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아메리칸 드림 (3)
대항해 시대. 성공한 사업가나 무역업자들은 항해가 시작할 때나 끝난 뒤 값비싼 향신료들을 태우며 배와 자신의 앞날을 축복했다고 한다.
한 번의 항해가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돈,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 또한 그때의 그들처럼 향신료를 흩뿌리며, 혹은 불태우며 나와 회사의 앞날을 축복하고 싶었다.
왜냐고?
그거야 내가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으니까!
나는 슬쩍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풍경, 그것은 오라클 인베스티드먼트의 미국지사, 불과 며칠 전까지 휑하던 공간이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로 활기를 띄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객님. 네. 지금 투자하셔야 합니다. 저희 오라클 인베스티드먼트의 투자 성과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난 한 달 사이 무려 500%의 성과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지금 딱 열 자리가 남아… 아 이제 아홉 자리 밖에 남지 않았군요. 서두르십시오. 고객님이 벌어들일 돈은 다른 이에게 양보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러니까…앗 지금은 여덟 자리……!”
“고객님! 오늘 엔-달러화 확인해 보셨습니까? 무려 97엔입니다! 97엔! 지금이라도 빨리 투자를 하셔야…….”
남녀노소, 인종불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컴퓨터와 전화기를 붙든 채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는 그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자 가만히 있어도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들의 전화 한 통화, 그들의 클릭 한 번에 내 계좌에 찍히는 돈 또한 실시간으로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 50만 달러 투자하시겠다고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희 오라클 인베스티드먼트에 투자하신 이상 절대로 실망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10만 달러 말씀이십니까? 정말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그런데 고객님. 제가 고객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번과 같은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아, 10만이 아니라 100만 달러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뛰어난 결단이십니다. 일단….”
“150만 달러! 150만 달러! 거래 체결되었습니다!”
몇 주 전 나와 이어진은 조지 소로스의 일본 침공을 감지했다.
뭐 사실 소로스의 일본 침공 자체를 감지한 것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조지 소로스의 일본 침공을 감지했을 때에는 이미 월가 내부에 알음알음 소문이 다 퍼져있던 시기, 소로시의 뒤를 따라 제법 많은 수의 헤지펀드들이 미친 듯이 일본을 물어뜯고 있던 타이밍이었으니까.
‘조지 소로스? 일본 침공? 아니 월가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들 알고 있지. 아마 모르는 사람은 금융에 관심 없는 일반인들뿐일걸?’
때문에 처음 우리가 월가에 입성, 헤지펀드를 결성하려할 때 우리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또 하나의 펀드. 또 하나의 부나방이 돈일 쫓아 월가로 흘러들었구나 정도의 시선만을 받을 뿐이었다.
‘오라클 펀드라, 자본 상태가… 500만 달러? 심각하구만. 이걸로는 제대로 된 수익을 거둘 수 없겠어.’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월가는 포화 상태. 그중에서도 소로시의 작전은 레드오션에 속하는, 그래 마치 배당률이 높은 경마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500만 달러 정도면 스몰마켓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절대. 아마 이 정도 규모로는 아마 펀드의 이름 유지조차 힘들 거야. 아무리 수익을 내도 유지비로 죄다 빠져나갈 테니까. 게다가 오너가 동양인이니 선입견도 무시할 수 없을 테고.’
‘그런가?’
‘확실해. 뭐 딴에는 제법 빠르게 정보를 캐치한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
물론 그래도 그때까지는 마치 동업자를 보는 듯한 시선, 그래 한국에서 온 동양인치고는 제법 정보에 밝은 이들이구나 하는 시선을 받았다.
그때까지는 자신들과 비슷한 방식의 수익창출, 그러니까 소로스의 일본 침공에 동조하는 세력인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뭐야. 이거 상품이 이상한데?’
‘뭐야 왜 그래?’
‘아니 이거 봐봐 이 오라클이라는 데서 만든 펀드 이거 아무리 봐도 엔고에 배팅한 것 같지?’
‘뭐? 그럴 리가?’
우리가 조지 소로스의 배팅에 역행하는 선택을 하려 하자 그들의 시선은 곧장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어? 진짜네? 이놈들 진짜 엔고에 배팅했잖아?’
‘그치 맞지? 아니 이 미친놈들 지금 이 상황에 엔고에 배팅을 해? 하여간 이런 머저리들 때문에 고객들만 피를 본다니까 쯧쯧. 오너가 동양인이라더니 일본인이었나 보구만.’
조지 소로스에 대한 믿음, 자신들의 성공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멍청이들. 이 상황에 역배팅이라니.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누울 자리를 보고 누워야지. 보아하니 이대로라면 1년은커녕 1개월도 채 버티지 못할 거야.’
‘그러게나 말이야. 이런 식의 위험도 높은 배팅이라니. 고객들만 불쌍하게 됐어.’
그렇기에 처음 엔고에 배팅한 펀드를 만들었을 때 자금을 모집하기 힘들었다.
외환시장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 치고 조지 소로스의 일본 침공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것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당분간 달러화 강세가 계속되리라 전망했던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 나보러 역배팅을 하라? 날 바보로 보는구만. 썩 꺼져!’
‘됐습니다. 이미 골드만삭스에 투자한 금액이 있어서. 더 이상의 투자는 무리일 것 같군요.’
‘사양하겠습니다. 이런 위험한 투자는 취향이 아니라서요.’
물론 아주 가끔씩 혹시 모를 대박을 노리고 모험을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액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저씨 지금까지 얼마나 들어왔어요?’
