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구원자 (3)
“제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 그것은… 지금의 당신은 줄 수 없는 것이니까요.”
내가 말을 마친 순간, 도널드 트럼프, 그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지금의 나는 줄 수 없다?”
아무래도 방금 전 내가 한 말,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았다.
“네. 지금의 당신은 줄 수 없는 것, 그것을 저는 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나의 회사, 트럼프 기업의 미래 가치를 이야기하는 건가?”
“물론 그것 또한 포함된 내용입니다. 하지만 제가 더 크게 보는 것은 단순한 이익이 아닌 당신이라는 사람, 그 자체입니다.”
“나?”
“그렇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신. 미래의 당신 말입니다.”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 트럼프, 그를 향해 나는 확언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도널드 트럼프, 그가 묵직하고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 이곳, 뉴욕 맨하탄에 자리한 고층 빌딩의 최상층,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를 밟고 있는 지금, 나는 살짝, 아주 살짝 과거, 하지만 미래인 과거의 편린을 들추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과연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질까?
아니면 자신을 놀리는 것이냐고 화를 낼까?
그도 아니면.
‘내가 생각지 못한 대답을 던질까?’
그렇게 내가 기대어린 시선을 그에게 보내고 있던 그때.
“처음이로군.”
도널드 트럼프, 그가 묵묵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내가 묻자 그가 약간은 감정이 실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이고 감정적이고 바보 같은 이유가 처음이라는 말이지.”
“그렇습니까.”
“그래. 하지만… 이렇게 내 마음을 뒤흔드는 이유 또한… 그래, 이 또한 처음이로군.”
그런 뒤 잠시 말이 없던 그, 그가 천천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당신이 보기에 나의 미래가 5억 5천만 달러, 아니 10억 달러. 그 이상의 돈을 투자해도 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충분합니다. 아니 오히려 부족하죠. 내가 보기에 당신은 저에게 1천억 달러의 매출을 가져다 줄 그런 블루칩으로 보이니까.”
“5억 5천만 달러짜리 적자를 본 블루칩 말이지?”
“아니요. 제 눈에 보이는 사람은 앞으로 이 나라의 부동산, 경제계를 틀어쥐고 나아가 그 이상의 성취까지 이룰 블루칩입니다. 그러니 5억 5천만 달러 따위 푼돈에 불과하죠.”
“…푼돈?”
“네. 당신의 꿈이 단순히 억만장자에서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으니까요.”
순간, 그의 얼굴이 멈칫, 굳었다.
내가 한 말,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린 듯 약간은 일그러진 얼굴, 그의 굵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지?”
“당신의 꿈에 사업은 하나의 옵션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말을 마친 나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왜냐하면 당신의 꿈은 미국의 가장 높은 곳에 있으니까.”
그러자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남자, 도널드 트럼프.
그가 뭔가 말을 꺼내려는 듯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고요히 나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눈을 감더니 마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떨리는 손과 약간은 거칠어진 호흡, 그 모든 것들이 그의 감정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도널드 트럼프 그를 바라보았다.
“……회장님?”
도널드 트럼프.
대외적으로 그는 열정적인 인물, 성공한 사업가, 절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마이페이스적인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
그 사람이 이토록 감정적인 모습을, 그것도 오늘 사업차 처음 만난 12살짜리 꼬맹이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엔 단순한 사업가, 돈에 미친 스코틀랜들 혈통의 백인, 관심종자로만 보이는 그의 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해 있는지.
욕심과 욕망의 화신으로 보이는 그의 심장 안에 어떤 꿈이 잠자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나라 미국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아니 어쩌면 그 또한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의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도.
그렇다면.
‘이쯤에서 쐐기를 박아야겠지.’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의심, 기대, 희망, 자괴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트럼프 씨.”
그러자 도널드 트럼프, 내가 기억하던 시절의 그의 모습보다 훨씬 젊은 모습의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듣고 있소.”
“생각이 많으실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 선택을 도와드리죠.”
말을 마친 나는 사람들의 시선, 그 시선을 받으며 빠르게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도널드 트럼프,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으십시오. 당신이 이 손을 잡기만 하면 저와 저희 회사, 그리고 저와 관계된 사람들 모두가 당신에게 힘을 보탤 겁니다.”
“그 말은…?”
나는 슬쩍 웃으며 말을 맺었다.
“당신의 손에 이 나라, 미국을 쥐어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
결국, 망설이고 고민하던 도널드 트럼프, 그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라클, 아니 김준영 씨 당신을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5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빚.
주주들의 악다구니.
이제 트럼프는 끝났다는 사람들의 조롱.
그리고.
미국을 손에 쥐어 주겠다는 나의 약속까지.
그 모든 사항들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결국 자신의 앞길을 정한 것이다.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후회하지 않소.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그런 비생산적인 짓을 하기엔 시간이 아까우니까.”
