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목돈마련
자본주의(資本主義).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
각종 검색엔진이나 사전을 검색해 보면 수십 줄이 넘는 설명이 붙어 있는 이 체제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돈은 인류의 신이다.’
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간다운 삶을 사느냐 아니면 애완동물보다 못한 삶을 사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그 어떤 숭고한 의지도, 고결한 인성도 결국엔 모두 다 돈이라는 권력의 종속된 치장, 하수인에 불과하다.
당신의 삶을 연명케 해 줄 양식과 마른 목을 적셔 줄 물.
헐떡거리는 숨을 진정시켜 주는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의 손에 들려있는 돈인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그래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충분한 액수의 돈을 벌어야만 한다.
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 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듯, 돈은 벌기 어렵다.
1993년 대한민국의 최저시급은 1,003원.
한 시간 동안 빡세게 일 해봐야 1,600원짜리 자장면 한 그릇, 1,300원짜리 햄버거 하나 사 먹기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컵라면 아니면 도시락.
이런 세상에선 1억 5천만 원을 호가하는 은마 아파트는 언감생심. 붉은 벽돌로 지어진 20년 된 다세대 주택도 감사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물론 이론적으로야 149,551시간, 6,231일, 17년 열심히 일하면 강남 한복판에 31평짜리 은마아파트를 살 수 있지만.
웬 걸. 돈이라는 놈이 워낙 가벼워야지.
부모님의 병구완.
아내와의 이혼소송.
웬수 같은 자식새끼 교육비.
밥값, 술값, 각종 세금들과 심심하면 터지는 이런 저런 경조사들.
돈이라는 놈은 그 무슨 방랑벽이라도 있는지 손안에 들어왔다 싶으면 계속 나갈 구멍을 찾아 빙빙 돌다가 결국 앉지도 않고 나가 버린다.
그러다 보면 결국 수중에 남는 것은 달랑 동전 몇 개뿐.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건만 뒤를 돌아보면 빚, 빚, 빚, 오로지 나가야 할 돈뿐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기러기 아빠, '속물'이라 비난할 수 없는 이유 ? 프X시안. 2019. 4. 12]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그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돈은 어떻게 벌까?
어떻게 해야만 삶에 허덕이지 않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것일까?
주식? 아니 주식도 하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그럼 그 돈은 어떻게 벌어?
다들 미친 듯이 돈을 벌고, 돈을 모으고, 돈을 친구 삼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돈이라는 놈과 20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국민학교 동창마냥 영 서먹하기만 한데?
글쎄... 다른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잘 모르지만 내 경우엔 제법 간단하다.
돈이 모자라면······.
"김준영 고객님. 농지담보대출 완료되셨습니다!"
빌리면 되는 것이니까.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제법 세련된 외모의 은행원이 나를 향해 싱긋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 된 건가요?"
"네. 다 처리되셨어요."
은행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통장을 내밀었다.
나는 은행원이 내민 통장, [조흥은행 어린이 예금저축 통장]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박혀 있는 통장을 받아 슬쩍 열어 보았다.
그러자.
[예금주 김준영. 예금액 300,000,000원]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 내 눈에 들어왔다.
0의 숫자만 8개.
전생은 물론 현생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자릿수에 손발이 달달 떨렸다.
총 3억 원.
이 당시 시세로는 은마아파트 2채,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3채, 많으면 4~5채도 가능한 어마어마한 자금.
현재 15% 정도인 은행 시세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어도 1년에 4,500만 원이라는 돈이 이자로 붙는 돈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모두 다 내가 김귀란에게 받은 3만 평의 판교 대지. 그 땅의 가치 덕분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죽어라 노력해도 이 반의 반도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아마 100만 원, 200만 원에 허덕이고 있었겠지.’
나는 무겁게 느껴지는 통장을 챙기며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어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처음부터 대출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과거, 고된 노동 와중 내 고통을 달래 주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주식을 통해 거대한 돈을 벌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주식을 사자. 작은 돈이라도 몇 십 배 정도 올라가면 어마어마한 돈이 될 테니까. 그런 다음에 회사를 차리던 뭐를 하던 하는 거야.’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내 예상과 달리 1993년대 우리나라의 금융규제는 극심했고 또 그 때문에 하루 오르내릴 수 있는 주가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격제한폭 6.7%]
근 시일 내에, 그래 적어도 1997년 외환 위기가 오기 전에 자리를 잡고 싶었던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떻게 하지?’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아껴두었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내 명의로 되어 있는 판교 땅으로 대출을 받아 주식을 시작할 생각을 한 것이다.
‘지금 판교 땅값이 철원 땅값이랑 비슷할 정도로 낮긴 하지만··· 그래도 규모가 규모이니 어느 정도 총알이 나오겠지.’
