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목숨줄 (2)
‘···이 그림이 회장님을 도와줄지도 모르니까요.’
김귀란의 머릿속에 김준영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그래 그때 분명 준영이 그 녀석이 괴상한 그림, <귀화(鬼火)>라는 이름의 그림을 주면서 그런 말을 했었지.
평소 현대미술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던 그녀였지만 준영이 그 녀석이 준 첫 선물인데다가 왠지 요즘 그림 같지 않게 강렬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회장실이 마주 보이는 곳에 걸어 두라 지시했었는데, 아무래도 저 코쟁이 녀석이 그 그림을 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그림이 뭐라고 저 코쟁이 녀석이 저 난리를 치는 거지?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인장처럼 무표정하던 놈이었잖아?
의아한 마음에 김귀란이 도미닉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냉정한 모습을 견지하고 있던, 마치 청동상 같이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미닉이 잔뜩 격앙된 표정으로 프랑스어를 내뱉고 있는 것이 보였다.
“Je veux acheter ce chef-d'œuvre.”
뭐라는 거야?
김귀란이 슬쩍 통역을 바라보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통역이 눈치 빠르게 도미닉의 말을 통역했다.
“그, 그게 그··· 그림을 사고 싶으시다고 합니다.”
그 말에 김귀란이 황당하다는 듯 도미닉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 코쟁이 자식 진짜 그림 때문에 이러는 거야?
저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도미닉과 함께 온 베스트 바이(Best Buy) 측 사람들도 도미닉의 이런 태도가 의외였는지 벽안(碧眼) 가득 당황을 담고 있었다.
그때.
김귀란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퍼즐이 끼워 맞춰졌다.
그림.
준영의 말.
그리고 도미닉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어 보였던 세 요소들이 한데 모인 순간, 그녀는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설마 준영이 이 녀석 이걸 예상하고 있었나?’
김귀란은 오스스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금융실명제를 예측하거나 김일성의 죽음을 예언하는 거야 출처불명의 소스가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이런 지엽적인 사건까지 예측하는 것은 그녀의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은 눈앞에 있는 사냥감에 집중할 때였다.
방금 전 그녀가 놓아 준 사냥감. 들이는 노력에 비해 가치가 없는 아주 건방진 사냥감.
하지만 지금은··· 그냥 호구.
먹음직스러운 톰슨가젤이 제 목을 드러낸 채 자신을 물어뜯어 달라 달려온 것이다.
그러니···
물어뜯을 수밖에.
“그림이 마음에 드셨소?”
김귀란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묻자 늬앙스만으로도 그녀가 물음을 이해했는지 도미닉이 격앙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저 그림에 대해 쏼라쏼라, 통역이 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네. 물론입니다. 저 걸작 도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다. 프랑스에서도 저런 그림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꼭 저 그림을 사고 싶습니다. 혹시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까? 아니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이 살아 있습니까?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이 살아 있다면 그를 미국으로, 아니 프랑스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격앙되고 격렬하고 빠르지만 그만큼 두서없는 말. 도미닉의 말을 통역하는 통역사의 얼굴이 진땀이 줄줄 흘렸다.
하지만 그만큼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했다.
나는 저 그림에 푹 빠져 있다. 나는 저 그림에 어마어마한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저 그림을 정말 가지고 싶다.
방금 전까지 냉막한 표정으로 김귀란 자신에게 계약서를 내밀던 그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모습. 굉장히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노련한 사냥꾼.
갑자기 바뀐 사냥감의 상태에 흥분한 채로 달려들어 사냥감의 뿔에 받히는 그런 어리버리한 사냥꾼이 아니었다.
김귀란이 날카로운 이를 숨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저 그림은 파는 게 아니오.”
그러자 도미닉이 애가 닳은 표정으로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100만 달러, 100만 달러만 어떻습니까?”
“노. 1000만을 준다고 해도 팔지 않을 거요.”
도미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린 듯, 세뱃돈을 어머니에게 빼앗긴 듯한 그런 표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쓸 수도 없는 일. 잠시 고민을 하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대신 한 가지만 알려 주십시오. 저 그림을 그린 사람.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습니까?”
그림을 얻지 못하니 방법을 바꾼 듯했다.
그런 도미닉의 모습에 김귀란이 차게 웃었다.
“당연히 살아 있소. 그리고 내 명령 하나면 그 화가와 만날 수도, 그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할 수도 있겠지.”
통역이 빠르게 그녀의 말을 전했다.
순간, 도미닉의 눈이 번쩍. 기대 어린 눈으로 김귀란을 향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하지만.”
통역을 말을 자른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우리 사이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김귀란이 차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결국 결렬되었던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일단 귀사 측에서 요구했었던 납품가격 인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저희 측 조건은 위 조항의 완전한 삭제를···.”
하지만 한성 측 김명현에 의해 시작된 이번 협상의 분위기는 아까와는 사뭇 달랐는데.
