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엔젤 투자자 (3)
내가 말을 마치자 사람들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 조건이라는 게 정말 그게 다야? 아니 답니까?"
"네."
다들 내가 이런 조건을 내걸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표정들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세상 어느 사업가가 ‘니들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조건을 붙이겠어.
‘그것도 억 단위의 돈을 주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나는 다르다.
왜냐.
그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나는 알고 있으니까.
나는 멍하니 벌어져 있는 사람들의 입을 확인하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투자하겠다는 돈. 1억 원이라는 돈이 사업을 하다 보면 그리 큰 금액이 아닐 거라 여겨지실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 그들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 내가 투자하겠다는 1억 원이라는 돈이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사업을 하다 보면 예상보다 더 빨리 사라질 돈이라는 것을.
"···하지만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회사가 커지는 만큼 저도, 저의 지원도 점점 더 커져 갈 거예요. 지금은 비록 한성가의 막내 손자에 불과하겠지만··· 언젠가 저는 제 손안에 한성이란 이름을 손에 넣을 테니까요."
나는 손을 꽈악 움켜잡으며 말했다.
그리곤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확실해요. 전 그렇게 될 거에요. 그리고 전 거기서 멈춰 서지 않겠죠."
나는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쳤다.
말이 없는 그들.
확신했다.
분명 어린 나이지만 나는 그들을 압도했다. 돈과 자신감. 그것이 나의 원천이고 그들에 대한 나의 증거였다.
"그러니까 여러분. 제가 드리는 선물을 받고 저의 옆에 설 만한 사람들이 되어 주세요. 제가 당신들의 투자자. 그늘이 되어드리죠."
김경주, 이해진, 송현재, 이상범.
분명 한 명 한 명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 잠재력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 분명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이란 언제나 활자로 만들어진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이라면 내가 그들을 품안에 품고 보다 더 큰 날개를 달아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큰 날개는 나를 내 몸을 날아오르게 만들 수 있겠지.
그러자 잠시 말이 없던 그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대화를 하던 그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 좋습니다. 그대로 좋은 기회. 좋은 선물이니까요. 투자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순간, 부르르 심장이 떨리는 느낌. 척추 가장 아래쪽에서 머릿속까지 전기가 찌르르 통하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사업가들이 사업을 그만둘 수 없는 건가?’
아무래도 맞을 것이다. 고양감. 계획이 성공했다는 이 감정은 내가 경험한 감정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것이었다.
미래의 재벌들.
20년 후 수조 원의 가치를 지닌 이름들이 방금 전 내 품안으로 들어오기로 한 것이다.
나는 김경주들을 바라보며 짙은 미소를 보였다. 옆을 보자 이어진이 씨익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1억 원이라니. 덕분에 이제야 뭘 좀 해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는 이제 완전히 나를 인정하기로 한 모습이었다. 하긴 겉모습 따위 1억 원이라는 돈 앞에서는 무색하다. 그것을 모르는 이었다면 알게 만들어 줬겠지.
그런데 잠시 그렇게 나를 향해 웃음을 보이던 그가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시죠?"
"아. 그게··· 후, 아까 말씀하신 조건 있잖습니까 막상 생각을 해 보니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김경주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막상 생각해 보니 뭘 해야만 할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마치 돈이라는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가 갑자기 자유를 얻어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물론 마음만 같아서는 게임을 하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이 된다.’
최대한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만 한다. 그렇게만 해도 성공이 보장되어 있을 테니까.
때문에 나는 천천히 진지한 어조로 물을 뿐이었다.
"원래는 무슨 일을 하려고 했죠?"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했는지.
그러자 김경주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게··· 원래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국내 기업들 인터넷 솔루션을 해 주거나 기업체 내부의 인트라넷을 개발하는 용역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일단 저희 네 명 다 서울대, 카이스트라는 학벌이 있으니까 계약이야 발품 좀 팔면 될 테고 능력도 있으니 밥 벌어먹을 순 있겠다 싶었거든요."
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직은 정보화 시대의 극초기. 인터넷이라는 말은 널리 상용화되어 있지 않고 PC통신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니 이런 시기, 카이스트라는 이름은, 그리고 그들의 능력은 밥벌이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렇죠."
"네. 그런데··· 막상 또 이렇게 투자를 해 주시겠다는 분이 생기니 고민이 되네요. 솔루션 업체면 돈을 벌수 있다 생각하긴 했지만 또 그게 좋아서 하는 일이냐 물으면 그건 또 아니라···."
"그 말은··· 원래는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요?"
"···네. 사실 저희가 처음 처음에 이야기 했던 사업은 다른 사업이었거든요. 인터넷 솔루션이야··· 현실적으로 택한 선택지였구요."
"그게 뭐죠? 원래 구상하시던 사업이란 게?"
그러자 김경주가 약간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좀 부끄러운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답을 재촉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그들의 성공을 불러올 수 있었다.
"이 세상에 부끄러운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불법적인 일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뭐죠? 원래 하시고 싶었던 일이?"
그러자 잠시 주저하던 그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게··· 그러니까··· 후, 게임입니다."
