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 298화 붕괴를 딛고 (3)
[어째섭니까!]
“어째서라니요?”
[모르는 척 하는 겁니까? 지금 신문에 쫙 깔린 마당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 소리에 라빈 골드만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걸려 온 전화, 그 전화 너머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신문이라… 어떤 신문을 말씀하시는 건지?”
[뭐요?]
“골드만의 이름이 나오는 신문만 하루에도 수십 개입니다. 전 세계로 반경을 넓히면 기백이 넘어요. 그런데 어떤 걸 묻는지 알고 대답하겠습니까?”
[……AOL의 채권 지불 유예 거절! 그걸 말하는 겁니다!]
“채권 지불 유예 거절? 아, 그것 때문이군요. 사실입니다. 저희 골드만은 AOL 같은 부실기업에 투자를 중지할 겁니다.”
[아니 왜! 사전에 협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이 있다면 사전에 저희와 상의하는 걸로….]
순간, 라빈 골드만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게 돈이 되니까.”
[뭐요?]
“자네들의 파렴치한 행위, 잘못을 숨기기 위한 짓을 밝히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지. 안 그런가?”
갑자기 바뀐 라빈의 말투, 그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쯧, 자네들은 선을 넘었어. 실패를 했으면 인정하고 커버해야지. 이런 식의 양아치 짓은 결코 환영받지 못할 걸세. 아무래도 미래가 없어 보인단 말이지.”
[……후회할 것입니다. 골드만 씨. 당신이 어떤 의도로 이번 일을 벌였든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겁니다. 당신은 지금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그때.
뚝-
라빈 골드만 그가 전화기를 끊었다.
“말이 많군.”
그러자 옆에서 그의 전화기를 받아 드는 사내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말하는 건가?”
“그래도 모건입니다. 모건 가문. 이렇게 도발을 하면….”
약간은 움찔거리는 사내의 모습, 그 모습에 라빈 골드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30년 전이었다면 내가 먼저 사과를 했겠지. 20년 전이었다면 모르는 척 잡아뗐을 거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모건은 그저 모건일 뿐이야. 지금은 갈가리 찢겨서 위명만 남은 곳이라는 말이네.”
“하지만 다른 곳들과 함께 움직이면 골치 아파질 수 있습니다.”
“자네도 내가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나스닥 버블이야 언제 터져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곳들이 힘을 합친다면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라빈 골드만, 그가 사내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될까?”
“네?”
“그들이 모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거야….”
“돈이 되니까. 자신들의 실수로 잃게 된 돈을 아껴야 하니까. 그래야만 살 수 있을 테니까.”
라빈 골드만 그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 이름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일순 말이 없던 사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라빈의 말에 동조하는 듯했다.
그러자 잠시 그를 바라보던 라빈 골드만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목줄이 조여진 상태야. 이미 조일 대로 조여져서 물불 가리지 않고 눈앞에 있는 것을 물어뜯었지. 그것이 패착일 줄도 모르고.”
“설마 그렇겠습니까? 그들 또한 나름 생각을….”
“자네는 이성적인 사람이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실수하는 것이 있어.”
라빈 골드만, 그가 사내를 직시하며 말했다.
“성과를 내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언제나 사람을 좀먹는 법이네. 그것에는 크고 작음이 없지. 그래서 이러한 실수가 나오는 것일 테고.”
그가 천천히 사내를 향해,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정보를 이야기했다.
“오늘 아침 FED의 앨런에게서 연락이 왔네. 아마 이번 일을 획책한 이들은 이번 사태가 끝난 뒤에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일순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FED의 앨런이라면 단 한 사람, 앨런 그리스펀, 이 나라 미국의 경제계를 아우르는 남자. 1987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고 있는 공포의 존재였다.
“그린스펀에게 연락이 온 겁니까?”
“그래. 이번 사태의 대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 아무렴 자네는 내가 아무런 보험도 없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나?”
“아, 아닙니다. 제가 감히….”
순간 고개를 숙이는 남자, 그를 바라보며 라빈 골드먼 그가 고개를 들었다.
“시대는 변화할 걸세. 이젠 기존의 은행들이라고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지. 누구나 무너질 수 있으니까.
“모건이… 그들이 무너지는 겁니까?”
“자네… 의외로 무서운 사람이구만.”
“네?”
“아니 말 잘 듣는 직원이 실수 좀 했다고 손발을 자를 사장이 있나?”
“그럼?”
“아마 종기 몇 개 도려내고 말겠지. 예를 들어 방금 전 전화를 건 건방진 녀석 같은.”
그러자 일순, 남자가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벌지 브래킷의 일원을 단박에 잘라 낼 수는 없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 그 안에서도 벌지 브래킷으로 대표되는 거대 은행이란 유가증권 인수, 자금 조달 주선, 인수합병 자문, 채권 발행 시 투자 주관 같은 일을 주도적으로 수행하는 키메이커였다.
그런 만큼 정부는, 이 사회는 벌지 브래킷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산업의 동맥을 잘라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이번 싸움은 적정 수준에서 멈추겠군요.”
“그렇지. 아무래도 나서서 혼란을 가중할 필요는 없으니까.”
“축하드립니다. 이 싸움의 승리자가 되셨군요.”
“아니. 그건 또 다른 이야기야.”
“네? 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꽤나 큰 수익을 거둘 겁니다. 모두가 뒤로 굴러떨어지는 판국에선 걷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나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그런데….”
잠시 그를 바라보는 라빈 골드만,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뛰는 사람 있는 것 같아서 말일세.”
그의 눈은 먼 곳,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
한 차례 굴곡을 겪은 나스닥 시장의 주가 하락, 그것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뤄졌다.
“지수 4000! 아니 3900! 아니 3800이야!”
