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숫사자들 (1)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헤지펀드계의 전설이자 악명 높은 펀드 매니저.
국제적인 이슈가 있을 때마다 거금을 투자해 돈을 벌거나 대형 위기 상황을 남들은 이해하지 못한 기법을 통해 극복해 수익을 내는, 1992년 영국과 1995년 일본에 대규모 환율위기를 불러온 헝가리 출신의 금융 도살자.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보유 재산보다 더 많은 금액을 사회에 기부하는, 전 세계 핍박받는 인권운동가를 보호하고 부당한 권력을 비판, 억만 장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검소한 삶은 사는 남자.
때문에 조지 소로스라는 이름 뒤에는 언제나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따라다닌다.
투자의 천재이자 뛰어난 인권운동가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금융 투기꾼, 혹은 사기꾼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말이다.
하지만 그 둘 중 어느 쪽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그가 헤지펀드 업계에서 신화적인 성과를 불러일으킨 존재라는 것이다.
거시 투자학의 귀재.
남들 모두가 개별 기업이나 주식에 집중, 미래 가치를 가지고 투자를 할 때 오로지 경제 그 자체와 경제 상황의 변동에 집중하여 성공적인 투자 실적을 올린 독특한 투자자.
많은 헤지펀드들이 그를 따라 국제 정세와 경제, 환율 등 거시적 변수에 주목하여 투자를 하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그의 성공을 따라 할 수 없었다는 전설의 이레귤러.
수익률 2,300%의 스타. 월가의 유명한 펀드매니저인 ‘피터 린치’마저 ‘조지 소로스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라 평가하며 그 특별함을 공언한 존재.
철저하게 거시적으로 세계경제를 분석, 투자하여 세계 경제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인물.
그것이 바로 조지 소로스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인물이 어디에 있다고?
여기에?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이곳에?
나는 이어진의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말마따나 ‘형이 왜 거기서 나와?’라는 심정이었다.
물론 내가 일반적인 11살 꼬맹이었다면 그저 돈 많은 아저씨를 만난다는 생각에 부풀어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나는 그의 투자 기법을 이용해 수익을 창출한 상황. 순간적으로 도둑이 제 발 저린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조지 소로스. 그 사람이 여기. 보스턴에 있다고요?”
“그렇다니까? 방금 연락 왔더라. 보스턴에 왔는데 한번 만날 수 있겠냐고.”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이어진의 모습, 그것은 금융밥을 먹고 있는 투자자로서 일반적인 모습. 마치 마이클잭슨을 영접한 박진영 같은 모습이었다.
뭐 하긴 그럴 만하긴 하지. 나 또한 그의 이름을 듣자 두근거리는 심장을 감지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 분명 조지소로스 그의 접촉은 이례적이다.
그러나 나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
목계지덕(木鷄之德).
나무로 만든 닭처럼 흔들리지 않고 평정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것이 사업가, 갬블러, 큰 고기를 앞둔 낚시꾼의 마음가짐이다.
대업을 앞두고 저지르는 실수의 대부분은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데서 오는 법이다.
그러자 순식간에 흥분이 가라앉고 그 자리를 앞으로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대신했다.
그래. 이것은 기회다.
내가 맨하탄에서 끌어들인 카본 사람들도 분명 부호들, 미국에서 손꼽히는 자본가들이었지만. 조지 소로스는 말 그대로 ‘클라스가 다른’ 그런 사람. 말 그대로 뽑아 먹을 수 있는 수준이 다른 존재다.
아니 말마따나 중동의 기름 왕자님들을 제외하고 그보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선 안 된다.
생각지도 못한 대어.
고등어 낚시를 왔는데 참치가 덥석 내 낚시 바늘을 물어 버렸으니 그 물고기를 건져 올려야지.
“어디쯤 있다고 했죠.”
내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묻자 이어진이 조금은 진정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글쎄… 그게 아까 보스턴 공항에 착륙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한 10분에서 20분쯤 걸릴 거야. 아무래도 공항 수속 마치고 할 테니까.”
그래? 그렇다면 시간은 충분하다.
참치를 잡을 채비를 마칠 시간 말이다.
“잘됐네요. 일단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세요. 장소는 회의실로. 그리고 소로스와 그 측근들에 대한 자료 빨리 취합해서 가져오라고 지시해 주시고요.”
“알았어. 기본적인 사항들은 지시해 뒀으니까 우리만 가면 될 거야.”
그러자 갑자기 회사 전체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한산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전과 비교해 확실히 밀도가 높아진 그런 분위기였다.
“퀀텀 펀드 자료. 회의실로 올렸나요?”
“소로스의 가족 관계에 대한 자료! 5분 내에 빨리 정리해서 올려!”
“그 사람 음료 취향은 어떻게 된 데요?”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소로스. 퀀텀 펀드의 지배자. 우리가 수익을 본 녹아웃의 오리지날.
그러니 그만큼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 이번 건이 큰 건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이 안에 없었으니까.
