막내겠구만. 맞지?”
“네. 맞습니다, 회장님. 제가 셋째 김명준, 이쪽이 막내 성압니다.”
“어렸을 때 몇 번 봤던 것 같은데 못 본 사이에 많이들 컸어. 그래 지금은 무슨 일들을 하고 계신가?”
그의 말에 김명준과 김성아가 공손히 대답했다.
“성아는 한성호텔을 경영하고 있고··· 저는 근처에서 조그마한 화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뭐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김명준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평소 신경질이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김성아조차 정 회장 앞에서는 요조숙녀가 따로 없었다.
그러자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정 회장, 그가 짙은 미소를 입에 올리며 한성가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뭐 다들 잘 살고들 있구만. 흐음, 그럼 오늘 작은 선생 선물은 기대해도 좋겠어.”
응? 이게 무슨 소리야? 누구 선물?
갑작스런 말에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회장님? 선물이요?”
“그래. 오늘 작은 선생. 시험 만점 맞았다고 축하하는 자리잖아. 그러니 당연히 선물이 있어야지. 말마따나 흔한 일이 아니니까.”
김명석의 말에 정 회장의 슬쩍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씨익 짙은 미소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그가 일부로 이런 말을 꺼내기 위해 판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경고하고 싶었던 거겠지.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러자 일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이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모이더니 이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
그제서야 정 회장이 말한 작은 선생이 누군지 파악한 것 같았다.
“회장님··· 작은 선생이라니. 설마 지금 준영이를···?”
김명석의 말에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니겠나. 우리 작은 선생이지.”
“아니 그게···.”
“그건 그렇고 빨리 선물들 있으면 꺼내 놔 봐. 내 선물 구경 좀 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없던 선물이 갑자기 생길 일도 만무. 사람들이 주저주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차피 그들이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나에 대한 축하 때문이 아닌, 나에 대한 견제와 확인, 그리고 김귀란의 명령 때문이었으니까.
“그건······.”
“설마 다들 준비 안 한 건가?”
“······.”
“허허, 다들 이거 너무 하는구먼. 아니 다 큰 어른들이 되어 가지고 혼자 남은 조카 선물 하나를 제대로 안 챙겨왔단 말인가?”
김명현의 말에 혀를 쯧쯧 차는 정 회장.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분명 부당한 질책. 하지만 그 질책을 하는 사람이 문제였다.
말마따나 힘 센 놈이 장땡이라고 나이로나 인맥으로나 재력으로나 이 중에서 정 회장에게 비빌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김귀란이 나서 정 회장을 막아 준다면 모르되.
“······.”
김귀란마저 끄덕끄덕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자식들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그러자 잠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 회장이 이내 혀를 끌끌 처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작은 선생. 받게.”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정 회장. 그에게서 공손히 상자를 받아 상자의 포장을 풀자 그곳에는 현대의 로고가 박혀 있는 손가락 굵기 만한 열쇠 하나가 자리해 있었다.
“회장님. 설마 이거···?”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내가 정 회장을 바라보며 묻자 그가 흐뭇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차 키야.”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차키를 내 선물로 준다고?
“···회장님 저 11살인데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묻자 그가 다소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지.”
“그럼···?”
정 회장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 말고 자네 어머니 드리게. 우리 회사 직원이 자네 어머니 계시는 아파트 앞에 세워 놨을 테니까 바로 타면 될 거라 전하면 될 거야. 뭐 이래봬도 우리 회사에서 나온 최신형 차니까 나름 만족하시겠지.”
어머니?
어머니란 말에 본능적으로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어머니와 김귀란이 만났을 때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풍기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김귀란의 앞에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꺼려졌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김귀란은 별 상관없다는 듯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설마···.’
그때 내 시선을 봤는지 정 회장이 슬쩍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왜? 김 회장한테 혼날까 봐 그래? 허허 나도 기왕이면 한성 거로 사 주고 싶었는데. 이거 한성에는 차가 없더라고. 그러니 뭐 별 수 있나?”
그가 가벼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 양반 굉장하네···.
아니 김귀란의 면전에서 이 무슨···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에 대한 김귀란의 반응이었다.
날카로운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그가 차게 웃으며 정 회장의 도발을 넘겨버린 것이다.
“좋기도 하겠다. 그놈의 차 있어서.”
다른 사람들도 김귀란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입을 떡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평소 김귀란의 성격을 생각하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지. 암 좋고말고. 그놈의 차가 있는 덕분에 천하의 김귀란이도 놀리고 또 이렇게 작은 선생한테 선물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좋은 거 왜 아들 줬어. 그냥 죽을 때까지 손에 꽉 쥐고 있지. 그런데 정 회장. 이거 나한테 잘 보여야 하는 상황 아니야? 아니 내가 나쁜 맘 한번 먹으면 정 회장만 힘들어지는 거잖아.”
“허허, 이거 왜 이래? 내가 잘 보일 사람은 자네가 아니잖아.”
정 회장이 슬쩍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나와 김귀란 정영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