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폭풍전야 (2)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한국고등학교.
강남 8학군의 한가운데 있어 뭇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매일 부는 곳, 강남 사모님들의 헬리콥터질로 연일 바람 잘날 없는 이곳에 오늘 현수막 하나가 내걸렸다.
[환영! 1994년 제2차 초중고졸 검정고시]
검정고시.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 대학입학을 위한 최소한의 자격을 평가하기 위한 시험이 오늘 이곳에서 치러지는 것이다.
시험장 주변의 분위기는 차분한 분위기.
시험을 보러 들어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몇 이외에는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찾기 힘든 고요한 분위기였다.
그것은 검정고시 시험이 가지는 특수성. 수능에 비해 치르는 사람들의 수도,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도 덜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8시 55분.
1교시 국어 시작을 막 5분 남짓 남겨 놓은 시각.
OO고등학교 3학년 5반, [제55수험장]이라는 종이가 붙어있는 시험장 안에 30명 남짓한 수험생들이 모여 있었다.
미리 배부된 시험지를 앞에 두고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린 수험생들, 그들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거운 공기. 교실 안을 가로지르는 한숨 소리와 이따금 들리는 침 삼키는 소리. 그리고 군데군데 결원을 의미하는 빈 책상들.
불안하게 깜박거리는 형광등은 물론 그들의 주변을 오가며 부정행위를 감시하는 감독관들의 눈동자까지, 이 교실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을 내리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하게만 보이는 시험.
대부분 어쩔 수 없이 혹은 후회로만 남은 어리석은 선택에 의해 학업을 중도 포기한 사람들.
하지만 사회를 경험한 뒤 학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뒤늦게 고졸자격을 취득하려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얼굴에 감도는 감정은 절박했다.
만약 올해 시험을 망치게 되면 다시 1년을 준비해야만 할 수도, 아니 운이 좋지 않으면 영영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교실 안에 단 한 사람. 사람들을 내리누르는 무거운 초조 속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글쎄 한 열두어 살쯤 되었을까?
아역배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귀엽게 생긴 남자아이.
아직 젖살도 채 덜 빠진 소년 하나가 어울리지 않게 그 안에 자리해 있던 것이다.
고등학생들 전용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리를 흔들고 있는 소년.
긴장으로 굳어있는 사람들 사이, 컴퓨터용 사인펜을 까딱거리며 이리저리 몸을 푸는 작은 몸집의 어린 아이, 얼굴 어디에서도 긴장의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제법 눈에 띄는 비주얼이었기에 자연 사람들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 향했다.
다들 초조한 와중에 의문을 띄운 채로.
하지만 시간은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 주지 않았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 오전 9시. 결전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띵동댕동-
스피커에서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 그 순간, 수험생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험지를 열기 시작했다.
스슥- 스슥- 슥-
종잇장 비벼지는 소리가 교실 곳곳에서 요란하다.
이윽고 몇 초 뒤, 사람들이 막 첫 번째 문제를 확인했을 무렵.
곳곳에서 작은 한숨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다.
감독관들의 얼굴도 긴장으로 굳어만 간다.
하지만 단 한 사람.
“······.”
여유로운 표정으로 컴퓨터용 사이펜을 돌리던 그 아이 만은 시험지를 열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뭐지? 시험을 보러온 게 아닌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감독관이 아이에게 다가가려 하던 그때, 마침내 그 아이가 시험지를 열고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주변 학생들과 감독관들이 흘끗흘끗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분명 어린아이. 이제 막 열 몇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너무도 빠르게 시험지를 훅훅 넘기고 있던 것이다.
‘···뭐지?’
감독관부터 수험생들까지 모두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
시험이 시작되기 전.
창밖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팔 두 개로 O자를 그리며 방방 뛰는 이어진이 보인다.
저번에 사 놓은 주식들. 대북 특수주들이 모두 다 팔렸다는 신호였다.
‘아저씨, 그거 부정행위예요.’
나는 피식 웃었다.
뭐 예상 밖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잘 전달되었다. 어차피 시험에 관련된 내용도 아니고 뭐.
단지 신경 쓰이는 것은 그런 이어진을 흉하게 쳐다보며 거리를 벌이는 부모들의 모습이었다.
'거참··· 뭐 좋아. 팔렸단 말이지. 이제 시험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겠구만.'
그때.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피커에서 딱딱한 기계음이 들려온다.
나는 짙은 미소를 입에 물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30평 정도의 좁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전투. 학벌이라는 무기를 향한 나의 경주가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이 시험을 위해 국내 최고 학벌, 최고 경력, 최고 연봉의 강사들에게 어마어마한 트레이닝을 받았기에 나는 자신이 있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저녁 12시에 잠들 때까지 분 단위로 스케줄이 차 있었지.’
뭐 검정고시는 물론 수능까지 염두에 둔 교육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 시험을 준비하며 지난 몇 개월간 제법 하드한 일상을 보냈기 때문.
물론 내가 일반적인 11살 꼬맹이었다면 버티지 못할 스케줄이었긴 하지만, 내 나이 이제 37살. 비록 11살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닳고 닳은 성인의 정신인 만큼 끈기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원래도 버티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었는데 회귀 후 팽팽하게 돌아가는 머리까지 더해지면서 공부하는 족족 머릿속에 지식이 쌓인 것이다.
