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어머니의 이름으로 (2)
뭐?
문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
김귀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를 키우겠다.
할머니로서 그리고 한성의 회장으로서 나를 맡아 키우겠다.
그 말은 곧 나를 한성가 안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진배없었다.
순간, 전기가 파르르 몸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김귀란이 나를 인정한 것인가.
이제야 비로소 김귀란이 나를 진정한 혈육으로 인정, 나를 후계자로 키울 생각을 하게 된 것인가.
새삼 그 동안 갖은 눈치를 보며, 어울리지 않게 10살 꼬맹이의 모습을 획책하며 김귀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들이 생각났다.
"아저씨도 아시고 계셨어요?"
내가 고개를 돌리며 묻자 내 옆에 서 있던 남자. 전진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오. 몰랐습니다."
방금 전 내가 밖으로 나온 뒤 문 안쪽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을 때 보았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전혀요? 전혀 몰랐다는 말이에요?"
"네. 회장님께서는 자기 속내를 밝히시는 분이 아니라서요."
하긴 그랬다. 그동안 봐온 김귀란이란 사람은 독고다이.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쉬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최측근에게까지 비밀로 한다라. 아무래도 나를 키우겠다는 그녀의 결정에는 약간의 즉흥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금융실명제의 타이밍을 알려 준 것이 주효했겠지.’
아무튼 갑작스런 상황이지만 그동안 한성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나로선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었다.
본디 공성전이 그러하듯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 그 반대의 것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을 테니 주의해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나를 김귀란에게 보낼 리 없다는 것.
이날 이때까지 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가 나를, 지난 십 년간 연락도 없다가 불쑥 찾아온 시어머니에게 보낼 리 없다는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김귀란이 내가 어머니를 만나는 것을 막는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자신을 거부한 시어머니, 매몰차게 자식마저 내버린 시어머니에게 아들을 내놓기 싫을 테니까.
물론 제일 좋은 그림은 김귀란과 어머니가 서로를 인정, 둘 사이의 모든 앙금을 씻는 것이지만.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겠지.’
지난 10년간 쌓이고 쌓인 먼지가 이미 한 자(尺).
그 둘의 관계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존재인 아버지가 부재한 만큼 그 둘 사이에 앙금이 해소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해소는커녕, 이번 일로 더 쌓일 가능성이 높지.’
때문에 나는 문 앞에 서서 어머니를 설득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만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을까?
저번처럼 어머니와 성적으로 딜을 해 볼까?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번 일이 장난도 아니고.
그럼 김귀란에게 어머니도 같이 살자는 말을 해 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어느 쪽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지? 김귀란 성격이면 어머니가 거절해도 무조건 밀어붙일 텐데.’
그러나 잠시 뒤.
나는 나의 모든 걱정이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받아들이겠느냐?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잠시간의 대화 후 김귀란이 어머니에게 선택을 종용하자.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어머니가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
김귀란과 그녀의 수행원들이 떠나가고 난 뒤.
나와 어머니는 정말 오랜만에 외식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장소는 집 근처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베니건스’
과거에는 돈이 없어서 지금은 바빠서 가볼 기회가 없던 곳이다.
미아동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운 외관을 하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다소 세련된,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다소 촌스러운 유니폼을 입은 젊은 서버들이 나와 어머니를 안내했다.
"준영아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엄마가 다 사 줄게!"
어머니가 두둑한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알고 보니 어제가 바로 어머니의 월급날.
지난 한 달 번 돈으로 맛있는 걸 사 주고 싶으신 것 같았다.
물론 어머니도 내가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저번에 백화점 사건 이후 나에게 절대 돈을 쓰지 못하게 하셨다.
아무래도 부모로서, 지금까지 나를 키워 온 어머니의 자존심인 것 같았다.
"엄마가 사 주는 거면 다 좋아요."
내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하자 어머니가 애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호호 도대체 누구 아들이 길래 이렇게 예쁜 말을 하지?"
"당연히 엄마 아들이죠."
"그렇지? 엄마가 잠깐 깜박했었네? 우리 이쁜 아들."
그리곤 파스타며, 스테이크며, 몬테크리스토라 불리는 기름진 샌드위치까지 한 상을 시켜 나에게 하나하나 먹여 주기 시작했다.
"준영아 이거 한번 먹어 봐. 블루베리 소스를 올린 스테이크래!"
"준영아 여기 파스타도 있어!"
"준영아 샌드위치도 한번 먹어 볼래?"
평소 기름진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기에 어머니의 음식 러쉬가 약간 곤혹스러웠지만 어머니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여 두말하지 않고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엄마도 좀 드세요."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우리 아들 먹는 모습만 봐도 좋아."
"아니 그래도···"
"아하하 준영아 여기 100% 생과일 주스래! 이거 한번 먹어 보자! 여기요!"
그렇게 식사가 슬슬 마무리되어 갈 즈음, 나는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 그릇을 밀어내며 천천히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평소와 같은 맑고 아름다운 얼굴. 나를 향한 애정만이 가득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지난 생 37년간 보아온 어머니의 모습. 그녀의 표정 안쪽에는 분명 평소와는 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응? 왜 준영아? 혹시 모자라니? 더 시켜줄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천천히 어머니의 눈을 마주보았다.
