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어머니의 이름으로 (1)
<주가 변동을 적으로 보지말고 친구로 보라. 어리석음에 동참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서 이익을 내라. - 워렌 버핏(Warren Buffett)>
*
금융실명제로 인한 혼란과 주식 폭락. 그것은 금융실명제 발표 다음날인 8월 13일과 8월 14일의 증시시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젠장, 이틀 동안 도대체 얼마나 떨어진 거야?"
"보니까 이틀 동안 59포인트는 넘게 떨어졌더라고."
"미친. 아니 올라가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는데 고작 이틀 만에?"
"···상황이 상황이잖아."
물론 은행 등 기관투자자들이 시장에 개입했으나 주가하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증권사 객장에는 투자자들의 주식을 마구잡이로 팔아 대는 투매로 혼잡을 빚었다.
"김 대리. 지금 이거 전광판 잘못된 거 아니지? 응? 아니 하한가 845개에 상한가 종목이 8개? 이게 말이나 돼?"
"빌어먹을 기관이 분명 물량을 땡기고 있을 텐데 주가가 왜 저래? 이거 잡고 있다간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여봐. 팔려면 빨리 팔아. 오늘 반장 땡 치면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할 테니."
하지만 겨울이가면 봄이 오고 전쟁이 끝나면 재건의 시간이 찾아오듯, 실명제 실시이후 첫 휴일을 지낸 다음날인 1993년 8월 16일.
주식시장은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른 충격이 다소 진정된 가운데.
외국인 투자한도 조기 확대.
증시안정채권 3조원발행.
연기금 등 기관의 장세개입 강화 등의 정부의 부양책 마련에 대한 기대감이 증폭되면서 주가가 큰 폭으로 반등했다.
[삼성전자 22930▲1430]
[포스코 24,531▲1531]
[현대자동차 20290▲1270]
[아주라테크 4,50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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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8월 16일 종합주가지수는 전일보다 25포인트 오른 691로 마감.
거래 종목 추이도 상한가 794개 하한가 81개로, 전 주 마지막 날인 8월 14일에 비하면 천양지차의 온도차를 보여 주었다.
주말의 마법, 혹은 현자타임.
금융실명제라는 거대한 공포의 그림자가 벗겨지자 주식판을 기웃거리던 자금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그렇지 김영삼이가 배냇병신도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시작했겠어?"
"이거 오늘 장 시작하자마자 바로 오를 거 같은데? 어때?"
"오르겠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팔지나 말걸. 괜히 병신처럼 뇌동해서··· 쯧."
덕분에 내가 사놨던 주식들 또한 눈에 띄는 상승세로 돌아섰다.
[세풍 26,700▲1550]
[삼표제작소 5800▲300]
[봉신 10,500▲650]
[미래와 사람 4,07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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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이틀, 시간으로 따지면 50시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앉아서 3억 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하하 이틀 만에 3억이라니 이거 대박인데요?"
"그렇지? 이야. 요즘만 같았으면 금방 부자 될 것 같다니까? 준영이 넌 이런 정보 어떻게 안 거야?"
"알고 싶으세요?"
"그럼. 진짜 요즘 같으면 너한테 신기 있다는 말도 믿을 것 같아."
"노오력을 하면 우주의 기운이 도와줘요."
"응? 우주의 기운? 그게 뭐야?"
"하하 그런 게 있어요."
뭐 이 당시 가격제한폭 6.7퍼센트만 아니었다면 더 많은 돈을 벌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상승세가 이달 말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그리고 금융실명제의 전면적인 실시로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대한 신뢰도가 향상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 또한 늘어난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은 3억 원 정도의 수익에 불과하겠지만 앞으로 몇 년 동안 어마어마한 수익이 들어올 것이었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갈 곳을 잃은 지하자금이 증시로 유입되기도 할 테니. 당분간 주가가 떨어질 일은 없겠지.’
때문에 나는 조금은 흥분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금융실명제를 성공적으로 넘어섰으니 조만간 다음 계획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내일부터 준비하라고 말해 둬야겠구만. 이어진 그 사람도 이제 큰물에서 놀 때가 됐으니까.’
그런데 내가 막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들어섰을 때. 내 눈에 묘한 광경이 포착됐다.
서울시 성북구 미아동.
아래에서 보면 어떻게 올라가나 한숨이 나올 정도의 굽이진 언덕 위쪽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런 세단 5대가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설마 벌써?’
차들을 본 순간부터 발걸음이 빨라졌다.
벌써 몇 번이나 본 광경이니만큼 누가 온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지만, 그 타이밍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오늘은······.
‘어머니가 일찍 집에 돌아오시는 날이니까.’
나는 날듯이 실내화 가방을 흔들며 골목을 올라갔다.
그러자 헉헉- 밭은 숨이 차올랐다.
10살의 나이 치곤 제법 체력이 좋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이 빌어먹을 달동네는 그 체력마저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숨을 헐떡이며 집 앞으로 다가가자 곧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귀란이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나와 함께 한성호텔로 향했던 한규선이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내가 다가가자 다른 직원들과 함께 서 있던 한규선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과거 삼촌이라 부르라 했을 때와는 다른 공손한 태도였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규선 삼촌. 설마 회장님 오신 거예요?"