역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아무래도 그들은 애초부터 게임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하긴 게임에 아무런 애착이 없는 사람이라면 1996년에 일본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겠지.
나는 애써 올라오는 웃음을 참으며 천천히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게임이요?"
"네. 사실 카이스트 다니는 공대생 치고 게임 안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거든요. 시간 날 때마다 교수님들이랑도 같이 하고··· 그래서 처음엔 게임회사도 괜찮겠다 싶었죠."
"그런데 왜 다른 업종을···?"
"그게··· 그걸로 먹고 살긴 힘들 거라 생각해서···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학교야 컴퓨터가 많이 있으니 그렇다쳐도 컴퓨터 없는 집이 부지기순데 이런 상황에 게임이라니. 저희가 일본 회사들처럼 게임기를 따로 만들 것도 아니니··· 아무래도 힘들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만 해도 게임이란 장르. 그래 오락이라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크고 두꺼웠다. 그러니 스스로 즐기면서도 포기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밥벌이는 다른 것이니.
그런데 그때.
"하자."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송현재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사람이라 다들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생각을 좀 해 보고···."
"왜? 방금 쟤, 아, 아니 저분 말씀 못 들었어? 하고 싶은 거 하라며? 그러니까 우리도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애초에 우리가 원래 생각하던 게 바로 그거잖아. 게임. 인경 선배도 애들 데리고 게임회사 차렸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있겠어?"
지금까지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게임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게임회사?
"게임회사를 차린 분이 계세요?"
내가 의아한 눈으로 묻자 김경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장인경이라고 선배들 중에 게임 만든다고 회사까지 차린 사람이 있어요. 작년부터 만들기 시작했으니까 아마 올해 쯤 나올 텐데··· 이름이···."
"단군의 땅. 고조선 배경 머드게임이야."
송현재의 말에 김경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단군의 땅. 원래 그 누나 게임에 미쳐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게임 무시하니까 빡쳐 가지고 회사까지 차렸죠. 애들 모은다고 교수들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그때 현재한테도 같이 하자고 했었는데 쟤는 따로 만드는 게임이 있다고 하면서 안 했고요."
"그래요?"
"네··· 하지만. 아무래도 게임은···."
나는 쿵-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 같은 상황.
나는 김경주의 말이 끊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나에게 끌어당겼다.
"좋네요. 게임."
"네에?"
"하세요. 게임 하시고 싶은 거 하시라고 말했잖아요."
갑작스런 나의 말에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슬쩍 웃어보였다.
"돈이야 얼마든지 쓰셔도 좋으니. 하세요. 무조건."
뭐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하고 싶다는데.
***
며칠 뒤.
"도착했어."
"의외로 오늘은 차가 좀 막혔네요."
나와 이어진은 또다시 카이스트로 향했다.
잠시 생각할 기회를 달라던 김경주가 다시 한번 방문해 달라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드디어 결정한 걸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안 그랬으면 우리한테 굳이 연락을 했을 리 없을 테니까."
물론 그들이 게임으로 성공할 줄 알고 있던 나로선 그들의 태도가 몹시 답답한 일이었지만, 현재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건 또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선택. 게임에 대한 열정과 나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그들은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뛰어들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니 만큼,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싶었다.
‘뭐, 이제 와서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우리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이 있는 전산실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이 고개를 숙이며 우리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이야기 한 것이다.
"하겠습니다."
바라마지 않던 결정이었기에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나저나 많이들 안 싸우셨어요?"
그러자 김경주, 이해진, 송현재, 이상범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다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뭐··· 싸우기는 많이 싸웠죠. 그런데··· 결국엔 하고 싶었던 걸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에 의견이 맞춰졌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만 하려고 저흴 부른 건 아니신 것 같은데. 맞나요?"
내 말에 김경주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살짝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 게임회사를 만들기로 한 뒤에 어떤 게임들을 만들지 팀원들과 이야기를 좀 해 봤습니다. 그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그래? 약간 의외였다. 일단은 회사를 차리는 것 자체에 집중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네."
"흐음··· 좋아요. 그럼 어떤 게임을 만들기로 하신 거죠?"
그러자 김경주가 전산실에 있는 컴퓨터에 화면하나를 띄우더니 천천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네. 일단은 지금 현재가 만들고 있는 게임. 그러니까 머드게임 하나를 만들어 보려고요."
게임의 이름은 ‘쥬라기 공원’ 1993년. 작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 머드게임이었다.
"···머드게임이네요? 이게 송현재 씨가 만들었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법 기대를 했던 나였기에 텍스트로 이루어진 머드게임에 약간 실망했다.
그런데?
"네. 현재가 만든 게임의 데몹니다. 일단 이 게임으로 회사 체계를 잡고 그 다음으로···."
뭐야 뭐가 또 있어?
내가 의아한 눈으로 김경주를 바라보자 그가 슬쩍 송현재에게 눈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송현재가 마치 반짝반짝 부담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혹시 바람의 제국이라는 만화 들어보셨어요?"
알다뿐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