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시한폭탄 (1)
“일본이 태국을 돕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말을 마치자 내 앞에 있는 사람,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이어진이 깜짝 놀란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전까지 일본의 침공에 대해 걱정 어린 말을 쏟아내고 있던 터라 내 말이 약간 의외였던 것 같았다.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일본이 태국을 도와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건 동남아 은행들의 자금뿐이라는 거죠.”
“아니… 정말로?”
“네. 제 예상에는요.”
나는 가볍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며칠 전, 순항 중에 있던 우리의 작전.
‘태국 외환 시장 공격 작전’
본격적으로 시작된 우리의 공격은 태국 정부의 역습을 받아 잠시 좌초했다.
한창 태국과 영혼의 한타를 치르고 있던 중 갑자기 나타난 존재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주변국 은행 3인방이 갑자기 우리의 행사에 참여하겠다며 외환을 풀어 버린 데다가 갑자기 일본까지 슬슬 참전각을 보고 있다는 소리가 흘러들었기 때문이었다.
[태국 기사회생, 말레이 싱가포르 홍콩 3국 은행 태국에 외환 지원 의사 표명 - 매X경제. 1997. 05. 20]
[급변하는 동남아 금융 정세! 태국 바트화 공격 세력에 대한 경고 ‘외환 투기 세력들 엄단하겠다’ - 월스트리트 저널. 1997. 05. 21]
[계속되는 일격! 태국 120억 달러로 바트화 매수, 바트화 가치 폭등! - 싱가포르포스트. 1997. 05. 22]
때문에 거의 승리가 가까워 오던 이번 싸움, 이번 싸움이 혼돈으로 빠져 버렸다.
물론 우리의 체력.
나와 조지 소로스, 그리고 조지 소로스의 뒤를 따르는 자본들의 덩치가 덩치인 만큼 단번에 녹다운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공포.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과 모든 자금이 자칫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공포가 슬슬 헤지펀드들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일단의 사건들이 발생하기 전까지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던 만큼 갑작스레 벌어진 사건에 이번 작전에 참여한 사람들의 멘탈이 털려나간 것이다.
‘빌어먹을… 도대체 왜 하필!’
‘이대로 유지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빠져야 하나?’
‘글쎄 아직은 좀 기다려 보자고.’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웃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이번 일, 불의의 일격으로 보이는 이번 사건 또한 내가 기억하고 있던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뭐 문제가 있다면.
“아니 준영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아? 이미 태국 재무 장관이 일본에 재무성 사람들이랑 접촉을 했다는 말도 돌고 있고….”
이렇게 사람들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거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어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그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사안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쉬이 내가 한 말을 믿을 수는 없겠지.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동안 우리가 쌓아올린 것들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뭐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은 오지 않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이어진이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 것도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과거의 기억을 다른 이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었지만, 이어진이라면 적어도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만 할 테니까 말이다.
좋아 그렇다면?
“아저씨.”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걱정을 쏟아내던 이어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어, 준영아.”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무슨 말?”
나는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는 이어진을 향해 가볍게 웃어보였다. 그리곤 천천히 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러자 짙은 걱정으로 물들어 있던 이어진의 얼굴이 일순 흔들렸다.
“어? 그 말은…?”
아무래도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 듯,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네. 이순신 장군이 하신 말씀이에요. 정확히는 금토패문에서 나온 구절이죠.”
“…그런데?”
“그만큼 일본의 뒤통수는 역사가 깊다는 이야기를 하려고요.”
내 말을 들은 이어진의 시선이 잠시 묘해진다.
아무래도 내가 어떤 의미에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았다.
“설마 너 그런 이유만으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지? 말마따나 나도 일본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물론 그건 그렇죠. 저도 단순히 그 이유 때문에 이런 판단을 내린 건 아니에요.”
“그럼?”
의아한 듯 가늘어진 그의 눈, 그 시선을 바라보며 나는 물었다.
“아저씨가 생각하시기에 일본이 태국을 돕겠다는 말을 꺼낸 이유가 뭘 것 같아요?”
그러자 예상치 못한 말인 듯 잠시 말을 아끼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야… 그게 돈이 되니까. 우리들이나 다른 투자자들과 달리 일본은 동남아에 뿌려 놓은 게 많으니까. 자기 텃밭을 망치려는 짐승을 보는 심정이겠지.”
그의 말은 사실에 닿아 있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 닿은 그 대답을 긍정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아저씨 말씀대로 그동안 동남아 시장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많기 때문이겠죠. 일본계 기업들의 직접투자는 물론 차관에 채권까지 그들은 동남아에 물린 게 많으니까요. 게다가….”
“게다가?”
“아시아의 맹주. 버블 붕괴 이후 흔들린 경제대국의 지위에 대한 자위. 뭐 이런 것들도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은 자기 잘못은 잘 잊지만 영광은 잘 잊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내가 알기로 버블 붕괴 이전부터 동남아 시장에 공을 많이 들였다.