"···정말 허락하실 거예요?"
"···뭐가 말이니?"
"저 할머니 댁에 보내는 거요."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표정. 찰나의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많은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놀람, 당혹, 슬픔, 애정, 자괴.
그렇게 한동안 식탁보를 만지작거리던 어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들었니?"
설마 내가 들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다.
하긴 어머니가 김귀란의 말을 수락하는 것만 듣고 슬쩍 문밖으로 나와 있었으니 예상치 못하셨겠지.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죄송해요."
"아니야. 엄마가 더 미안하지."
어머니가 처연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준영아."
"네. 엄마."
"후··· 그러니까 엄마는 우리 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어머니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곤 많은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달싹이는 입술.
목이 멘 듯 살짝 숨을 몰아 내쉬던 어머니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후우··· 준영아··· 준영이도 크면 알게 되겠지만 사람마다 보고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차이가 있어. 그런데 엄마가 준영이한테 보여 줄 수 있는, 그래. 만들어 줄 수 있는 선택지는 너무 적어."
아.
순간, 나는 어머니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처음 어머니의 말을 들었을 때 약간이지만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으로는 어머니를 설득할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설마 어머니가 김귀란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보내실 리 없다.’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김귀란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약간이지만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어머니의 나이 서른.
지난 10년간 나를 키우신 어머니.
어머니에게 나는, 나란 사람은 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그랬는데······.
이제 보니 어머니는 나의 미래.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포기하기로 하신 것 같았다.
그동안 그저 발랄한 줄만 알았던 서른 살의 어머니.
그녀는 내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었던 것 것이다.
나는 말없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씁쓸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하지만 아들에게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려는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말을 잇는 것이 보였다.
구구절절히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
모자(母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나를 뒤흔들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준영이가 할머니를 따라가서 보다 더 많은, 그리고 보다 더 넓은 선택지를 가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할머니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
말을 마친 어머니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이내 붉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엄마한테 실망했니?"
분명 내가 실망했으리라, 자신을 탓하리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만약 내가 어린아이라면 그랬다면 그녀의 생각대로 칭얼거렸을지 모른다.
조금 영악한 아이라면 어머니를 탓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머니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7살의 김준영.
나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 뿐이다.
"아뇨.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엄마."
왜냐하면 그녀의 선택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준영아··· 엄마는···."
"괜찮아요."
나는 잘게 떨리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곤 천천히 어머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내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
*
한성가로 향하는 자동차 안.
"정말 의외지 않나?"
김귀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전진호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준영 도련님의 어머니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제 막 미아동을 벗어난 상황. 김귀란이 말하는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귀란이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녀석 어미 말이야."
김귀란의 최선영의 얼굴을 생각하며 말했다.
사실 처음 미아동에 올 때부터 그녀는 김준영을 데려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10살이라는 어린 나이. 하지만 10살이라고는 볼 수 없는 영악함.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보력까지.
김준영의 재능을 더 이상 달동네 같은 곳에서 썩힐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용인지 뱀인진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싹수는 충분하다. 키워 볼 만한 가치가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준영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강압적으로 부모에게서 자식을 빼앗으면 김준영, 그 영악한 것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다른 놈이면 모르지만 그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테지.’
때문에 그녀는 약간의 함정을 파기로 했다.
일단 김준영의 어머니인 최선영에게 제안을 던지고 그녀가 거절하고 나면 법적, 경제적 압박을 통해 최선영 쪽에서 준영을 맡기겠단 소리가 나오게 만들기로 한 것이다.
‘제 입으로 자식을 보낸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나중에 다른 말을 할 수 없겠지.’
그런데?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선영이 그녀의 제안을 턱하니 수락해 버리면서 김귀란의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져 버렸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선영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김준영을 데려가는 것이 김귀란의 요청에 의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거기다.
‘···대신 절반만이에요. 일주일에 삼일은 저희 집에서 지내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면 회장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타이밍 좋게 최선영이 조건을 걸어버리면서 김준영을 완전히 한성가의 사람으로 만들려던 김귀란의 생각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 요망한 것이 그런 조건을 걸 줄이야."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김귀란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무리 준영의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크다고 하더라도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질 테고 그렇게 되면 김준영과 최선영과의 관계 또한 서서히 끊기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최선영과 김준영의 관계가 끊어질 리 만무했다.
"영악한 것. 이제 저도 어미가 됐다는 겐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10년 전, 김귀란이 최선영을 보았을 때에는 그녀는 세상물정 모르는,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감정에 휘둘리던 어리숙한 계집에 불과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최선영은 어린 아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죽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과거 최선영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김귀란으로서는 다소 놀라운 결과였다.
"왠지 그 녀석을 만난 이후로 이런 적이 많은 것 같구만."
김귀란이 김준영의 해맑을 얼굴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하지만 전진호는 놀라고 있었다.
천하의 김귀란, 그녀의 입가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