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근본(根本) (2)
얼마 전 이어진이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도대체 왜 하필 두 달이냐고.
왜 하필 두 달 뒤 꼭 그날 귀국해야만 하는 것이냐고.
그때 그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날이어야만 한다고.
그날이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왜냐하면.
“이사님, 이제 곧 성내산입니다.”
그날이 바로 나의 아버지, 한성가의 버려진 넷째, 김명우의 기일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곧게 뻗어 있는 경부 고속도로 너머, 무나 배추 같은 작물이 자라고 있는 푸른 농지의 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몇 안 되는 공장들과 다문다문 보이는 농가들, 그리고 들판 위에 꽃잎처럼 박혀 있는 비닐하우스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도착했나요?”
내가 묻자 가벼운 미소를 보이는 송승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제 막 판교에 들어섰습니다.”
“그래요?”
“네. 오전이라서 그런지 차가 그리 막히지 않더군요. 게다가… 뭐 그리 막힐 만한 고장이 아니기도 하고요.”
하긴 이 고장, 판교. 이곳이 그리 차가 막힐만한 곳이 아니기는 하지.
물론 요즘 들어 알음알음 신도시 건설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땅값이 10만 원에서 100만 원 정도로 뛰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투기 자본, 아직까지 이곳은 시골 농촌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뭐 나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만약 오늘 차가 막혔다면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아버지를 찾는다는 나의 계획, 나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4년, 아니 정확하게는 2년 만인가.’
나는 가만히 성내산, 아버지가 묻혀 있는 야트막한 산을 향해 돌아드는 차를 확인하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처음부터 이날, 이곳에 올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판교, 이곳이 나에게 그리고 나의 어머니에게 중요한 곳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이날, 이곳을 목표로 삼을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날을 잡지 않더라도 제법 괜찮은 타이밍, 괜찮은 시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들, 그 많은 날들을 뒤로 한 채 오늘, 이곳을 나의 시작점으로 잡았다.
왜냐하면 과거의 나의 약속.
그러니까 4년 전, 내가 김귀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이곳에서 연극을 했을 때, 내가 아버지에게 했었던 약속. 그것 때문이었다.
‘…당신이 떠난 날, 이곳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땐 떳떳하게, 한 치의 미혹도 없이 당신에게 보여드리죠. 제가, 당신이 이 세상에 남긴 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물론 아무도 나무라지 않고 또 아무도 보채지 않을 그런 혼자만의 약속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약속.
단 한 치의 미혹도 없이 나의 성공, 나의 현재를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겠다는 내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비록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그토록 원망하고 또 원망하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에게 아들로서 한 처음이자 마지막 약속인 만큼, 그 약속을 지킴으로써 아버지에게, 그리고 남은 어머니에게, 그리고 나에게 다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니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근본을 잊지 않겠다고.’
그리고.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그리고.
‘나를 잃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 결과. 나는 빠르게 미국에서의 일정을 모두 다 마친 뒤,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이곳 판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법 시일이 걸리긴 했지만, 뭐 이 정도면 아버지도 이해하시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에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겠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온 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림으로서 과거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 그것이 표면적인 이유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파도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정리하며 조직을 다잡을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여기서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
나는 혹시나 모를 만남, 과거 이곳에서 시작했던 만남을 생각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때.
끼익-
차가 멈춰서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차가 완전히 멈춰섰다.
“도착했습니다.”
송승우의 말에 고개를 들자 눈에 다다르는 곳, 창밖으로 보이는 성내산의 언덕 사이, 아버지의 묘소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내가 깊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았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나의 아버지, 김명우에게 그동안 내가 이뤄낸 것들을 확인하는 한편, 앞으로의 미래를 시작하는 것뿐이다.
“가죠.”
“네.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미혹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나의 전생,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실수들, 그것들을 천천히 덜어내며, 문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차의 문에 열리더니.
“준영아.”
“이사님!”
“오너!”
곧 나의 사람들. 어머니, 이어진, 레이첼 등 나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갈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준비되셨어요?”
내가 묻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나의 아버지가 묻혀 있는 대지. 성내산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지난 4년간의 시간이 발밑으로 흘러들어갔다.
**
성내산 위로 올라온 우리는 곧바로 나의 아버지 김명우의 무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후우… 도착했다.”
“고생하셨어요. 자 그럼 이제 빨리 준비할까요?”
비록 무덤 관리를 맡긴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지난 2년간 찾아뵈지 않은 만큼, 묘제(墓祭)를 시작하기 전 무덤가를 한번 정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벌써 그러지 말고 숨 좀 돌리고….”
“기껏해야 100고지도 채 안 되는 데 무슨 숨을 돌려요. 빨리 움직이세요. 허리 업!”
물론 오늘 막 귀국한 것이니만큼 무덤을 정리할 공구나 음식들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지만, 대신 우리에겐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게 뭐냐고?
뭐긴, 당연히 돈이지.
나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내가 가진 가장 효율적인 도구, 가장 강한 힘을 사용한 것이다.
“그나저나 아저씨. 사람들은 다 불렀어요?”
“물론이지. 도착하기 전에 시간 맞춰 오라고 일러뒀어.”