‘어? 어어 지금까지 다 해서… 한 150만 달러 정도?’
‘150만 달러요? 아니 그거밖에 안 돼요?’
‘휴, 그나마도 에릭 슈미트라는 사람이 100만달러를 배팅해서 이 정도야. 아무래도 엔화가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운명의 1월 17일.
반전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고금리 정책을 저금리 정책으로 선회하고, 일본에서 한신-이와이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에 퍼져 있었던 일본의 자금. 그러니까 개인은 물론 기업, 정부의 자금까지 모든 돈이 다 일본 본토로 회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던 엔-달러화 가치가 빠르게 110선을 넘어 100선, 100선을 넘어 95선까지 쭉쭉 올라가 버렸다
[끝없이 떨어지던 엔화. 멕시코 사태와 한신-이와이 지진으로 반전 ‘조지 소로스’가 패배했다!? - 워싱턴포스트. 1995. 01. 20]
조지 소로스의 패배!
그 믿을 수 없는 말이 신문지상의 메인 뉴스를 장식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금까지 찬밥 취급을 받던 엔고 배팅 상품들, 그러니까 오라클 펀드 같은 마이너 펀드들의 수익률이 급변, 곧 어마어마한 수익률을 보이며 반등하기 시작하더니 펀드를 개설한 지 딱 한 달이 되던 날. 2월 10일. 비로소 펀드 수익률이 500%를 달성해 버렸다.
‘준영아! 대박이야! 대박이라고!’
‘도대체 얼마나 번 거예요?’
‘300억! 그 짧은 시간에 300억이라니까. 하하 정말 미친 것 같아.’
처음 펀드를 시작할 때 수익률이 마이너스 50%였던 것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하하. 그럼 순이익만 얼마죠?’
‘보자. 투자 받은 금액들을 제하면 순이익만… 글쎄 못해도 한 100억 가까이 되겠는데?’
‘역시 미국이라서 그런지 금액대가 다르네요.’
하지만 놀랄 만한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갑작스런 사건, 그러니까 멕시코 국가부도 사태와 한신-이와이 지진으로 인해 패닉에 빠진 자금들이 순식간에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들처럼 오라클 펀드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라클이죠? 지금 투자금을 늘리고 싶습니다. 얼마로요? 100만 달러. 100만 달러 가능합니까?’
‘여보세요? 50만 달러에 더해 20만 달러 더 투자하겠습니다!’
‘70만 달러! 아니 80만 달러 더 넣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1월 초 정영주 회장에게 빌린 50억 원의 돈으로 시작한 오라클 펀드의 규모는 2월 초순, 원래 규모의 10배인 5,000만 달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불과 한 달 만에 이뤄진 어마어마한 성장에 나를 비롯한 오라클 사람들을 기함을, 그리고 오라클에 투자한 사람들은 환성을, 오라클에 투자하지 못한 사람들은 울상을 짓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직 그 성장세가 끝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더 커지겠지.’
때문에 요즘엔 이렇게 가끔 회사에 나와서 사람들 구경도 하고 커피도 좀 사다 나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레이첼. 여기 커피요. 카라멜 마키아토 맞죠?”
“아. 준영. 고마워. 마침 카페인이 부족했는데. 딱 좋은 타이밍이었어.”
“하하.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오늘은 얼마나 투자받은 거예요?”
“일단은 100만 달러.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가는 사람이 200만 달러 정도?”
아직 나이가 있는 만큼 직원들에게는 이어진의 사촌 조카라고 말을 해둔 상태로 말이다.
“오, 그럼 오늘도 레이첼이 1등하겠네요?”
“에이 아직은 몰라. 병아리가 부화되기 전까지 수를 세지 말라잖아(Don’t count you chickens before they are hatched).”
병아리가 부화되기 전에 수를 세지 말라라.
아무래도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속담의 영어버전인 것 같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오너로서 직원의 자신감을 북돋아 볼까?
나는 가볍게 웃으며 실버 블론드가 인상적인, 오라클에 입사하자마자 인상적인 능력을 보여 주고 있는 20대 초반의 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분명 할 수 있을 거예요. 시작이 좋으면 반은 이루어진 셈(Well begun is half done)이라잖아요. 내가 아는 레이첼이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레이첼. 그녀가 곧 봄날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미소 지었다.
“하하. 준영. 설마 나한테 관심 있어?”
뭐?
아니 이 처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잠시 뜨악한 표정으로 레이첼을 바라보자 그녀가 은빛 블론드를 흔들며 푸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준영이 너무 진지해서. 혹시… 화났어?”
“…아니요. 그냥 조금 당황스러워서.”
“다행이다. 그런데 준영 진짜 11살 맞아?”
“왜요? 제 나이가 그렇게 어려 보여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말하는 거나 분위기가 꼭 서른은 넘은 사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서. 하하 준영이 오너 조카라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이 사람 감 좋네.
아무튼 그렇게 내가 사람들에게 커피를 돌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한쪽에 있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신사복을 입은, 마치 과거 근대 유럽 귀족가의 집사 같은 차림을 한 노인 한 명이 뚜벅뚜벅 회사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오너께선 자리하고 계신가요?”
“네?”
“오라클 인베스티드먼트의 오너께 전해 드릴 물건이 있어서 말입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어진이 잠시 펀드 운영에 대한 문제 때문에 출장을 나가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오너 가족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이걸 좀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노신사가 내가 작은 엽서를 하나 내밀었다.
엽서에 겉장에는 고급스러운 글씨체로 간단한 문장 하나가 쓰여 있었다.
[귀하를 초대합니다. 클럽 ‘카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