"예. 안에서 어머님과 대화중이십니다."
젠장,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와 할머니인 김귀란의 관계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기에 긴장이 됐다.
설마 뭔가 막 날아다니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하호호 할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집 안쪽 슬쩍 은솔 놈이 긴장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나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월세 방 앞쪽 문에 장승처럼 서 있는 전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전진호에게 인사를 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작은 반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본 채 앉아 있는 어머니와 할머니. 그래. 김귀란의 모습이 보였다.
후욱-
나는 긴장 어린 숨을 뱉으며 땀을 훔쳤다.
그러자 어머니와 김귀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왔느냐."
"네. 안녕하세요."
어머니의 앞이니만큼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슬쩍 웃음을 보인 김귀란이 어머니가 내온 것이 분명한 차를 한잔 마시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런데 이거 어쩌냐. 이 할미랑 너희 엄마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깐 나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뭐?
둘이 이야기를?
평소 어머니와 김귀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나로선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시츄에이션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머니를 바라보자 웬일인지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어···?
이렇게 된 이상 김귀란의 말대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몹시 걱정이 됐지만 어머니도 승낙한 이상 강짜를 부릴 순 없는 일이니까.
"···알았어요."
"그래. 가만히 기다리는 것도 못할 짓이니 밖에 있는 아저씨들한테 말해서 햄버거라도 먹고 오거라. 진호 아저씨 알지?"
그렇게 밖으로 나온 나는 의문어린 눈으로 어머니와 김귀란이 들어가 있는 집의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려는 거지?’
***
준영이 밖으로 나간 후.
"벌써 10년이나 지났구나."
김귀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준영의 어머니, 최선영이 다소곳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이랑 같이 뵈러 갔을 때가 마지막이니 그쯤 되었을 것 같네요."
10년 전, 결혼 문제로 허락을 받으러 갔을 때 문전박대를 당한 이후로 서로 처음 보는 자리.
근 10년간 아무런 연락이 없던 사이라 그 둘 사이의 분위기는 엄청나게 삭막했다.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생각해 보니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어. 생때같은 내 자식을 웬 어떤 여우같은 것이 훔쳐 갔거든."
김귀란이 비틀린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러자.
"···여전하시네요."
최선영이 마른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을 향해 김귀란의 눈빛에서 오래된 적대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최선영의 모습을 김귀란이 고요히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들었다. 지금 옷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고?"
"네. 동대문에서 일하고 있어요."
"한 5년 정도 되었다지?"
"···알고 계셨군요."
지난 10년간 아무런 연락도 없었기에 모르고 있을 줄 알았다.
최선영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김귀란을 바라보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려 주는 놈들이 있으니까. 그래 동대문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게 힘들지는 않느냐? 내가 알기로 옷 장사라는 게 품만 많이 들어가고 마진도 그리 크지 않다고 들었는데?"
김귀란이 슬쩍 말꼬리를 높이며 최선영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최선영이 슬쩍 김귀란의 날카로운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정도의 돈은 벌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5년이나 하다 보니 나름 재미도 있고요."
그녀의 말에서 김귀란에 대한 경계가 묻어났다.
"쯧, 그리 경계할 필요는 없다. 같은 여자끼리 아니냐. 나이 스물, 한창 때 나이에 애 엄마가 되서 10년간 일만 했다니 어지간한 여자들이었으면 못 했을 일이지."
"···죄송하지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10년 만에 갑자기 찾아와서 하실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경계어린 최선영의 말에 김귀란이 슬쩍 입을 비틀었다.
"내가 준영이 놈과 만났다는 건 알고 있지?"
"네. 들었어요. 명우 씨 생일에 오셨었다고. 그리고 저번에도···."
"그래. 처음엔 명우 놈 생각도 나고 해서 잠깐 들렸던 거였지."
고개를 끄덕이던 김귀란.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내가 오늘 너랑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너한테 한 가지 제안을 할 게 있어서다."
"···제안이요? 저한테요?"
"그래 너한테. 그러니 신중히 생각했으면 좋겠구나. 너의 인생은 물론 네 아들의 인생까지 바꿀 수 있는 제안일 테니까."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없었던 일. 최선영의 눈가에 의심이 감돌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김귀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걱정이 되겠지. 그래. 네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굳이 말하자면··· 그래. 너에 대한 나의 호의다."
예상치 못했던 말에 최선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호의요?"
김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를 인정하지는 못하겠지만 내 자식의 혈육을 10년이나 키웠으니 할머니로서 상을 줄 수 있는 거니까."
순간, 최선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 그것을 칭찬하고 상을 주겠다는 것. 그것은 최선영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거라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준영이를 키운 건 어머··· 아니 회장님께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니까요."
최선영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다. 내가 그렇다는 거니까."
김귀란의 상대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열 뿐이었다.
"그게 무슨······."
"간단하게 말하겠다. 준영이 저 녀석. 내가 키우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