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치유 (3)
김귀란의 저택에 찾아온 불청객들.
장남 김명석을 위시한 차남 김명현, 막내딸 김성아는 그들을 보자마자 터져 나온 김귀란의 일갈에 곧 쫓기듯 평창동 저택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정신 빠진 것들. 이 시간에 회사는 어찌하고 여길 와!”
“어머니. 그게 아니라….”
물론 그들 또한 그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저택을 떠나지 않으려 했지만.
통할 리가.
그들이 변명을 하며 저택에 붙어 있으려 하면 할수록 그들에 대한 김귀란의 평가는 점점 더 낮아질 뿐이었다.
“그게 아니기는. 다들 내 목숨줄이 붙어 있나 살펴보려 했겠지. 쯧쯧 어째 마음에 드는 놈들이 하나도 없어요. 이놈들아 정신 차려. 이러다간 내 목숨줄이 아니라 너희들 밥줄이 먼저 끊어질 거니까. 괜히 헛바람들 내지 말란 말이야. 알아들어?”
그 결과, 약간의 소란이 끝나고 난 뒤, 김귀란의 저택에는 나와 김귀란, 우리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
“…….”
고요한 분위기.
우리 집에서 옮겨 온 의료기기의 비프음만이 이따금 들리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김귀란, 그녀의 두 눈에는 나를 향한 무수한 말들과 무수한 의문, 그리고 무수한 감정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때문에 나는 기다렸다.
그녀에 입에서 나올 질문을, 나에 대한 말을.
뭐 누가 봐도 궁금한 상황이니까.
‘아마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겠지.’
하지만 잠시 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말이었다.
“…고맙구나.”
순간, 나는 잘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온 그 찰나, 나의 기획, 나의 미래를 향한 단추가 제대로 꿰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고맙긴요.”
나는 나를 바라보는 김귀란을 향해 짙게 웃어 보였다.
어차피 오늘의 일은 이자까지 쳐서 다 받아낼 거니까.
*
김귀란의 몸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회복되었다.
처음에는 병의 잔향, 급성 심근경색의 여파로 다소 힘겨워하곤 하던 그녀였지만, 잠시 시일이 지나자 내가 데려온 의사들마저 깜짝 놀랄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몸을 회복, 그 전과 비슷한 정도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대단합니다. 이 나이에 이 정도의 회복 속도라니. 아무래도 유전자 레벨에서부터 강건한 체질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소?”
“네. 그렇습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한 이 주 정도 뒤, 치료를 마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며 찬탄을 금치 못하는 의사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것은 자신의 회복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좀 더 빠르게 회복할 수는 없는 거요?”
“네?”
“나에게 이 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 기오. 그러니 일주일. 일 주 안에 회복시켜 주시오.”
아니 이 할머니가?
무슨 몸이 게임 캐릭터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순간,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나와 의료진들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사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그건 다소 무리한….”
“무리하건 아니건 상관없소. 그래야만 하는 거니까. 그러니 일주일 뒤 체크해 주시오. 내 그때도 내 몸이 부족하다면 그땐 기다리지.”
그리고 그 결과, 일주일 뒤. 정말로 그녀는 의사들에게 완쾌 선고를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어떻소?”
“…깨끗합니다. 이정도면 지속적인 건강 체크만 하면 되겠군요.”
“하하. 역시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지. 좋소.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다 말해 보시오. 내 은혜는 세 배로 원수는 열 배로 갚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정상으로 돌아온 김귀란, 그녀는 곧바로 약간의 휴식도 없이 본격적인 뒤처리에 뛰어들었다.
“진호.”
“예. 회장님.”
“그동안 있었던 일들 정리해 놨지?”
본디 주인이 느슨해지면 곳간에 도둑이 들고, 소문이란 발 없이 구만리는 가는 법, 아무리 그 동안 그녀가 병상에서 제법 단도리를 쳐 놨다고 하더라도 새는 구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좋아, 가져와.”
그리고 그 결과, 그녀의 눈앞에 그녀가 쉬는 동안 일어난 일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일단 지난 기간 일어난 그룹 안팎의 일들을 정리한 보고입니다.”
“그럼 이 중에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주가가 떨어졌습니다.”
순간, 김귀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가가 떨어졌다.
그것은 그녀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말,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주가가 떨어져?”
김귀란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전진호의 고개가 점점 더 숙여졌다.
“네. 회장님께서 쓰러지시고 며칠 지나고서부터 그룹 전반에 걸쳐 주가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인은?”
“그게… 아무래도 말이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쓰러지셨다고.”
그의 말에 김귀란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단도리를 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그룹 내에 구멍이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잠시 전진호를 바라보던 김귀란,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실수했구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쯧, 됐어. 그동안 너무 풀어 줬던 내 탓도 있으니까.”
그러더니 일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네 녀석 덕에 살아서 이 보고를 듣는구나.”
그녀의 눈빛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긴, 만약 내가 그녀를 살리지 못했다면, 그녀를 제때에 치료 받게 할 수 없었다면 이렇게 이곳에서 떨어진 주가를 걱정하고 있을 필요도 없었겠지.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그녀의 유산을 갈라먹기 위해 나의 큰아버지, 고모들이 이 집, 이 방 안에서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한성. 이 회사도 무난하게 쓰러졌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김귀란 그녀가 현 상황, 그녀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돌아 주가가 떨어지는 이 상황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가가 떨어진다는 말은 곧 기업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고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곧 자금의 유동성이 떨어진다는 말이었으니까.