‘거기에 수능에서 끝낼 것도 아니니까.’
사실 돈 버는 데에는 학교 교육이 당장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장기 레이스로 보면 학벌은 꼭 필요한 간판이었다. 그러니 오늘의 이 작업 역시도 나중에 언젠가는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김귀란에게 받을 땅도 있으니 공부가 잘 될 수밖에 없지.’
그러니 나로선 지금 이 상황이 약간 즐겁기까지 했다.
오늘 이 시험만 끝내고 나면 그동안 타이트하게 꽉 조여졌던 일정에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 그사이 또 다른 일이 생길 테지만.’
나는 슬쩍 웃으며, 빠르게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일단 우리나라 고졸 검정고시의 총 과목 수는 총 8과목. 필수 과목인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국사, 도덕과 선택과목 1가지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치르는 시험은 국어. 한글로 만들어진 암호문이자 아직 시험에 적응하지 못한 수험생들의 멘탈을 박살내 놓는 시험이었다.
“후우··· 이건 문제가···.”
“하··· 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주변에서는 앓는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슬쩍 보니 내가 평소에 풀었던 시험보다 조금 어려운 문제들, 평년 시험 문제들보다 약간 난이도가 있는 문제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지난 몇 년간 시험이 쉬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올해에는 예외적으로 문제들의 난이도가 높게 출제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나한테는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지.’
나는 사람들의 신음을 뒤로 한 채 거침없이 문제를 풀어나갔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의 의의는 어디까지나 정규교육 수료자 양성. 때를 놓쳐 정규교육 자격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기회제공이니만큼, 문제가 아무리 어려워 봐야 결국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 수준의 문제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동안 이 시험을 준비해 온 나에게는 제법 어려운 난이도의 문제가 자극적인 양념처럼 느껴졌다.
‘그래 여기서 막힐 거였다면 그동안 들인 과외비용이 아깝지. 그동안 지출한 과외비만 해도 중형차 5대는 족히 구매했을 가격이니까.’
하지만 그런 나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예상하던 것보다 사람들이 느끼는 문제의 난이도는 더 높은 것 같았다.
하긴 현재 검정고사 시험을 치르는 이들 대부분은 이미 성인, 나이가 어린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배움의 때를 놓친 이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겐 고등학교 1, 2학년 수준의 문제들도 어려울 수 있다. 원래 배움이란 그것에 맞는 시기가 있는 법이니까.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열심히 하면 대부분은 60점은 넘겠지만.’
그리고 이어지는 수학, 영어, 사회, 과학, 한국사, 도덕, 음악.
나는 모든 문제들을 순조롭게 풀어나간다. 딱히 변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쯤 됐을까.
내가 마지막 문제를 풀고 OMR카드를 마킹 한 뒤 시험지를 정리 가만히 눈을 감고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쯤.
저벅 저벅-
조용한 발소리와 함께. 부모님 연배의 여성 감독관 하나가 다가와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을 걸어왔다.
“학생 괜찮아요? 아직 그래도 시간 많이 남았는데?”
응 이게 무슨?
갑작스런 상황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일반적으로 시험의 감독관과 수험생의 관계는 창과 방패의 관계.
수험생들이 절박한 마음에 시도하는 기상천외한 커닝방법들을 사전에 철저하게 막아 내는 것이 감독관들의 임무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수험생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만 아니라면 최대한 수험생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슬쩍 돌아보니 뭔가 안쓰러운 눈빛, 걱정 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시험 감독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살풋 내려선 그녀의 눈꼬리를 보니 아무래도 그녀의 눈엔 내가 시험을 포기하고 답을 찍은 것으로 보인 것 같았다.
그러니 저렇게 불쌍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겠지.
아마 그네의 머릿속에선 자식을 닦달하는 부모와 그런 부모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시험을 보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있지 않을까?
뭐 추측일 따름이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제법 설득력 높은 추측일 것이다.
‘거참···.’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험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감독관에게 웃는 얼굴로 대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괜찮습니다······.”
입을 열어 낸 목소리는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은 탓인지 심하게 잠겨 있었다.
거기다 하필 감독관이 오기 전에 내뱉은 하품으로 인해 눈엔 약간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은 감독관의 측은지심과 모성애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나 보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지금 내 외모는 11살의 김준영, 그것이었으니까.
“저런···.”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감독관.
이거 오해를 풀기는커녕 더 깊어진 것 같은데.
슬쩍 눈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자 시험을 보던 사람들도 힐끗힐끗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다들 왜 이곳에 나 같은 아이가 있는지 의아한 것 같았다.
거 참. 그래도 뉴스나 신문에도 몇 번 나왔었는데, 아직은 노출이 덜 됐나 보다. 그러니 저런 표정들이겠지.
그때.
“에구. 힘내요. 아직 어린나이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옅은 한숨과 함께 감독관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이내 천천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음. 이게 아닌데······.’
뭐 나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반응.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이미 내 몫의 시험문제를 모두 다 풀었으니까.
그것도 내가 보기에 꽤나 만족할 만한 성적으로.
‘나중에 기자들이 좀 시끄럽겠네.’
어디 기자들뿐이랴?
저녁식사 자리에서 만날 친척들의 표정도 꽤나 볼 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