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97화 남의 돈 (2)
결국, 그들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시간은 좀 더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시간이요?”
“네. 적어도 며칠 정도는….”
아무래도 약간 시간을 번 뒤 정보를 수집, 사업의 타당성을 파악한 뒤 자금을 융통하려는 것 할 것 같았다.
“흐음….”
“……김 회장님. 잘 아시겠지만 저희에게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하긴 자금의 규모를 봤을 때 그리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한 액수가 아니긴 하지.
아무리 내 앞에 있는 자가 부행장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10억 달러는 장난이 아니니까.
물론 10억 달러를 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그들로서는 10억 달러를 빌려주었을 때의 이익 또한 포기하기 힘들 것이다.
무려 1천억 원!
1997년 현재 서울 소재 아파트 500채를 살 수 있는 자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아니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 또한 절대 포기할 수 없을 만한 정도의 금액이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이었으니까.
‘뭐 그게 다 착각이겠지만.’
때문에 나는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다 천천히 그들을 향해 미끼를 뿌렸다.
아까야 약간 그들을 다그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쫓아 버릴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며칠이라… 그 시간은 제법 비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약간의 약을 쳐서.
그러자 그들이 반색을 하며 내 말을 받았다.
“…정말입니까?”
내가 한 말의 의미는 헤아리지도 않고 숫제 자신들의 손에 이미 1천억 원이 들어왔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성급한 물고기란 제일 먼저 낚시꾼의 바늘을 무는 법이었으니까.
“정말이고 말고요. 제일은행 쪽의 사정도 있고 하니 일주일간의 유예를 두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정말 감사….”
“대신.”
“네?”
“대신 저희 쪽에서도 사항을 하나 더 붙이겠습니다.”
순간, 김덕형의 얼굴이 굳었다.
“……또 말입니까?”
아무래도 또다시 조건을 단다는 것에 경계를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일단은 그들의 경계를 푸는 것이 유리하니까.
“네. 뭐 선택은 귀측의 몫이긴 합니다.”
“……일단 들어보고 결정해 봐도 되겠습니까?”
“하하, 별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약간의 협정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러자 잠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김덕형, 그가 이내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앞으로의 제안이 결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겁이 나는군요. 혹시 그 제안을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나를 향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을 마주 보며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주어 대답했다.
“제일은행에서 가지고 있는 기업들의 채권.”
“……채권이요?”
“네. 차후 제일은행 측에서 한국 국내 기업들의 채권을 매도하게 될 때 저희에게 그 매입의 우선권, 그것을 달라는 조건입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정말 그게 답니까?”
그만큼 내가 말한 조건이라는 것이 굉장히 애매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말마따나 제일 은행 측에서 채권을 매도할 의사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 되는 제안이었으니까.
“네. 그렇습니다.”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아니 도대체 왜? 현재 저의 은행에서는 채권을 매도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그저 제안할 뿐입니다.”
앞으로 얼마 뒤. 이 제안이 가져올 폭풍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선택은 온전히 여러분의 몫이겠죠.”
그리고 그 책임까지도.
*
잠시 뒤.
“부행장님. 그럼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김 회장님. 이렇게 귀한 발걸음 감사합니다. 조만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제일은행 사람들의 융숭한 배웅을 받으며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우리가 막 제일은행 건물을 벗어났을 때쯤.
“보스.”
갑자기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사람, 레이첼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평소 나를 수행할 때엔 별말이 없던 그녀였기에 약간 의아했다.
“네. 레이첼. 왜 그러시죠?”
“…저 사람들이 과연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응?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곧 그녀의 걱정 어린 눈이 나를 향했다.
“혹시나 싶어서 말이에요.”
아무래도 그간 제일은행에 대해 조사한 것이 있는 만큼 제일은행 측에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 같았다.
“왜요? 연락이 안 올 것 같나요?”
“아뇨. 분명 보스가 자신하는 만큼 가능성은 충분하겠죠. 하지만….”
말을 잇던 그녀가 조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아꼈다.
약간의 걱정이 묻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녀의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경제와 경영에 대한 교육을 받아온 그녀의 시각에서 본다면 현재 제일 은행 측에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고 판단할 만하니까.
‘솔직히 현재 상황에서 굳이 달러를 소모할 이유도 없고 말이야.’
그러나.
“레이첼.”
“네. 보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제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조련되어 왔으니까요.”
그러자 잠시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이첼.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이 조련되었다고요?”
