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거부할 수 없는 제안 (3)
정 회장과의 대화를 마친 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무엇일까?
어떤 방법으로 정 회장은 김영삼 대통령을 설득하려는, 아니 김영삼 대통령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려는 것일까?
분명 정 회장이 우리나라 재계 서열 1위, 현대의 창업자이자 실질적인 주인이라곤 하지만 상대가 현역 대통령인 이상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속된 말로 찍고 때리면 맞는 것이 현재의 기업과 권력의 상황인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권력과 기업의 관계란 악어와 악어새, 상부상조하는 관계였지만, 문제는 현재 정영주와 김영삼의 관계가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정 회장과 김영삼 대통령이 맞붙었던 ‘1992년 대선’
대선을 앞두고 서로 음모를 꾸미고, 그를 도청하던 ‘초원 복집 사건’
대선이 끝난 뒤, 보복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일으킨 ‘현대그룹에 대한 표적 수사’
권력을 둔 두 사람의 행보가 서로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 낸 것이다.
때문에 약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 회장은 진지한, 아주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자신을 믿으라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혹시라도 정 회장이 잘못 생각했다면.
김영삼의 정 회장에 대한 분노가 내 생각보다 더 깊고 또 깊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정영주와 김영삼 간의 거래. 나와 김영삼 사이에는 김귀란이란 커다란 방파제 하나가 더 있는 셈이었지만, 바다와 해변의 관계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면 해변이야 어찌 됐든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만 할까?
어떻게 해야만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까?
뭐 간단하지.
돈.
누구보다 더 많은 돈.
위기가 닥쳤을 때 쓸 수 있는 돈.
그리고 그를 통해 나의 사람들을 쌓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위기가 닥쳐 오더라도 버티고 나아갈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정 회장과의 만남이 끝난 다음날부터, 이어진의 사무실에 거의 살다시피 하며 단기간 수익이 날 만한 주식들을 위주로 매수와 매도를 반복했다.
[한성건설 10,540 ▲ 240]
[삼성전관 14,430 ▲ 657]
[제일모직 13,900 ▲ 436]
[세한미디어 3,793 ▼ 170]
[현대전자 14,233 - 239]
“아저씨. 저번에 샀던 대한중석이랑 비료 주식은 다 정리했죠?”
“어. 저번에 다 정리하고 자투리 조금 남았는데 그것도 정리할까?”
이어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싹 다 정리해 주세요. 그런데 삼성전관이랑 제일모직 이거 아직도 올라가고 있네요?”
“아 그거 외국인들이 레이져 쏘더라. 이번에 한국비료 입찰한 걸 기대하는 것 같은데?”
흐음 그래?
“올라갈까요?”
“올라가지. 그런데 오래 붙어 있을 만한 곳은 아니야. 어깨에 팔아야지.”
“타이밍을 잘 봐야겠네요. 그나저나 현대건설은 왜 갑자기 죽었어요?”
“아, 거기 쭉 올라가고 있었는데 메릴린치에서 또 단타로 물량 쏟아내더라고. 걔들은 맨날 그러더라.”
메릴린치라. 증권가에서 멸치라 불리며 물량 쏟아내기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물 타고 초 치기로.
“보아하니 새한미디어 쪽은 개미들 털어 내는 것 같은데 맞죠?”
“오, 이제 그것도 보이나 봐? 맞아. 아마 조만간 쭉 올라갈걸?”
“그럼···?”
“그래 적당히 묻어 들어가야지. 타이밍 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수대교 붕괴.
국가 수도의 대동맥 중 하나가 뚝- 하니 부러지고 마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기 전, 최대한 많은 총알을 쟁여 두는 것이 필요했다.
“지금 투자하는 돈들, 10월 10일 이전까지 무조건 정리해야 해요.”
“수익이 나고 있는 것들도?”
“네. 저번에 포철, 삼전, 현대차, 한성유통을 제외한 모든 주를 정리해 주세요. 깨끗하게.”
그런데 그렇게 성수대교의 붕괴를 기다리며 이어진의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갑작스런 소란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니 이게 정말이야! 염병··· 더러운 놈들!”
“전대갈이나 김영삼이나 똑같···!”
“에이 다들 진정들 해! 아직 모르는···.”
창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들. 점심나절부터 소소하게 들러오던 소리들이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이어진의 개인 사무실에서도 확연히 들릴 정도로 그 덩치를 키운 것이었다.
‘뭐지?’
일반적으로 객장이 제일 시끄러운 시간은 장이 열릴 시간과 끝나는 시간, 점심시간 나절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때문에 지금과 같은 소란은 이레적일 수밖에 없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사이 이어진 또한 이상함을 깨달았는지 슬쩍 고개를 들고 주변을 돌아보는 모습이었다.
“글쎄요? 폭락이라도 일어난 거 아닐까요?”
“이 시간에? 그럴 리 없어. 적어도 한 30분은 더 있다가 일이 터지겠지.”
이어진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래요?”
“높은 확률로. 아마 뭐 저번처럼 김일성이라도 죽지 않는 한 그럴 거야. 그런데 뭐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네가 사전에 말했지 않겠어?”
이어진이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답.
그의 말대로 김일성의 죽음 정도의 사건이었다면 내가 먼저 알고 있었겠지.
그렇다는 말은 현재 벌어진 사건, 밖에 있는 사람들의 소란을 만들어 낸 사건이 김일성의 죽음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사건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소란을 만들어 낼 정도는 되는 일이라는 거지만.’
그때.
“한번 나가 볼까?”