“빌어먹을 벌써 수천억 달러가 증발했어!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고!”
“젠장! 빠져나가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 아무도, 아무도 안 사는 주식이야!”
하루에도 몇 번씩 사이드카와 서킷브레이커가 일어나고 사람들의 절규가 주식장을 가득 메우는 날이 계속되었다.
“제발 누가 사 줘!”
“빌어먹을 30%! 30% 다운이야! 이래도 안 산다고?”
공포의 도래.
마치 세기말 유행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아니 앙골모아 대왕이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사람들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쳐 나간 것이다.
“답이 없어! 미쳤어! 아무도 안 산다고!”
“50%! 50%로 가야 해!”
그러자 자연스레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던 자금, 낮은 금리와 높은 기대를 무기로 뛰어들었던 자금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며 그동안 방만하게 운영되던 기업들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기술 없이 막연한 단상을 통해 돈을 끌어모았던 사기꾼들, 몽상가들의 민낯이 샅샅이 밝혀지며 닷컴버블이라는 허황된 꿈이 깨어져 나간 것이다.
[20억 달러의 공룡, 모빌닷컴. 결국 부도로… 부실 경영과 이를 통해 매출 부진이 원인인 듯 ? 월스트리트 저널. 2000. 03. 29]
[15억 투자를 끌어들였던 택티컬닷컴의 신기술, 한 달 매출은…? 겨우 15만 2천 달러 ? 데일리뉴스 ? 2000. 03. 30]
[일렉트릭아이덴티티 주주들 경영진에 대한 불신임 의결, 매출에 대한 불만 고조 ? 허핑턴뉴스. 2000. 04. 05]
물론 그 와중에도 금융사들, 수많은 자금을 쏟아 부은 그들은 버블의 붕괴를 애써 부인하며 자신들의 손에 들린 펀드를 조금이라도 환매하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았지만, 그 또한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 단속반이 떴기 때문이었다.
‘앨런 그린퍼스 FED 의장 2000년 6월 기준 금리를 현행 6.15%에서 6.5%까지 인상할 수 있음을 시사.’
‘정부. 모건 스탠리, 도이체방크, 바클리스캐피털,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8개사에 대한 특별 감찰 실시할 것.’
‘부실 벤처기업 230개 사에 대한 조사 실시. 이 중 130개 사에서 불법 대출을 및 주가조작 의혹 발견.’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위기는 기회.
개중에는 이 기회를 통해 날아오르려는 자들도 있었다.
*
“얼마나 되죠?”
간단한 질문, 그 질문에 이어진이 가볍게 고개를 들었다.
“뭐가?”
“현재까지 모인 자금이요. 오늘부로 얼마나 모였죠?”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잠시 손을 들며 자료를 카운트하기 시작했다.
“미 본토 걸로? 아니면 다른 나라들 것까지 포함해서?”
“일단은 개별로요.”
“개별로라… 일단… 현재까지 나스닥에서 들어온 자금만 약 200억 달러. 그리고 이번 달 안으로 들어올 자금은 100억 달러 정도야.”
“전액 현금인가요?”
“물론, 주인님의 지시가 있는 만큼 따끈따끈한 현금이지. 300억 달러 중 200억 달러는 시중 은행들에서 들어온 자금이고 나머지는 골드만의 결제 대금이야.”
말을 마친 그가 나를 향해 자료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저번 달 나스닥 버블이 붕괴와 그로 인한 수익이 정리되어 있었다.
“말씀하셨던 다른 자금들은요?”
“일단 그쪽도 제법 괜찮아. 코스닥, 니케이, 영국 쪽까지 적어도 200억 달러가 넘는 자금들이 우리 손에 들어왔어. 지금도 들어오고 있고. 준영아 네가 부자가 됐다는 말이지”
그가 환희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주변을 돌아보자 다들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돈의 세례.
그것이 그들의 표정을 만들어 냈다.
“꽤나 많네요?”
“아무래도 규모가 규모니까. 코스닥이야 그렇다 쳐도 니케이 그리고 영국 증시는 그리 작은 편이 아니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분명 나스닥 증시의 파이가 가장 크긴 하지만 다른 곳들의 규모 또한 작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5년간 풍선을 만들어 온 것은 미국 증시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골드만 쪽에서 넘기기로 했던 주식들은요?”
“오일 컴퍼니들?”
“네.”
“절반. 다음은 모든 거래가 끝난 다음에 넘기기로 했어.”
“거래의 끝이라면?”
“우리가 그들에게 상품을 넘기는 날이지. 그들 또한 경계는 확실할 테니까.”
그의 말을 끝으로 나는 손바닥을 딱- 쳤다.
내가 듣고 싶었던 것들을 전부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그럼 저희가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은 현재 400억 달러, 그리고 이번 달 말로 500억 달러 정도 되는 거죠?”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데….”
“왜요?”
“혹시 너 이걸 움직일 생각이야?”
그의 시선에는 제법 많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어떨 것 같아요?”
“폭락한 시장. 손에 들어온 자금들. 뭐 그렇다면 뻔한 거겠지.”
그가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을 먹겠다는 거 아니야?”
빙고.
거참, 이제 보니 제법 감이 좋아졌다.
“눈치가 빨라지셨네요.”
“이런 일이 한두 번 이어야지. 누구 덕분에 이쪽으로만 빨라져서.”
“하하 그럴 만도 하죠. 좋아요. 그럼 첫 타겟을 정해 볼까요?”
그가 은근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해 놓은 곳이 있어?”
“물론이죠.”
나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첫 타겟은 바로….”
앞으로 몇 년 뒤, 우리 세계를 바꾸는 사람이다.
“애플, 그리고 스티브 잡스라는 물고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