일단 가전, 자동차 등 산업에 많은 투자를 한 것은 물론 채권과 차관을 비롯한 기타의 지원 또한 수년간에 걸쳐서 이뤄졌다.
말마따나 1997년 현재 태국 외채의 절반이 일본 엔화 차관이었으니까.
그러니 일본이 태국의 지원을 운운하는 것은 자기 텃밭을 지키려는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텃밭에 들어온 멧돼지들일 테고.
‘조금 큰 멧돼지긴 하지만.’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이내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했다.
“그래? 음… 그럼 좀 어폐가 있는데? 아니 오히려 그럼 더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 악착같이 달려들어서 멧돼지를 때려잡아야 할 테니까.”
“물론 그렇죠. 도둑이 들면 주인이 몽둥이를 들어야 하는 법이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짙은 미소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그 밭에 뿌려 놓은 씨앗들이 다 썩어 버렸다면. 이제 더 이상 상품가치가 없다면. 돈을 들이면 들이는 대로 족족 사라져 버릴 것 같다면. 그때도 그들이 그 밭을 지키려 할까요?”
순간, 그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네 말은 그 모든 게 사라져 버릴 거라는 거야?”
조심스러운 그의 말, 그 말에 나는 긍정했다.
“네. 분명히요.”
그러자 약간 움찔 거리던 이어진, 그가 이내 말도 안 된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야. 그건 좀 너무한 해석 같은데. 아무리 환율이 떨어지고 주가가 떨어진다고 해도 있었던 게 없어지고 그러지는 않을 것….”
그때.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뇨. 그럴 거예요.”
“뭐?”
“이제 곧 올 테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나는 테이블에 놓인 각설탕 하나를 집에 커피 안에 빠뜨렸다.
그러자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하얀 각설탕에 검은색 커피물이 들더니 이내 스르륵 녹아 없어졌다.
그런 뒤 커피를 마시자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맛의 커피가 내 혀에 닿았다.
“…올 거예요. 아저씨 말했던 대로 있었던 게 없어지고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준영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도 태국도 일본도 이 세상 모두가 이 상황을 낙관하고 있어요. 이번 일, 이번 사건 또한 모두 다 흘러가는 바람과 같은 사건이 될 거다. 지금의 위기는 단순한 여울에 불과하다라고요… 그건 헤지펀드 사람들도 다를 바 없죠.”
이어진이 뭔가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
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큰 사건이 벌어질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일본 또한 태국에 발을 딛겠다는 헛소리를 다시는 하지 못하게 되겠죠.”
그런 뒤 천천히 말을 맺었다.
“뭐. 그들이 발을 딛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겠지만.”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이어진, 그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큰일 난 거 아니야?”
아무래도 내 말을 믿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짙게 웃어보였다.
“큰일 난 거죠.”
혀끝에 설탕의 단맛을 느끼며 나는 말을 맺었다.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게 된다는 말이었으니까.”
*
며칠 뒤, 드디어 바트화가 달러당 24바트의 벽을 뚫어냈다.
그러자 태국 중앙은행은 기다렸다는 듯 승리의 나팔을 불며 자신들의 승리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렸다.
[바트화 달러당 24바트! 사상 초유의 가격에 태국 정부 승리 확신! 헤지펀드들 약 15%가 넘는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 이코노미스트(싱가포르) - 1997. 05. 29]
공포(恐怖)의 차단.
이것으로 위협의 분쇄를 이뤄냈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던가?
아직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분명 바트화 가치는 달러당 24바트.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정도까지 올라와 버렸지만 이상하게 외국인 투기자본들,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헤지펀드들의 매도세는 꾸준했다.
분명 순간적인 화력에 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꾸준히 바트화를 매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타이거 펀드. 10억 바트 매도주문]
[메가 어드바이저스. 10억 바트 매도주문]
[JP모건. 10억 바트 매도주문]
[골드만삭스. 10억 바트 매도주문]
[오라클 10억 바트 매도주문]
그러자 처음엔 비웃던 사람들, 투기 세력의 골탕에 웃음을 참지 못하던 사람들 또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
“글쎄? 그냥 자존심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괜히 졌다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저치들이 그런 놈들로 보여? 저놈들은 돈이라면 부모 골수까지 빼서 팔아먹을 놈들이야. 그런 순진한 생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놈들이라고.”
“그럼…?”
“이유가 있겠지. 저런 행동의 이유가.”
그러자 사람들은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정보라는 것. 행위의 이유를 찾는 일이라는 것. 그것조차 돈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
“…찾았다.”
그들은,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은 찾아낼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이유가 그들에게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소로스 씨 준비 끝나셨나요?”
[하하. 준영. 준비라면 그 전부터 끝나 있었어. 말만 하게. 자네 정보니 자네가 시작해야지.]
870억 달러!
한화 87조 원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채권, 만기가 코앞을 다가온 해외 채권들이었다.
“좋아요. 그럼 시작하시죠.”
[좋네. 지시를 내리지.]
5.
4.
3.
2.
1.
안전장치 없는 폭탄이 카운트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