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30화 새 집을 짓다 (4)
며칠 뒤.
‘대한민국 자본시장 전면개방’
‘외국인 투자 한도 종목당 50%로 확대’
‘미국 S&P사, 대한민국의 국가신용등급 3단계 하향조정 A- → BBB-’
‘14개 종금사관련 7조 3,000억 원 지원’
‘대한민국 300대 기업들 중 100개 기업 부도 위기’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IMF사태라는 거대한 암초에 걸린 대한민국호의 새로운 선장이 선출되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1997년 12월 18일 벌어진 대한민국 제15대 대선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여당의 이회창 후보를 득표율 1.6%, 표차 39만 557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된 것이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으로서 다시는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모든 기업을 권력의 사슬로부터, 권력의 비호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것입니다. 앞으로는 시장경제에 적응해서 세계적인 경쟁을 이겨 내는 기업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경제의 목적은 국민의 행복입니다. 서민의 권익을 철저히 보호하여 우리 경제가 민주적 시장경제로 발전해나가는 시대를 열겠습니다]
그러자 대한민국 전체가 소란스러워지는 한편, 미국, 일본, 중국, 유럽의 주요 언론들이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머리기사로 알렸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반 세기 만에 투표 정권 교체’ 이회창 후보 승복 ? 경X일보. 1997. 12. 19]
[칠전팔기! 네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성공! 김대중 대통령! 대한민국의 제 15대 대통령 당선! - 중X일보. 1997. 12. 19]
[‘준비된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1년 6개월 안에 IMF 체제를 벗어나겠다 약속! - 1997. 12. 19]
다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리더쉽을 통해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의 회복이 이뤄질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뉴욕타임즈>
“전 국민이 외환위기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서 비전과 리더십을 갖춘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한국 국민들에게 행운”
<월스트리트 저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선출된 것에 견줄 위대한 정치적 사건”
<쥐트도이체 차이퉁>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동방정책을 통해 유럽에서 냉전 종식의 반석을 놓았듯이 많은 한국인은 김대중 당선자가 남북한 화해의 길을 발견해 동아시아 냉전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그렇게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석하던 그때, 대한민국 경제계에도 한 가지 특이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식 들었어?”
“응? 무슨 소식?”
그것은 바로…
[오라클, 재계서열 9위의 대기업 한성의 알짜 계열사들 꿀꺽 ‘한성전자를 비롯한 4군데 계열사’ - 한X일보. 1997. 12. 20]
대한민국 재계 서열 9위 한성.
IMF로 인해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휘청거리면서 재계 서열 상승을 꿈꾸고 있는 그룹 한성의 계열사들 중 일부가 오라클, 쌍호자동차를 인수한 기업에 인수된다는 것이었다.
“뭐야? 오라클이 한성도 먹었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유통, 전자, 패션, 금융 쪽 계열사들만 넘어가는 것 같아.”
물론 일반인들, 재계의 상황에 그리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 일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넘어갈 만한 뉴스였지만, 어느 정도 선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재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신기한 뉴스였다.
왜냐하면.
“아니 그게 말이 돼? 한성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어떻게… 지금까지 한성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는 아무데서도 없었잖아.”
한성그룹, 재계서열 9위의 거대 그룹, 그 그룹이 자사의 계열사들, 그중에서도 알짜 계열사를 넘긴다는 의미는 우리나라에 또 다른 대기업, 재벌그룹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
“이봐 누이 미쳤어?”
갑자기 들려온 정영주의 말, 그 말에 김귀란이 이마를 찌푸렸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것도 모자라 대뜸 미쳤냐는 말을 내뱉는 정영주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쳐들어와선 무슨 헛소리야. 비싼 밥 먹고 노망이라도 났어?”
“아니 노망은 누이가 났지. 왜 생떼 같은 회사를 떼서 남을 줘?”
날카로운 정영주의 대답, 그 대답을 들은 김귀란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어디서 자신의 결정, 한성 전자를 비롯한 계열사들을 오라클에 넘기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 같았다.
“남이사. 그리고 입을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아니 어떻게 손자가 남이야?”
“남이지. 내 손에 붙어 있지 않으면 남이지. 맨날 그랬잖아? 내 배로 난 자식도 남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맺은 정영주, 그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눈으로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그의 표정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잠시 말을 멈춘 김귀란, 그녀가 보던 서류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정 회장. 꽤나 한가한가 봐?”
“한가하기는… 기아차 때문에 가뜩이나 골 아픈데. 내 누이 일 아니었으면 꼼짝도 안 했을 거야. 그러니까 말해 봐. 도대체 뭐 때문에 회사를 넘긴 거야? 아니 전자랑 유통이면 알짜잖아?”
“…굳이 알릴 만한 이유는 아닌데?”
“아니기는. 뭐야? 혹시… 무슨 죽을병이라도 걸렸어?”
“뭐?”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 아니 천하의 김귀란이가 자기 회사를 그것도 아들도 아닌 손자를 준다고? 허참 개가 웃을 일이지.”
