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돈의 맛 (1)
내가 이어진에게 주식 매수 자료를 요청했을 때였다.
"아. 젠장."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자료를 들던 이어진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넣는 모습이 보였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아 종이에 베였어."
순간, 서랍 안에 대일밴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 나는 서랍 안에서 밴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에고. 이거 붙이세요."
"아, 고마워."
"고맙기는요. 빨리 치료하고 다시 일 시작해야죠. 그나저나 동광제약은 다 털었어요?"
그러자 이어진이 농장주를 바라보는 목화 노예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휴···."
"다 턴 거예요?"
"아니. 아직 못 털었어. 아무래도 매매가가 너무 놓은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가격을 조금 더 낮추는 건 어때?"
그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 나는 성우타이어 주식을 처분해 얻은 수익 9억 4천만 원을 동광제약 주식에 모조리 쏟아 부었다.
6월 10일. 그동안 보합세를 유지하던 동광제약의 주가가 항암제 신약 개발 뉴스로 폭등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광제약 ‘기적의 항암제’ 개발 성공 초읽기! - 경X일보 1993. 6. 10]
[레고켐바이오. 동광제약과 기술 협약 "신약개발 잠재력 주목" - 조X일보. 1993. 6. 13]
[동광제약 주가 폭등 ‘신약 효과’ 전문가들 400% 주가 상승 예상 ? 부X일보. 1993. 6. 14]
덕분에 한 달도 안 돼는 짧은 기간, 투자대비 3배에 달하는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6월 10일. 동광제약 10,600] → [7월 7일. 동광제약 31,820]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다음 계획을 위해 보유한 동광제약의 주식을 모두 처분하려는 그때.
[···아무래도 이번 동광제약의 주가 상승은 이제 끝났다고 봅니다. 아직 신약 개발이 완료된 것도 아닌데다가 확실한 효과도 입증되지 않은 만큼 더 이상의 투자는 무리수일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과 같은 뇌동투자, 묻지마 투자식의 투자 광풍이 끝나면 알아서 주가가 내려갈 겁니다.]
오피셜인지 뇌피셜인지 유명 애널리스트 하나의 인터뷰 때문에 동광제약의 상승세가 한풀 꺾여버린 것이다.
물론 오피셜이 나오기 전에 주식을 내어놓은 덕분에 3분의 2가량 주식을 정리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상당한 양의 주식이 팔리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만우 때나 성우 때처럼 설거지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동광제약의 주식은 최초 시초가의 6.5배인 68,900원까지 올라간다.
물론 보합세인 현 시점을 벗어나 몇 달쯤 걸리겠지만, 결국 올라갈 주식인 만큼 현재의 눌림이 풀리면 고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투자자들이 달라붙을 거라는 말이다.
"어때 좀 낮출까?"
재차 묻는 이어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아직 올라갈 여력이 충분한 주식이에요. 그러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하죠. 어차피 큰 덩어리는 다 팔았으니 남은 거야 다른 종목을 조절하는 동안 정리될 테고요."
그러자 이어진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럴까?"
"확실해요."
"흐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 흔들어 보는 게 어때?"
이어진이 은근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흔든다고요?"
"어. 지금 잡고 있는 자금이 좀 있으니까 한번 바짝 조였다가 슬쩍 풀면 개미들이 달라붙지 않을까 해서."
아무래도 지금 있는 주식들을 빨리 털어 버리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요. 어차피 다 팔릴 거, 우리가 개미들 피 빨아 먹자고 이 짓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손해를 본 것도 아닌데 굳이 개미들의 고혈을 쥐어짜 배를 불리고 싶진 않았다.
그러자 그도 한번 말해 본 것에 불과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뭐 나도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니까. 흐음, 그건 그렇고. 여기 우세포리머랑 유리스제작소 15만 주씩 매수 끝났어."
그가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우세포리머 147,012주]
[유리제작소 156,346주]
기다렸던 다음 페이즈인 것 같았다.
우세포리머와 유리스제작소 두 종목 모두 마지막엔 9배, 9.8배까지 주가가 뛰는 대장주였던지라 기대가 컸다.
나는 이어진이 건넨 매수표를 바라보며 슬쩍 물었다.
"시초가가 얼마였죠?"
