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벌크 업 (1)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돈은 잠들지 않는다.’
아주 간단한, 채 열 음절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문장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문장에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 돈은 잠들지 않지. 잠드는 것은 인간, 그것도 미래를 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뿐이겠지.
그러니 우리는 잠들 수 없다. 아니 잠들어선 안 된다.
돈(錢)이라는 재화.
세계를 움직이는 숫자.
그것에 휩쓸려 눈물짓지 않기 위해서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잠을 잘 수 없다.
돈이라는 놈은 잠을 자지 않음으로.
때문에 나는 내가 들고 있는 자본.
8천만 달러.
그 돈을 근원으로 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돈을 굴리기에 가장 합당한, 전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가 어디냐고?
뭐 한 군데 밖에 더 있겠어?
월 스트리트(Wall Street)!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에 위치한 금융가.
뉴욕이 아직 뉴 암스테르담이라 불리던 시절 네덜란드 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영국인들을 막기 위해 긴 목책을 세웠던 거리.
하지만 지금은. NYSE, NASDAQ, AMEX, NYMEX, NYBOT 등 미국의 여러 주요 증권 및 기타 거래소가 즐비하게 자리해 있는 곳.
1995년 기준 약 4조 달러가 넘는 시가총액과 5천만 명이 넘는 투자자수, 그리고 300억 달러가 넘는 하루 거래 금액을 자랑하는, 전 세계 금융의 심장.
바로 그곳이 바로 내가 선택한 사냥터였다.
“도착했네.”
이어진의 말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거대한 마천루, 뉴욕의 지붕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윽고 고풍스런 석조 건물들의 모습과 그 아래 분주히 월 스트리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예전에 본 풍경. 하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게요. 그래도 이젠 제법 친숙하지 않아요?”
나는 사람들의 모습, 관광객들과 딜러들일 것이 분명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거리. 세계 재화의 중심. 지금껏 제법 여러 번 이곳에 왔었지만 그때마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빌딩으로 둘러싸인 이 거리에 올 때마다 이 거리를 감싸고 있는 에너지, 사람들의 얼굴에 깃든 기이한 활력과 생동감에 절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잠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어진, 그가 피식 웃으며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뭐 친숙하긴 한데… 거참 맨날 맨하탄에 올 때마다 여기만 오니까 좀 그렇다. 뭔가 속 알맹이만 쏙 빼먹는 느낌이야.”
약간은 씁쓸한, 조금은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할 만하긴 했다.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벌써 여러 번 맨하탄에 오긴 했었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월스트리트를 제외한 다른 곳을 간 적이 없었다.
매번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택시나 차를 대절, 월 스트리트에 직행한 뒤 업무를 보고 그대로 다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사냥꾼으로선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마음만 같아서야 나도 맨하탄의 유명 관광지들, 예를 들어 세계의 유명 명품이 모여 있는 맨하탄 5번가와 현란한 야경이 인상적인 타임스 스퀘어, 영화 킹콩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부르클린 브릿지 같은 곳들을 만끽 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잠을 자지 않는 놈.
돈(錢)이라는 이 요망한 사냥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란, 기회란 흘러가 버린 뒤엔 영영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하. 별 수 있나요.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시간이 곧 금이잖아요. 다음에 올 땐 다른 곳이라도 구경하죠.”
때문에 내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나중을 이야기하자 이어진이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니가?”
…아무래도 믿지 않는 다는 듯, 표정 불신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왜요? 못 믿겠어요?”
“아이고 도련님. 그 말만 벌써 여러 번입니다. 이젠 안 속아요.”
이 사람이.
아무튼 그렇게 잠시간의 대화가 끝난 뒤, 이어진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뭐가요?”
“아니 이대로 어디로 갈 건가 해서. 혹시 곧장 거래소로 갈 거야?”
아무래도 사전에 이번 타겟이 월스트리트 그것도 미국 주식시장 전체라 말해놓은 만큼 앞으로의 일정이 궁금한 것 같았다.
물론 마음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주식 거래소로 향하고 싶었다.
본디 시간은 금(金).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월스트리트 저 안 쪽에서는 수조 원에 달하는 돈이 오가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요.”
원래 사냥이란, 완벽한 전쟁이란 그것을 시작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하는 법. 지금으로썬 사냥에 사용할 이빨이 부족했다.
8천만 달러라는 돈이 일견 많아 보일 수도 있지만 월스트리트 전체로 보면 그저 그런, 하루에도 몇 번씩 거래되는 규모의 돈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은 갈 곳이 있어요.”
일단 덩치를 키워야겠지.
***
월스트리트 안쪽으로 들어온 우리는 곧바로 뉴욕 증권 거래소 반대쪽. 월스트리트 37번가에 위치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맞겠지?”
“아마 맞을 거예요. 저번에 받은 명함에도 여기라고 나와 있으니까.”