이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감돌고 있었다.
하긴 지난 며칠 간 미친 듯이 차트만 보고 배달 음식으로 식사를 때웠으니 이런 이벤트가 궁금할 수밖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잠시 뒤.
벌컥-
사무실 안으로 돌아온 이어진의 표정이 약간 이상했다.
살짝 찡그린 얼굴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 마치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약간은 황당하다는 생각이 깃든 태도였다.
“뭔데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어? 아 준영아. 별건 아니··· 아니 별게 맞구나.”
“무슨 일인데요?”
“그게···.”
그리고 입을 연 그의 말은 놀라웠다.
‘증권가 찌라시 #45’
[6공시절 안기부에서 운영되었던 비밀 도청팀. 속칭 ‘미림팀’이 올해 6월 부활하였음. 미림팀이 두로 하는 일은 야당 인사나 정부 고위직 인사, 여당인 민주자유당 내의 반김영삼세력, 재벌을 비롯한 각종 기업인들에 대한 도청 그리고 사찰임. 이 중 중요한 정보 같은 경우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통으로 보고되어 실제 정치에 활용되고 있으며 조직의 최고 수뇌는 이종원 정무수석과 대통령의 아들 김철현임. 그리고···]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린 도청팀을 부활, 자신의 권력유지에 사용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진짜요?”
민주투사 출신, 군부 독재를 끝내고 문민정부의 시대를 만들어 낸 사람이 전 정권이 하던 일을 그대로 답습하다니.
이어진 또한 믿기지 않았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어. 일단 찌라시가 돌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뭐 다른 뉴스들도 있긴 한데 다른 뉴스들이야 누가 이혼했네. 누가 애를 가졌네 하는 것들뿐이야.”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요?”
“글쎄? 뭐 찌라시니까 그냥 흘려듣는 게 낫지 않을까?”
뭐 하긴 그랬다.
본래 증권가 찌라시란 증권가에 돌아다니는 소문들, 그중에서도 출처가 불분명하고 기사화하기 힘든 소문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런 소문들을 다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런 것들이야 말 그대로 누군가를 음해···.
‘아···.’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정영주 회장의 호언장담과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안 좋은 소문. 서로 동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서로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는 것 같은 이 두 가지 사건. 그 사건을 한눈에 두고 보자 왠지 이 두 사건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우연의 일치, 나의 착각일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정말 정 회장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정보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한 사람 죽이는 것 따윈 일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섣부른 추측은 금물. 나는 내 추측에 확신을 가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저씨.”
“어? 왜?”
“지난 이주 동안 모을 수 있는 정보들 모두 다 모아 주실래요?”
그동안 무심코 넘겼던 정보들을 취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 주식 정보 말하는 거야?”
“전부 다요. 신문이든, 증권가 찌라시든 상관없으니 전부 다 모아 주세요.”
그리고 며칠 뒤, 이어진이 모아 준 정보들을 취합한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내가 모르는 사이, 내가 아무 일도 없는 평화로운 일상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사이. 김영삼이라는 거대한 성에 어느 순간부터 균열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증권가 찌라시 #20’
[···김영삼 대통령과 요정 출신의 A씨 사이에는 가네코라는 이름의 딸이 하나 있음.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는 이 둘의 존재를 김영삼 대통령은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지만 측근을 통해 양육비를 지급하고 있는···]
경X일보. 1994. 09, 05
[···지난 대선이 끝난 이후, 정부의 현대그룹 때리기가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다.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상대 후보로 나왔던 정영주 후보의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만 무려 1조원, 이 밖에 비물질적 손실까지 합산하면 근 3조원 가까이의 경제적 손실이···]
한X레. 1994. 09. 07
[···현직 대통령인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철현 씨의 대한 비판이 정치권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의 차남인 김철현의 경우 ‘소통령’이라고 불리고 있다며···]
한X일보. 1994. 09. 11.
[···지난 8월 21일 국보법 위반 협의로 불구속 입건된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씨와 한길사 대표 김언호 씨 그리고 그 이외에도 지난 두 달 사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 불구속 입건된 인원만 벌써 120명이 넘는···(중략)···이 같은 정부의 강경한 태도에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
.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모든 분야 모든 연령을 막론하고 스리슬쩍 흘러나오기 시작한 불만.
그리고 그 불만을 만들어 내는 어조들. 그것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거구나.
이게 바로 정 회장이 말했던 방법, 새로 판을 짠다는 말의 정체였구나.
이제서야 나는 정 회장, 그 늙은 구렁이의 노림수를 알 것 같았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의 대한 여론을 스리슬쩍 악화시켜 대통령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도청팀이나 혼외자식 같은 위험한 정보들은 최대한 뒤로 숨겨두면서 대북정책이나 구속수사 같은 뉴스들을 전면에 내세우겠지. 어차피 그런 뉴스들이야 성수대교 사건을 막는 순간 모두 다 잊혀져 버릴 테니까.’
만약 성수대교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거야 정영주 회장의 입장에서는 알 바 아닐 것이다.
봉황의 지지기반을 흔들어 놓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작금의 현대그룹에게는 너무나 많고 다양하니까.
순간,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실제 이런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겟은 내가 아니다.’
이 흑막의 타겟이 된다면 분명 두려운 일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대상은 내가 아닌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둘러야겠지.’
내 예상이 맞다면 분명 다음 페이즈는··· 전방위적인 공격.
보다 더 공격적인 논조를 통한 여론 생성일 것이다.
상대방이 내가 권한 음식을 먹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