“얼마나 불렀는데요?”
“넉넉하게 한 30명 정도?”
“…30명이요?”
“어, 기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하는 게 좋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 지금 내 앞에는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 내가 부른 전문 인력들이 우리를 대신해 아버지의 묘소를 정리, 묘제 준비를 해 주고 있었다.
“어이 거기 햇빛 가리는 가지 다 쳐! 저쪽에 그늘 진 곳 거기도 정리하고! 어이 김씨! 산판 가져와!”
“보자 어디로 기가 흐르나. 옳지, 여기 바위가 기를 막고 있구만. 이봐들 여기 좀 와서 돌 좀 치워 봐! 맥이 딱 막혀 있잖아!”
“저쪽에 멧돼지들이 다니는 길이 있으니까 그쪽에 바위들 좀 가져다 놔요. 돼지들 길을 아주 막아 버려야 하니까.”
“야야야! 여기 뱀굴, 이거 다 막아. 여기 살모사들 나오면 땅 버린다 땅 버려”
…너무 전문가들을 부른 것 같은데?
옆을 보자 왠지 모르게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어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전문 인력들을 데려오라고 했더니 진짜 전문적인 인력을 불러온 것 같았다.
‘거참, 이건 너무 거창하잖아.’ 그치만 뭐 굳이 그들을 만류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어진이 고르고 골라 데려온 사람들인 만큼 일의 속도 하나는 정말 어마어마했으니까.
“빨리 처리하고 내려가자고! 제수 준비는 다 마쳤어?”
“10분이면 준비 끝나요.”
“좋아. 제수 준비 전까지 후딱 정리들 해! 다들 기다리고 계시니까.”
“알겠어요!”
역시 전문 인력은 인력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을 다 다른 이들에게 맡겨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묘소, 아버지가 누워 계시는 곳, 그곳에서 아들로서 가만히 앉아 남들이 떠먹여 주는 밥을 먹을 수는 없는 법.
나는 봉분 주변의 정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 채, 아버지의 무덤, 아버지가 누워 계시는 봉분 주변을 직접 소제하기 시작했다.
“봉분 쪽에 계신 분들은 물러나 주세요. 그쪽은 제가 직접 할 테니까.”
현실적인 한계가 있는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은 타인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외의 부분은 내가 직접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 도련님. 괜찮습니다. 저희가 다 알아서 해 드릴 테니 가만히 계셔도….”
“아니에요. 이 부분은 제가 직접하고 싶네요.”
그러자 손끝에 닿는 느낌.
흙의 느낌.
겨우내 마른 잔디와 잡초의 느낌이 손 전체에 느껴지더니 이내 과거, 지금과 비좡構? 아버지의 봉분에 있는 잡초를 뽑았던 것이 기억났다.
‘오랜만이네.’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 김귀란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무릎을 꿇은 채 아버지의 무덤을 소제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 것이다.
‘그땐 참 떨렸었는데 말이야.’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감개무량 순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땡전 한 푼, 정말 땡전 한 푼 없이 김귀란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불과 4년 만에 나는 그때의 김귀란이 내게 주었던 돈. 약 10억 원에 달하는 돈. 그 돈의 몇 십, 몇 백 배가 넘는 돈을 벌어들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몇 배가 넘는 돈을 벌어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과거 김귀란 앞에서 무릎 꿇어 앉아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골몰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소제하던 어린 아이는 이제 이곳에 없는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
아무튼 그렇게 나는 천천히 과거를 지워내며 아버지의 무덤을 정리했다.
그러자 잠시 뒤, 우리 앞에는 말끔한 모습, 전과 비교해 확연히 깨끗해진 모습의 아버지의 모습이 자리해 있었다.
“…….”
말끔해진 아버지의 묘소.
그 앞에 차려진 화려한 제사상.
나는 그 앞에선 채 나의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의 어머니, 검은색의 단정한 옷을 챙겨 입은 나의 어머니가 고요한 눈으로, 그리고 아주 복잡한 눈으로 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응, 준영아.”
그렇게 나의 묘제, 우리 모자의 묘제가 시작되었다.
“먼저 인사드리렴.”
“알겠어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앞으로 나선 나는 먼저 무덤 앞으로 걸어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천천히 술잔에 술을 채워 상에 올린 뒤, 뒤로 물러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일 배.
이 배.
그리고 반절.
그렇게 마지막 인사까지 올린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이제야 약속을 지키게 됐네요. 아버지.’
그러자 그 순간, 쑤욱 하고 내 속에 갇혀 있었던 무언가가 떨어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후욱 하고 숨이 복받쳐 올랐다.
“후우….”
그러자 일순 고요했던 심장이 두근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건….’
그래 아마도 그것은 나의 과거, 나의 부채, 나의 불안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합쳐 쌓인 나의 모든 찌꺼기들이 이 순간 세상으로 흩어진 것이겠지.
나는 천천히 모든 감정을 추스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나의 앞에 어머니 이외의 사람이 한 명 더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그 사람의 정체는 바로… 김귀란.
나의 할머니이자 저기 누워 있는 내 아버지의 어머니.
한성가의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