"5,800원하고 8,500원. 덩치가 커서 좀 걸렸네."
그렇다는 말은 20억이 넘는 돈이 매수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아직 동광에 묶여 있는 주식이 다 풀리지 않은 만큼 가용 자금 대부분이 들어간 상태라는 말이었다.
나는 매수표를 살펴본 뒤 이어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오케이. 그럼 이제 그쪽은 스탑이에요. 아저씨 고객들은 더 사겠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저는 이제부터 키핑. 8월까지 지켜볼 거예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8월 5일.
"빨리요 빨리! 장 마감 15분 남았어요!"
"어허 기다려 봐! 아직 주문이 안 들어왔다잖아!"
"아 진짜! 빨리 좀 나가라! 빨리!"
장이 끝나기 직전 우세포리머와 유리제작소, 그리고 자잘자잘한 잡주들까지 모두 다 처분할 수 있었다.
"으아! 끝났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야!"
장 마감 시간을 딱 15분 앞둔 시점이라 절로 식은땀이 새어나오는 상황.
드디어 계획의 1단계가 마무리 된 것이다.
"그러게 적당히 2배 정도에서 시마이 치자고 그랬잖아요."
"아니 아무리 봐도 둘 다 2배는 무조건 넘을 거 같은데 그걸 어떻게 그냥 두고 봐 덕분에 3배 정도로 마무리했으니 잘한 거 아니야? 허허 우리 도련님 참 박하셔."
"허 참. 말이나 못하면··· 아무튼 얼마나 나왔어요?"
내가 묻자 이어진이 천천히 계좌를 확인했다.
"잠시만··· 보자··· 동광제약 주식 아직 안 팔린 거 빼고··· 0.5% 수수료 빼고 그러면···."
그런데? 그렇게 잠시 중얼거리던 이어진이 갑자기 씨익 웃는다.
"뭐··· 이런 건 직접 봐야 하지 않겠어?
그리곤 나를 향해 확인서를 내밀었다.
거참. 그냥 말해 주면 뭐 어때. 어차피 대충 얼만지 아는 걸.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그의 말처럼 직접 금액을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저 알고 있는 것과 얼마나 쌓여 있는지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다를 테니까.
‘좋아.’
나는 그에게서 확인서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슬쩍 시선을 돌려 확인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4,242,628,800원]
40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 내 눈에 들어왔다.
***
이튿날 오후, 나는 명동에 소재한 백화점.
80~90년대 ‘꿈과 희망을 드리는 미도파’ 라는 슬로건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미도파 백화점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풍경.
은색으로 빛나는 화려한 샹들리에와 거울로 써도 될 것 같은 대리석 바닥.
수백만 원이 넘는 고급 의류를 입고 있는 마네킹과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고개들을 응대하고 있는 직원들.
롤렉스, 몽블랑, 페라가모, 에르메스, 샤넬, 디올, 프라다, 구찌.
내가 죽기 전인 2019년도까지 명품으로 각광받던 브랜드들의 이름이 걸려 있는 명품관.
그리고 그 안을 마치 산보라도 하듯 여유롭게 노닐고 있는 사람들까지.
평소 보아오던 달동네의 앙상한 일상과는 다른 화려한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댄디 명품 학생복 코너 특설!]
[스케이트 보드, 롤러스케이트 판매!]
[명품관 신설. 디자이너 초청전!]
1993년은 물론 2019년에도 백화점과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왔었기에 백화점의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준영아. 위험해! 이리 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어머니가 계신 쪽을 바라보자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랑 같이 가야지."
나를 바라보는 와중에도 은근슬쩍 주눅이 든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화려한 주변 분위기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어머니도 이런 곳은 거의 처음일 테니까.’
나는 슬쩍 웃으며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죄송해요. 보다 보니까 신기해서."
"에구 우리 아들. 신기했어? 일단 옷부터 사고 구경하자 응?"
"알았어요."
"그래, 그럼 아동복 코너가 어디 있나."
나는 빠르게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 제가 봤어요. 이쪽으로 가면 될 거에요."
그리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명품관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처음엔 의심 없이 나를 따르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준영아. 아동복 코너 이쪽이 아닌 거 같은데?"
나는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엄마 옷 사러 가는 거니까요."