하긴 그의 입장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가 자금지원을 받기 위해 만난 수많은 기업, 은행들 중 트럼프 기업의 자금 지원 의사를 보인 곳은 소수, 자금 규모를 생각해 보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니 그로서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
더 이상 사태를 내버려 주었다가는 자신의 자리, 기업 총수의 자리마저 위태로울 상황이니까.
‘뭐 그렇지 않더라도 지분 상당수를 잃었을 테고 말이야.’
아무튼 덕분에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일단 기업의 헤드, 총수들의 의견이 합치된 이상, 남은 것은 정확한 투자의 규모와 투자의 형식을 결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라던 바요.”
“일단 이번 지원, 아니 투자의 규모는 5억 5천만 달러. 나아가 6억에서 7억 달러 규모까지 가능하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최대 7억 달러라.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금 사정이 좋으시군.”
“요즘 들어 투자한 곳들의 상황이 좋아져서 말입니다.”
“그래. 듣긴 했지. 그런데… 혹시 10억 달러는 힘들겠소?”
물론 그렇다고 서로 간에 의견을 조율할 만한 일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오래지 않아 의견 조율마저 모두 다 마칠 수 있었다.
“10억 달러요?”
“그렇소. 분명 아까 10억 달러까지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것이오?”
“물론 가능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10억 달러를…그럼 당장….”
어차피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었으니까.
“단, 그만큼의 지분을 우리에게 양도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죠.”
“…지분을?”
“네. 저희라고 땅 파서 장사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저희 또한 투자자들의 니즈를 충족시켜 줘야 하거든요.”
“아까 내 미래니 어쩌니 하는 말은 어디로 간 거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비즈니스는 확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 협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오라클과 트럼프 기업, 두 기업 간의 빅딜이 성사되었다.
“…그럼 이것으로 오라클과 트럼프 기업 간의 양해각서(Memorandum of Understanding, MOU) 체결 협상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트럼프 씨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빅딜의 내용은 오라클이 트럼프 기업의 재정 적자 5억 5천만 달러를 상당 부분 갚아 주고 트럼프 기업의 지분, 트럼프가 소유한 회사 지분의 일부 양도받는다는 것이었다.
“없소. 모쪼록 좋은 관계가 지속되길 바랄 뿐이오.”
“하하, 염려 놓으시죠. 제가 계속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 목표는 단기적인 이익이 아니라 장기적인 이익, 바로 트럼프 씨의 미래라고.”
“거참, 아니 그런 사람이 지분을 그렇게 악착같이 가져가나?”
“뭐 증거는 언제나 필요한 법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물론 여기까지였다면 일반 은행의 자금 지원책과 그리 다를 바 없는 형식이었겠지만.
그들과 내가 다른 것이 있다면 단 한 가지, 나는 그들과 달리 도널드 트럼프, 그의 자리를 절대 위협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경영에 대한 완전한 자유, 그것을 위해서라면 당신보다 제가 지분을 가지고 있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이 지분을 가지고 있다면 주주들의 등살에 지분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흔들리지 않는 백기사.
그것이 바로 나와 트럼프의 관계였다.
“쯧, 뭐… 그건 그렇지. 하여간 노인네들 욕심만 많아서는. 아무튼 그럼 잘 부탁하오. 내가 비록 감정적인 사람이지만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도널드 트럼프.
미래의 미 합중국의 대통령이 되는, 아니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지워 놓는 것은 물론, 그의 기업, 트럼프 기업의 주식 상당수를 내 손에 쥘 수 있었다.
[마이더스의 손 오라클(Oracle)! 트럼프 기업과 5억 달러대 MOU체결! - 월스트리트 저널. 1996. 05. 12]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은 분명 이번 일을 통해 급한 불, 플라자 호텔의 적자로 쌓인 트럼프의 빚을 갚을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한 이미지.
실패한 사업가.
사업을 크게 벌이다 어마어마한 적자를 본 사업가라는 그의 이미지를 아직 없애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봐 기사 봤어?”
“무슨 기사?”
“왜 그 트럼프 기업이랑 오라클이 MOU 체결한 거 말이야. 오라클 측에서 트럼프 측에 5억 달러가 넘는 돈을 투자를 한다는데?”
“아, 그거 보긴 봤지. 하지만 뭐… 많이 달라지겠어? 어차피 트럼프 그 사람 사업가로서는 끝물이니까. 뭐 오라클이 이번엔 실수한 거겠지.”
물론 과거 역사가 증명하듯 그의 이미지, 실패의 이미지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져 갈 테지만, 기왕이면 좀 더 빠르게 그 이미지를 지울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이미지.
실패한 사업가라는 이미지가 빨리 사라질수록 나의 대전사. 트럼프가 나에게 빠르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은 물론, 그의 정계진출 또한 빨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살짝 움직여 볼까?’
어차피 방법이야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