그것은 그림이라는 미끼. 그림을 그린 화가라는 확실한 인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귀사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납품가격 인하 조항을 삭제를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한성 측에서 무리한 협상조건을 베스트 바이 측에 내민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무리 그림에 대한 도미닉의 욕망이 크다고 하더라도 단박에 협상이 결렬, 또다시 지리하고 첨예한 대립이 시작됐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전수 조사 조항 같은 경우도 삭제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전수조사 조항 같은 경우에는 본사 측에서도 꼭 필요하다 인정된 조항이라 삭제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흐음, 좋습니다. 그럼 대신 전수조사는 저희 쪽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결국, 한성과 베스트 바이 측의 계약은 종전에 있었던 납품가 20% 상향 조정 혹은 미국 현지 법인을 통한 전수조사 같은 말도 안 되는 조항들을 삭제. 현실성이 있는 계약으로 바꾸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쌍방 간의 이익. 한성전자와 베스트 바이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는 이상적인 계약으로 최종 협상이 종결된 것이다.
사실 이렇게 우호적으로 협약 변경과 추가 특약이 진행된 것은 도미닉이라는 바이어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결과이다.
“Papa, tu dois acheter ca. Crois-tu dans mes yeux?”
누군가에게 개인 번호로 전화를 거는 도미닉.
굳이 통역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번 계약 체결을 위해 꽤 무리하게 힘을 쓰고 있음을.
“협상 끝냈습니다 회장님. 여기 협상 결과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김 사장.”
하지만 협상이 끝난 이후에도 김귀란은 도미닉에게 화가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는데, 그녀 자신이 화가의 이름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물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끝까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보다 유리할 것이라 그녀가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도미닉 자네가 보고 싶어 하는 화가는 내가 다음 계약 조인식 때 반드시 초대하도록 하겠네. 그땐 그 작가의 그림들도 가져올 테니 기다려 보게나.”
그러자 처음엔 다소 실망하던 도미닉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 불만을 드러냈다가 위대한 작가.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준 작품을 영영 볼 수 없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서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꼭 그날 그 화가를 데려와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걱정 말게 내 약속하지.”
그리고 그렇게 베스트 바이 측의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나고 난 뒤.
김귀란이 가만히 <귀화(鬼火)>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두운 캔버스 위 그려진 파란색과 붉은색의 불꽃.
작품 한쪽에 떠 있는 창백한 빛의 달과 그 달의 아래 무릎 꿇고 서 있는 인간의 그림자.
메마른, 그리고 너무나 거친 느낌의 그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림을 바라보던 그녀가 탁- 테이블을 두드리며 고개를 들었다.
“진호.”
그러자 그녀의 그림자. 전진호가 언제나처럼 고요히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예. 회장님.”
김귀란의 입이 열렸다.
“준영이 그놈. 당장 데려와.”
*
김귀란과의 대화를 끝낸 뒤 나는 넥스트 게임즈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넥스트의 게임, 쥬라기 공원의 현재 상황을 확인할 겸, 국내 최초의 풀 그래픽 상용 온라인 게임 바람의 제국의 개발 상황이 얼마나 진척됐나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현재씨! 쥬라기 공원 동접자 수 지금 얼마나 나와요?”
“아 이사님. 오셨군요. 그러니까 지금 쥬라기 공원 동접자수가··· 허. 지금 막 900명 넘었네요. 903명이에요. 한 시간 전에 확인했을 땐 분명 800대였는데···.”
“사용자 수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죠. 동접자 제한은 1천 명까지 올려놓은 건가요?”
“네. 하는 김에 확 올려놓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1500명까지 열어 놓은 상태에요. 아무래도 바람의 제국 프로젝트 대비용으로 운용해 보려고요.”
“컨텐츠 소모율은 어때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개발팀 미치겠어요. 아니 사람들이 뭐 밥만 먹고 게임만 하나. 아무리 미친 듯이 퀘스트를 만들고 게임을 확장해도 며칠이면 사람들이 따라와서. 어휴, 요즘 진짜 죽겠습니다.”
“하하 앞으로 더 고생할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 한번 꽂히면 진짜 물불 안 가리잖아요. 그래도 아예 사람이 없는 것보단 낫죠, 안 그래요?”
“뭐 그건 그렇죠.”
그런데 내가 막 개발실 사람들과의 대화를 마치고 개발실 밖으로 나온 그때,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한성의 비서실장 전진호와 그의 부하직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련님.”
제법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는 넥스트 게임즈 사람들 사이. 칼 각을 잡은 양복쟁이들.
그들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무슨 일이죠?”
내가 묻자 전진호가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뒤를 이어 비서실 직원들이 전진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몇 시간 전 나는 김귀란을 만나고 왔었다.
그것도 김일성의 죽음. 이번 남북 정상회담이 파토가 난다는 정보를 가지고.
하지만 김귀란은 정주영을 만나게 해 달라는 내 요구를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확실치 않은 정보를 가지고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이 타이밍에 나를 찾는다고?
설마?
나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전진호를 바라보았다.
“혹시 회장님께서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시던가요?”
그러자 전진호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정영주 회장님 댁으로 간다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