이 건물의 최상층. 뉴욕 맨하탄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내가 찾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합니다.”
“아, 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 사람의 정체는 바로… ‘데릭 엑손’
나와 같은 클럽에 소속되어 있는 인물이자 212억 달러 규모의 세계적인 자산 운용사.
‘이스턴 트러스트 캐피털 매니지먼트(Eastern Trust Capital Management)’의 미 동부지역 최고 투자 책임자(Execution director)였다.
“오랜만이군.”
직원에 안내에 따라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데릭 엑손이 만면의 미소를 띤 채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친근한 기색으로 내게 악수를 청했다.
아무래도 그동안의 교류, 그동안의 투자에 대한 반응인 것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데릭 엑손, 그가 너털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나야 뭐 잘 지낼 수밖에 없지. 자네는 어때?”
“저야 뭐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제법 바쁘게 움직였죠.”
“이야기는 들었네. 들어보니 제법 바쁘게 움직이던 것 같더군. 들어보니 한동안 동부 쪽에서 움직였다지?”
그가 나와 이어진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거참 소문 한번 빠르네.
내가 동부 쪽에서 움직인 건 또 어떻게 알고?
하지만 뭐 비밀로 할 만한 일도 아니었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죠. 그런데 소문 한번 빠르네요.”
“돈이 붙어 있는 소문이니까. 게다가 이젠 자네도 제법 유명인 아닌가.”
데릭 엑손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유명인이라…
아무래도 저번에 찍힌 사진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하긴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되 월스트리트의 최전선, 그곳에 있는 사람이 월스트리트 저널 전면에 올라온 그 사진을 못 봤을 리 없지. 이제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이긴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현역이었으니까.
“하하 유명인이라니 이거 부담스럽네요. 그냥 우연치 않게 사진 한번 찍힌 것뿐인데.”
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가벼운, 하지만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 바닥에 우연이 어디 있겠나. 그저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 있을 뿐이지. 하지만 조심하게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는 건 그만큼 적도 많아진다는 이야기니까.”
약간의 걱정.
나는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뭐 그건 당연하겠죠. 그런 일이라면 충분히 경계하고 있어요.”
“하하 그래 자네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저 친구도 있고 말이야.”
데릭 엑손이 이어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직원이 내온 차를 마시며 가벼운 담소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사업에 대한 이야기. 내가 이번에 투자했던 회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서부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타이타닉 호 말인가? 내가 아는 그 타이타닉 호를 탐사했다고?”
“네. 4천 미터쯤 내려갔었어요.”
“…놀라운 경험이구만. 타이타닉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뭐 나름 좋은 경험이었죠.”
“그렇겠지. 그런 경험은 아무나 해 볼 수 없는 경험일 테니까.”
그리고 잠시 후.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데릭 엑손. 그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인가? 보아하니 놀러온 것 같지는 않은데?”
이제서야 본격적인 대화를 나눌 타이밍이이 온 것이다.
“월스트리트에 볼일이 있어서요.”
그러자 잠시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데릭 엑손. 그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짐작은 가네. 아무래도 투자겠지?”
“네.”
“그래 소스가 있나?”
“아니요.”
“그럼 소로스?”
“소스도 소로스도 없어요.”
그러자 일순 그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이번엔 온전한 자네의 실력이라는 말이군.”
약간 떨떠름한 표정의 데릭 엑손. 그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투자를 위해 이빨이 필요했거든요.”
“혹시 카본 사람들을 움직여 달라는 말인가?”
“그건 기본 옵션이고요.”
내 말에 데릭 엑손이 일순 고개를 갸웃 거렸다.
“기본 옵션? 그럼 다른 옵션도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다른 옵션을 입에 올릴 줄 몰랐던 것 같다.
하긴, 그의 입장에선 그 정도가 타당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뉴욕에 찾아올 때마다 나의 목적은 클럽 카본의 자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내가 그에게 원하는 것은 클럽 카본의 자금보다 훨씬 더 큰 이빨. 훨씬 더 확실한 비수였다.
“네. 물론이죠.”
“…도대체 어떤 옵션을 원하는 거지?”
“데릭이 HMC. 하버드 대학교 매니지먼트 컴퍼니(Harvard Management Company)의 사외 어드바이저 중 한 명이라고 들었어요.”
순간, 데릭 엑손의 눈이 꿈틀거렸다.
“설마 자네…….”
“네. 맞아요.”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HMC.
하버드 대학교 매니지먼트 컴퍼니(Harvard Management Company).
2020년 기준 전 세계 대학 기금 중 부동의 1위를 자랑하는 곳. 한화 40조 원에 달하는 하버드 대학교의 총 기금(endowment fund)을 투자, 관리하는 곳이었다.
“이번 게임에 그들을 초대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