‘앞으로 일을 생각하면 조금 심각한 상황이긴 하지.’
그러나.
그 문제는 생각보다 더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전진호에게 주가가 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김귀란이 한동안 그룹 안팎에 있던 정보들을 취합하더니,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이내 한성그룹 내에 있는 구멍들, 그동안 쌓인 적폐들의 목을 쳐 버린 것이다.
[재계서열 9위 대기업 한성, 대규모 인사 개혁 실시! - 조X일보. 1997. 03. 15]
[한성그룹 대격변! 대상은 광업, 전기, 물산 등 5개 계열사! - 매X경제. 1997. 03. 16]
[계속되는 불경기, 한성그룹 그룹 쇄신 돌입, 투자자들 기대심리 상승! - 중X일보. 1997. 03. 16]
참으로 그녀다운 방법이었다.
괜히 지지부지 소문을 잡느니 더 큰 일로 소문을 덮어 버린 것이니까.
그러자 사람들, 그동안 김귀란의 건강 문제로 한성가의 리더십이 흔들릴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그 노인네가 쓰러졌겠어?”
“하긴, 그 노인네라면 아마 저승사자도 고개를 저을 사람이지.”
다들 생각한 것이다. 그동안의 소문, 김귀란이 쓰러졌다는 소문이 사실 헛소문이었다고.
물론 그 와중에 사사된 자들, 모가지가 잘린 자들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개소리들 지껄이지들 말어. 그동안 집어 먹은 것들 생각하면 가죽을 벗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니까.”
“회장님!”
“김 사장. 자네 내 밑에서 20년을 있었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저를 이렇게 말도 없이….”
“20년 충성이 요즘 다른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김귀란이 내보인 증거, 그간 모아왔던 그들의 비행에 대한 증거에 그들 모두 격침, 곧 쓸쓸히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자네가 내 새끼들이랑 붙어먹고 있다는 걸 내가 몰랐을 거라 생각해?”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적당히 먹고 떨어져. 그동안 해 처먹은 것만 해도 제법 기름지게 살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리고 그 결과.
한동안 리더십 부재를 걱정하며 하락하던 주가가 일순 주춤하더니 이내 선명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 곧 기존의 주가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 기존 주가를 뛰어넘는 주가 상승을 이뤄낼 수 있었다.
[한성전자 17,600 ▲ 360]
[한성전기 5,200 ▲ 240]
[한성유통 11,200 ▲ 280]
[한성광업 2,700 ▲ 110]
위기를 기회를 삼아 그동안 고여 있던 적폐들에 대한 과감한 정리, 그를 통한 쇄신에 대한 기대와 아직도 강건한 리더십에 투자자들이 움직인 것이다.
“진호 큰애랑 작은애 반응은 어때?”
“현재로선 조용합니다. 아무래도 자중하는 것 같습니다.”
“녀석들, 욕심만 많지 깡이 없단 말이야. 다른 놈들 같으면 이 상황에 한번 들이대기라도 해 보련만. 쯧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어.”
그리고 그렇게 일단의 사건들이 일단락 되어 갈 때쯤, 그녀가 나를 초대했다.
장소는 한성호텔.
목적은…….
“이제 네가 원하는 것을 주마.”
한성유통의 지분, 한성의 심장이었다.
*
톡- 톡- 톡-
유리창에 부딪치는 빗방울, 나는 그 빗방울을 바라보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보이는 풍경, 그것은 호텔 한성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 하늘의 별들이 한군데 모아놓은 듯한 찬란함, 한강의 기적이 만들어낸 결정(結晶)이었다.
그런데 그때.
“뭘 그렇게 보고 있느냐.”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곳에는 고요한 안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 김귀란이 자리해 있었다.
“오셨어요?”
“그래. 뭘 그리 보고 있기에 사람이 왔는데도 몰라?”
내 앞에 앉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대답했다.
“서울이요.”
“서울?”
“네. 서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러자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 그녀가 이내 피식 가벼운 웃음을 입에 물었다.
“맨날 보는 서울이 무슨.”
“글쎄요. 오늘따라 달라 보이는데요.”
“흰소리는.”
그렇게 가벼이 내 말을 일축한 그녀, 그녀가 옆에 있던 전진호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받아 내게 건넸다.
“받아라.”
“이게…”
“그래 네가 원하던 것. 한성 유통의 지분이다.”
그 가치에 비하면 제법 가벼운 말투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에서 서류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일순 묵직한, 아니 묵직하게 느껴지는 봉투가 내 손에 닿았다.
“…제법 무거운데요.”
“무겁겠지. 거기 들어간 돈만 해도 너희 집 같은 건 수백 수천 개는 더 살 수 있는 돈이니까. 아무튼 세금까지 전부다 처리한 거니까 이제 네 꺼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나만 경고하마.”
“그게 뭐죠?”
“섣부른 생각은 하지 말아라.”
“섣부른 생각이요?”
“그래 네 손에 쥔 것을 네 마음대로 할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그리고는 준엄한 판관처럼 그녀의 시선이 나를 찔렀다.
“한성의 무게. 그것을 느끼라고 내게 허락한 거니까.”
그러더니 나의 대답을 듣겠다는 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그럴 리 없으니까.”
그러자 그녀가 가벼운 불신을 띈 채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냐?”
아무래도 그 동안의 나의 행보 그것으로 미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싶었다.
하지만.
“네.”
나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그녀의 회사, 한성을 손에 쥘 생각이 정말로 없었으니까.
“적어도 지금은요.”
원래 태풍은 아래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