“퀀텀 자료 올렸어!”
“소로스의 현재 배우자는 수잔웨버. 전 부인은 타미코 볼튼이고 알려진 자식은 4남 1녀예요!”
“음료 취향은 커피. 진하게. 예가체프로.”
그렇게 잠시 뒤.
폭풍과 같은 시간이 지나간 후.
우리 앞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투자자이자 사악한 구세주.
하지만 우리에게는 큰돈을 벌게 해 준 존재.
조지 소로스가 자리해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로스 씨. 제가 바로 오라클 인베스티드먼트의 소유주 김준영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저희 회사의 CEO 이어진입니다.”
낚시 시작이다.
* * *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커피 향기.
가벼운 초콜릿 향과 약간의 꽃냄새가 함유된 그 향기에 숨을 들이킨다.
미국에 와서 가장 좋았던 점은 내가 커피를 마시는 것에 아무도 딴죽을 걸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자유의 나라.
그 어떤 행동이라도 그 행동이 합법의 틀 안에만 있다면 용인되는 기회의 나라.
때문에 나는 한동안 미국에 와서 커피에 빠져 살았다.
그 향기, 진하디진하지만 복잡한 그 향기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커피 향기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고 짙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 조지 소로스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모습. 그것은 올해로 64세를 맞는 노년의 남자. 하지만 제법 큰 풍채와 선명한 골격의 얼굴, 예리한 잿빛 눈빛 때문에 절대로 늙어 보이지 않는 사내.
세상에서 제일가는 투자자라 일컬어지는 것에 비해 다소 평범한,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검소한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이 실감나는 옷차림의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때.
“헝가리에는 이런 말이 있지.”
가만히 커피를 음미하던 남자.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지금까지 고요히 말이 없던 사내. 조지 소로스가 불현 입을 열었다.
“어떤 말입니까?”
“커피 맛은 주인을 닮는다. 주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 집 커피를 맛보면 된다.”
오랜 시간 뜸을 들이다 말한 것 치곤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습니까?”
“그렇네.”
나는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비록 내가 헝가리의 문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나이 먹은 자들의 선문답에는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기대가 되는군요. 소로스 씨의 평가라니. 어떻습니까. 제가 당신께 대접한 커피의 맛은?”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소로스. 그가 가벼운 웃음을 입에 문 채 나를 향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복잡하네. 감추고 있는 게 많은 맛이야. 여리디여린 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안에 들어 있는 향은 제법 묵직한 것이 아무래도 품질이 좋은 원두를 쓴 것 같군. 아니면… 커피를 내린 사람의 솜씨가 좋았던가.”
그러면서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제법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눈.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의 잿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 커피를 제법 좋아하는지라 원두의 선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네.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 으레 그런 법이니까.”
말을 마친 그가 가볍게 커피 잔을 내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두 손을 그러모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인상적이었네.”
“…인상적이요?”
“그래. 사실 처음엔 맨하탄 친구들의 솜씨인 줄 알았지. 물론 이름이야 오라클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생소한 이름이었거든.”
…아무래도 얼마 전 있었던 사건. 소로스의 일본 침공에서 내가 그의 비밀무기, 녹아웃 옵션을 벤치마킹 한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뭐 이제 와서 비밀로 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사자가 직접 찾아와 이런 말을 하니 다소 기분이 묘했다.
“맨하탄에 다녀오셨군요.”
“눈치챘군. 그러네. 오랜만에 친구들의 얼굴도 볼 겸 해서 다녀왔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 일 때문에 요즘 외유를 통 못했으니까.”
말을 마친 그가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는 슬쩍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쪽 친구들이 예상치 못한 말을 하더군. 11살짜리 동양인 꼬마가 내 투자 기법을 읽고 자신들에게 투자를 권유했다는 말이었어.”
“제 이야기로군요.”
“맞네. 하하 지금에 와서 말하지만 사실 처음엔 믿지 않았네. 11살짜리 동양인 꼬맹이가 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또 5억 달러 규모의 헤지 펀드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야.”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일반적인 인식하에 11살이란 아직 청소년이라 칭하기도 어려운 나이. 만화영화에 열광하며 비디오 게임에 혈안이 되어 있는 시기였다.
그러니 직접 나를 경험하지 못한 그로서는 클럽 카본의 사람들, 나에게 투자 배팅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나라도 실제 그런 경우를 맞닥뜨리면 그리 생각했을 테니까.
‘100이면 99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조지 소로스.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그의 심경에 뭔가 변화를 줄 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생각이 변하셨나 보군요.”
내가 묻자 그가 가벼운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에 대해서 조사해 봤거든. 그 결과 알게 됐지. 맨하탄 친구들이 이야기 하던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일이라는 걸. 뭐 그렇게 되자 확인해 보고 싶더구만.”
“…무엇을 말입니까?”
“간단하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짙은 미소를 입에 올렸다.
“과연 이 사람이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