"뭐어? 내 옷? 아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분명히 학예회 때 입을 옷 산다고···."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이제서야 내 의도를 알아챈 것 같았다.
사실, 오늘 이곳에 온 것은 내 옷이 아니라 어머니의 옷을 사기 위해서였다.
엊그제 증권사 투자를 마치고 집에 갔다가 동창회에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 어머니를 봤기 때문이었다.
‘아. 어쩌지··· 그냥 못 간다고 할까?’
물론 두 달 전이었다면 어머니의 고민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주식 거래 수수료를 제하고 나서도 40억 원이 넘는 돈이 현재 내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동창회 간다면서요. 그러니까 이쁜 옷 하나 선물해 드릴게요."
그러자 어머니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래도 그건···."
"괜찮아요. 저 돈 있어요. 저 주식하는 거 아시잖아요."
"준영아. 준영이가 엄마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엄마 옷 있어. 엄마 옷가게에서 일하는 거 준영이도 알잖아. 그러니까···."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옷들은 대부분 캐쥬얼. 정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오래된 옷들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10년 만에 처음으로 가는 동창회에 입고 갈 만한 옷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어머니를 끌고 명품관에 끌고 갈 순 없었다.
힘도 없고 또 그렇게 해 봐야 어머니가 옷을 고를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에휴, 알았어요. 그럼 그냥 구경이라도 해요."
방법을 슬쩍 바꾸면 되지.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어머니를 바라보며 필살의 눈물 글썽글썽 연기를 선보였다.
그러자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시던 어머니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 그래 가자 가. 대신 정말 구경만 하는 거야?"
그 순간, 나는 빠르게 얼굴을 표변, 웃는 얼굴로 어머니를 이끌었다.
"하하 알았어요. 구경‘도’ 할게요!"
그리곤 곧바로 명품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 어머니는 심드렁한 얼굴로 나를 따라올 뿐이었지만.
"엄마 이거 어때요? 에르메스 신상품이라는 데?"
"응? 아 이쁘네. 그런데 너무 비싼 거 아니니?"
"엄마 그럼 이건요? 구찌라는 브랜드인데 국내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대요."
"그래? 그런데 엄마는 잘 모르겠네··· 이런 디자인을 별로 안 좋아해서···."
"엄마. 이건 어때요? 엄마한테 딱 맞는 거 같은데?"
"에이, 엄마는 늙어서 그런 거 못 입어."
그런데 그때.
"어···?"
어머니의 발길이 멈추는 곳이 있었다.
[Vuitton Louis]
비통루이.
에르메스, 샤넬과 함께 3대 명품 브랜드로 통하는 브랜드로 에르메스, 샤넬, 구찌, 프라다 등과 함께 ‘명품’이라는 단어의 기본을 만들어 내는 프랑스 혈통의 명품 브랜드였다.
그중 어머니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모던한 디자인의 쉬폰 드레스와 스커트. 그리고 브랜드의 이니셜이 박혀 있는 화려한 핸드백이었다.
"왜요? 저게 마음에 드세요?"
내가 슬쩍 묻자 잠시 넋을 잃고 옷과 가방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어? 어어. 아니야. 엄만 저런 옷 안 좋아해······."
아무래도 매우 좋아하시는 거 같다.
나는 그길로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비통루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구경만 하는 거예요. 구경만."
그러자 처음엔 잠시 머뭇거리던 어머니도 이내 못이기는 척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엄마 이거 맞죠?"
"어. 어어. 이게 그나마 제일 괜찮네."
어머님 말과 표정이 다른 것 같은데요?
어머니는 꿈을 꾸는 소녀 같은 표정으로 매장에 있는 옷과 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고객님."
매장 안에 서 있던 직원들 중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단정한 옷차림과 이쁘장한 얼굴. 하지만 매력적인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표독스러운 눈빛.
나와 어머니를 향한 그 눈빛을 보자 갑자기 머릿속에 한 가지 그림이 그려졌다.
‘에이, 드라마도 아니고··· 설마 우리한테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니 나가라는 말을 하겠어?’
그러나 그 순간.
"고객님. 저희 매장은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말이 직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거참 진짜. 식상하게.’
어이없는 마음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마친 직원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