물론 땅도 대출도 모두 처음 들었던 어머니가 극심한 반대를 하시긴 했지만, 이어진의 설득과 나의 간곡한 부탁으로 정말 간신히 어머니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어머님. 대출이라고 너무 위험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3억이라는 돈이 지금에야 많아 보이지만 판교 땅의 현재 가치에 비하면 30%를 간신히 넘는 돈입니다. 그러니 준영이의 미래를 생각하셔서 대출을 받는 데 동의를 해주시는 게···.’
‘그치만··· 조금 당황스러워서··· 아직 우리 애는 10살인데······.’
‘어머니 감각에 나이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룬 것이 없을 수 있고 아무리 나이가 적어도 보다 큰일을 할 수 있는 게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드님을 한번 믿어 보시죠.’
덕분에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빠르게 3억 원이라는 돈을 내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 전에 대출 문제로 시작된 이어진과 지점장의 대화가 생각보다 더 길어지고 있다.
"아 그러니까 이 대리님은 이번에 만우제강에 투자하셨다는 거죠? 허허 재미 좀 보셨겠습니다? 전 이번에 완전 막차를 타서···혹시 저도 상담 가능할까요?"
"뭐 나름 재미를 보긴 봤죠. 그런데 저도 총알이 부족해서 생각보다 큰 재미는 못 봤습니다. 상담이라면 뭐 언제든 가능하기는 한데, 본 거래는 다른 직원분 통해서 하시는 게 더······."
분명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 아까부터 이것저것 끊이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약간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저씨. 대출 다 끝났어요."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말하자 슬쩍 나를 바라본 이어진이 빠르게 지점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대화를 그렇게 했어요?"
내가 묻자 이어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냥 고객 한 명 늘어날 뻔 했지 뭐. 다른 사람에게 튕기긴 했는데."
아무래도 돈 냄새를 맡은 은행장에게 걸렸었나보다.
"그새 영업을 하셨어요?"
"습관적으로 그만."
그가 머쩍은 미소를 보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어보였다.
"영업맨은 고달프겠네요."
그러자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니지. 내 고객은 앞으로 너 하나뿐일 테니까."
"그게 더 고달플걸요?"
"······어우, 야. 겁주지 마."
그렇게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은행을 나섰다.
그런데 우리가 막 은행을 벗어나 대로로 나왔을 때쯤, 앞서가던 어머니가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엄마 왜 그래요?"
"에휴,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서 그래."
아무래도 막상 대출을 받고 보니 걱정이 되는 것 같다.
하긴, 어머니의 나이 이제 막 서른, 이제까지 한눈 팔지 않고 옷가게 일만 계속 해 왔던 만큼 이런 일이 낯설겠지.
대출까지 껴서 주식을 한다니, 이 당시 일반적인 어머니들의 생각에서는 우리 집 망하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을 할 테니까.
‘대부분은 그게 맞는 소리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깨작깨작 소액으로 배팅을 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 내가 벌어들인 돈은 기껏해야 88만원. 다른 사람들이 돈을 갈퀴로 쓸어 모은 것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돈이었다.
그러니 나는 대출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늘을 날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땅을 기는 것에 동의할 수 없둣. 이미 성공이 확실한 길을 두고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어머님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와 준영이가 할 투자는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일반적인 주식 투자, 그러니까 뉴스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투기성 투자가 아니니까요."
그런 내 심정을 알고 있는지 이어진이 진지한 얼굴로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긴가민가 한 표정으로 이어진을 바라본다.
"···정말인가요?"
"네. 일단 저희는 성장 가능성이 있는 회사, 하지만 현재 가치가 낮게 책정되어 있는 회사들 위주로 투자를 할 생각입니다.
기존의 투기성 투자와는 궤를 달리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수익 고위험 주에 아예 투자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또한 어디까지나 위협을 감수할 수 있는 선에서 할 테니까 저를 믿고 안심하셔도 됩니다. 만약에 준영이가 손해를 보면 저도 손해를 보게 되거든요."
사실 이러려고 그를 끌어들인 것도 있다.
1993년은 아직 보수주의가 팽배한 시기.
어린아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물론 어린아이의 능력에 대한 인식조차 2020년에 비해 협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머니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어른. 그것도 정장 입은 어린의 서포트가 필요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의 간곡한 설득이 계속되자 얼마간 긴가민가하던 어머니의 표정이 천천히 풀려가기 시작했다.
"아······."
물론 내가 아무 것도 없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무리 이어진이 설득을 하더라도 믿지 않았겠지만.
3억 원의 돈. 그 돈들이 그녀의 믿음을 가능케 했다.
"그러니까 저를 믿고 한번 기다려 주십시오. 주기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드릴 테니 걱정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고요."
이어진이 마지막 공세.
주기적 보고서라는 카드가 나오자 어머니가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에휴. 그럼 믿을게요. 이 녀석이 말 안 들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워낙 의젓한 아이라 그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순간 나와 이어진의 눈이 마주쳤다.
성공.
어떻게든 어머니라는 언덕을 넘은 것 같았다.
잠시 뒤, 어머니가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나와 이어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그제야 겨우 맘속에 있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총알도 갖춰졌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죠."
내 말에 이어진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보스."
심장이 두근-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