“네. 조련되었죠. 이 나라, 이 사회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쭉이요.”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국어책을 읽듯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먹잇감이 있으면 물어뜯어라. 걱정은 나중의 일이다. 양심이란 불필요한 것이다. 우선은 네 배를 채우고 네 욕심을 챙겨라. 1등, 1등이 중요하다.”
“그건…”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죠.”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차창을 두드렸다.
“물론 교과서 안에서야 기분 좋은 말들로 가득 차 있지만요.”
그런 뒤 슬쩍 손가락을 뻗어 점점 작아지고 있는 제일 은행의 건물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교육의 틈바구니에서 제법 위쪽에 있던 사람들이에요. 양심 따위는… 그들에게 장식, 그들을 움직이는 건 순전히 자기 자신의 욕심이죠.”
나는 가볍게 웃으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차창 밖으로 제일은행의 높은 건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니 아까 전 우리를 바라보던 김덕형의 모습이 생각났다.
분명 욕심이 가득한 표정.
우리의 앞에서는 배를 깔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머릿속 가득히 우리의 살점을 빨아먹을 생각만이 가득한 모습을 생각하자 절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아마 김덕형을 위시한 이들 모두가 저 안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겠지.’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그들의 표정을 지우며 천천히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그들은 제 제안을 받아들일 거에요. 그들이 배운 것들이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킬 테니까요.”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겠지.
그것이 더 놓은 직위든 혹은 더 많은 돈이든 간에.
그러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레이첼, 그녀가 이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렇다면 이상한데요?”
“왜죠?”
“아니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지 않을까요? 지금은 모험을 할 때가 아니라 위험을 최대한 완화 시키고 피할 때라는 것을요.”
그녀의 의문은 상식선에 닿아있었다.
“물론 그렇겠죠.”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면한 위험이 진정한 위험이라고 생각된다면 말이에요.”
“그 말은… 그들에게 지금의 위험은 진정한 위험이 아니라는 건가요?”
빙고.
나는 제법 눈치가 좋은 레이첼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맞아요. 당신 말대로 현재 제일은행, 그리고 대한민국의 위기는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죠.”
“아니 왜…?”
나는 의문으로 물든 레이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일순, 레이첼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대마불사요?”
“네. 영어로는 Too Big to Fail(실패하기엔 너무 큼)이라고 하더군요.”
순간, 레이첼이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 또한 경제 공부를 한 사람인 만큼 그 의미를 파악한 것 같았다.
“설마. 국가가 책임질 거라는 건가요? 그래서 큰 위협이 아니라 생각한다고요?”
“네. 그리고 그들은 모험에 베팅을 하겠죠. 자신이 가진 돈에 위험성을 인지하지 않고요.”
“아니 그건 너무….”
“무책임하죠.”
그녀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생각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때론 코미디와 같아요. 레이첼.”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며칠 뒤부터 시작될 변화. 그 변화의 끝에는 방금전 내가 입에 올린 말이 남아있게 된다는 것을.
제일은행과 같은 은행들, 대한민국의 부를 움직이는 자들의 무지와 아집이 한국을 박살내고 수십만의 고통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하지만.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나라가 입을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책임은 그 선택과 관련 없는 은행의 고객들, 국민들이 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나는 기다릴 것이다.
“그들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우리에게 연락을 해 올 때를 말이죠.”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나는 그들의 욕심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던 돈. 치욕스런 결과 끝에 외국계 금융사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돈들을 말이다.
’그 방법이 조금 일방적이긴 하겠지만 말이야.‘
게다가.
“그리고 지금은 그런 사소한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에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자 레이첼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네? 사소한 고민이요?”
“물론이죠.”
“아니 10억 달러 가 사소하다고요?”
“하하, 크고 작은 건 상대적인 거니까요.”
“아니 그런…”
“레이첼.”
나는 레이첼을 바라본 뒤 슬쩍 창밖을 가리켰다.
“잊으셨어요?”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타겟으로 한 은행이 이곳 한 곳은 아니잖아요.”
순간, 레이첼의 얼굴이 흔들렸다.
“아.”
아무래도 이제야 오늘의 스케줄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설마 오늘 다 처리하실 생각인가요?”
“그래야죠.”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루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나는 레이첼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런 내 눈앞에, 다음 우리의 타겟들.
[조흥은행]
[상업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
이제 얼마 뒤, 과거의 영광을 모두 잃을 왕자들.
조상제한서의 나머지 멤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의 돈으로 흥한 자 남의 돈으로 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