정영주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모습에 김귀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하, 개가 웃을 일이라. 못 보던 사이 정 회장 많이 저렴해졌어.”
“거참, 웃지만 말고 말해 봐.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정영주가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동년배, 수십 년을 보아온 사이. 그 사람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잠시 정영주를 바라보던 김귀란, 그녀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정 회장.”
“정 회장이라니. 오라비한테 너무 딱딱한….”
“흰소리 말고.”
정영주의 너스레를 딱 끊은 김귀란, 그녀가 고요한 눈으로 정영주를 향했다.
“정 회장네 자식들은 어때?”
“내 자식들?”
“그래 정 회장네 자식들. 어때 잘들 해?”
일순, 질문을 받은 정 회장의 표정이 굳었다.
잘한다.
그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의문이었다.
“…….”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본 김귀란, 그녀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생각이 많은 모양이구만.”
“가볍게 대답할 수는 없지. 뭐 자식들이니까.”
“다행이구만. 그나마 생각할 여지가 있는 걸 보니.”
그녀가 단호히 입을 열었다.
“내 자식놈들은 머저리들이야.”
“…머저리들?”
“그래. 첫째 놈은 약은 척하는 멍청이고 둘째 놈은 우둔하고 욕심만 많지. 셋째 놈은 뭐 계집에 미쳐서 움직이지도 않고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 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것이 딱 집안 말아먹기 좋은 성질머리야. 그러니 머저리들이지.”
신랄한 비판.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기엔 너무나 차가운 말이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정영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창업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부족하게만 보이는 자식들. 그들에게 기업의 미래를 맡겨야 하는 그 심정을.
“…어쩌겠어. 원래 자식새끼들이 다 그런 거 아니겠나. 그러려니 하고 참는 거지.”
“그렇지. 그렇게 생각했었지.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넘기고 살려고 했어.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김귀란, 그녀의 눈빛이 일순 번쩍였다.
“…그놈이 나타났지.”
“…자네 손자 말인가?”
“그래. 내 손자놈. 그 잔망스러운 녀석.”
고개를 든 정영주의 눈에 들어온 김귀란의 시선은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정영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준 거야? 회사를?”
자신의 생각이 맞을 거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아니.”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라고?”
“그래. 준 게 아니야. 빼앗긴 거지.”
“빼앗겼다고? 누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크게 떠진 정영주의 눈, 그 눈을 바라보며 김귀란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래. 그 녀석에 내 손을 물더구만. 아주 앙칼지게 말이야.”
그녀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그날의 기억을 곱씹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정영주가 혀를 찼다.
“…그런 것치곤 표정이 나쁘지 않군.”
“이상하게 아프지가 않았거든.”
“아프지가 않아? 허 참 바뀐 건 내가 아니야 누이로구만.”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정영주, 그를 바라보며 김귀란이 피식 웃어 보였다.
“글쎄 죽다 살아나니 그런가 보지 아니면….”
“마음에 드는 후계를 찾았기 때문이던가.”
말을 이은 정영주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을 정한 건가?”
김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자식들의 반발이 심할 텐데.”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언제 그놈들 눈치를 보던가.”
그 말에 정영주,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천하의 김귀란이가 자식새끼들 우는 소리에 움직일 사람은 아니지.”
그 모습엔 김귀란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본 김귀란, 그녀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니까 미리 미안하다고 해두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말을 마친 김귀란이 탁- 테이블을 두드렸다.
“머지않아 내 손자가 자네 아들들을 잡아먹을 테니까.”
순간, 정영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현대그룹. 재계서열 1위. 1997년 기준 자산총액 50에서 60조 원에 해당하는 공룡.
그 공룡을 잡아먹겠다는 김귀란의 포부가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왜 불가능해 보여?”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만방자하구만. 이봐 누이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내가 아니었으면 크게 피곤해졌을 거야. 예를 들어… 삼성 이 회장이라거나.”
“이 회장이라… 뭐 그치는 그럴 만하지.”
김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데… 설마 이제 완전 은퇴할 생각인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회사도 넘긴다. 후계자도 찾았다 이거 완전 상왕이 되겠다는 거 아니야?”
“미쳤어?”
“그럼?”
“내가 뒷방 늙은이나 되어 차나 마실 년으로 보여?”
“……상상이 안 되긴 하지. 그럼?”
정영주의 말에 김귀란,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저 멀리 김준영의 집이 있는 곳, 그곳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올라가야지. 손자놈이 따라오는 데 잡힐 수는 없잖은가.”
“…뭔가 계획이 있나?”
“있지.”
말을 마친 김귀란이 짙은 웃음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정영주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기아를 먹어 볼 생각이야.”
순간, 정영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그런 그를 바라보며 김귀란, 그녀가 이를 드러냈다.
“기왕이면 손자 놈보다는 더 큰 걸 먹어야 하지 않겠나.”
그녀의 머릿속에 김준영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