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 307화 왕좌를 향하여 (1)
한성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
한성이 끝이 아니라는 말, 그 말에 김귀란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한성이 시작에 불과하다?”
그의 표정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잠들어 있었다.
“네. 할머니 저는 한성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어요. 그것으로는 배가 차지 않거든요.”
그러자 잠시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귀란, 그녀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 이 녀석 욕심은… 설마 회사들을 더 인수하려는 게냐?”
그리고 그녀의 말은 사실에 닿아 있었다.
“네. 맞아요.”
“…정말?”
“물론이죠. 지금이라면 지분을 잠식하기에 좋은 기회가 아닌가요? 약한 상대는 잡아먹는다, 그것이 할머니에게 배운 법칙인데요?”
그러자 일순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 그녀가 피식- 웃음을 보였다.
“하, 녀석.”
그 표정은 장성한 자식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자의 상, 자신보다 푸르른 빛을 띠는 제자를 향한 스승의 눈빛이었다.
“그래. 좋다. 어떤 식으로 하려는 거냐?”
“보다 더 적극적인 인수합병이라는 걸 보여 줄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나는 손가락을 딱 치며 말했다.
“기업의 성장 속도에 한계가 없다는 걸 알려 주는 거죠.”
“가능하겠느냐? 물론 100조라는 자금이 많은 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손에 쥐고 있지는 않을 거 아니냐.”
그녀가 슬쩍 나를 떠보듯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내가 벌어들인 자금과 그 사용에 대한 견적이 끝난 것 같았다.
하긴 그녀 또한 눈치, 그리고 정보가 있을 테니까.
“물론 그렇긴 하죠. 그런데 돈이야 가지고 있는 곳에서 가져오면 되는 것 아닌가요?”
“가지고 있는 곳?”
나는 슬쩍 내 몫의 찻잔을 두드리며 말했다.
“렝繭遮? 건 참으로 우스워요. 돈이 없는 사람은 돈 빌리기 어려운데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빌리기 쉽죠.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요.”
“돈이란 곧 신용이니까. 그러니 신용이 없는 자들에게까지 돈을 빌려줄 수는 없지. 돈 가진 놈이란 돈 냄새에 민감한 법이거든.”
“네. 그래서 그 신용 이용하려고요.”
그러자 이내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 또한 돈 굴리기에는 일가견이 있는 만큼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바로 생각난 것 같았다.
“……은행들을 이용할 생각이로구나.”
빙고.
나는 그녀를 향해 나의 계획을 슬쩍 펴 보였다.
다 펴지는 않고 아주 살짝만,
“이번에 정부와 금융노련이 논의 끝에 부실은행들을 정리했죠. 그에 따라 상당수의 자금이 은행들에 묶여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뭐 그럴 만도 하죠. 있는 돈 없는 돈 흩뿌리다 패가망신한 곳이 많으니까요.”
“두려움보다 무서운 건 없지. 그래 얼마를 가져올 셈이냐?”
“글쎄요? 적어도 한국 내에서 사용할 자금은 한국에서 가용하고 싶어요. 들고 있는 돈은 쓸 곳이 있으니까.”
나는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현재 내가 알기로 시중 은행의 금고는 전례 없이 가득 차 있다.
물론 개중에는 3년 전 있었던 사건의 여파를 갚지 못해 정리된 은행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덩치 큰 은행들 또한 많이 태어나 있다.
국민, 하나, 우리 은행 등등.
그런 만큼 그 간극을 잘 헤아린다면 보다 굅? 오라클의 덩치를 불릴 수 있었다.
IMF 그리고 코스닥 붕괴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긴 하지만 그만큼 실적에 대한 압박 또한 거셀 테니까.
‘한빛, 평화, 광주, 경남 외 4개 종금사가 묶여 우리금융지주가 출범했다. 국민과 주택은 합병을 했고, 서울과 하나은행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면 가능하고도 남지.’
그러자 일순 그녀의 시선이 낮아졌다.
방금 전까지 감돌고 있던 장엄한 분위기, 진지한 분위기는 약간은 다른 방향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힘들 수도 있다. 어지간해선 돈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어. 그놈들 눈높이가 예전 같지 않단 말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는 약간 걱정 어린 김귀란의 시선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주인이 나서면 마름은 못 이기는 척 따를 테니까요.”
“주인?”
“네. 이곳에 올 때 정부 측 사람들의 초대가 있었어요. 뭐 일단 거절하긴 했지만 조만간 찾아갈 생각이죠. 그리고 그때 저는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힐 생각이고요.”
나는 얼마 전,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제야 김귀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와대라… 바라는 게 많을 텐데?”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걱정이 서렸다.
과거 관(官)과의 줄다리기에 신경을 쏟던 그녀로서는 마냥 달갑지 않은 일인 듯싶었다.
“바라는 것보다 더 큰 먹이를 아가리에 처넣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한 자 한 자 말을 깎아내렸다.
“이 나라, 대한민국을 먹을 권리를 얻을 겁니다.”
“……쉽지 않을 텐데?”
“아뇨. 쉬워요. 이 나라가 크는 것과 저의 회사가 크는 것 그것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김귀란과 시선을 맞췄다.
그녀의 시선은 이전과는 달리 색다른 열망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니까 한성의 합병은 속전속결로 이뤄져야만 해요. 그리고 그것에는… 할머니의 결단이 필수적이죠. 큰 힘을 가질수록 큰 힘을 보여 줄수록 저의 말 또한, 저의 약속 또한 힘을 가질 테니까.”
“나의 결단?”
“네. 결단이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러자 일순 김귀란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 벌써 잊은 것이냐? 나는 이미 결단을 내렸다. 모두 다 너에게 주기로 했어. 그런데 또 무슨….”
“할머니.”
“그래.”
“제가 말하는 건 그런 두루뭉술한 결단이 아니에요.”
일순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두루뭉술한 결단이 아니다?”
“네. 제가 말하는 건 그보다 더 딱딱하고 차가운 결단이죠.”
그런 다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나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할머니. 한성을 위해, 저를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나는 말을 맺었다.
“…자식들을 버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
잠시 뒤.
김귀란.
지난 수십 년간 일에 미쳐 온 여자.
젊은 나이, 남편을 잃고 이날 이때껏 한성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지탱해 온 여자, 그녀의 시선이 서재 한쪽을 향했다.
“…….”
방금 전 그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 이제는 소년이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가 되어 버린 녀석, 그 녀석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할머니 한성을 위해 저를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자식들을 버릴 수 있으신가요?’
순간, 그녀가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녀의 마른 손등으로 푸른 실핏줄이 돋아났다.
그 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일순 말을 하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녀석….’
사실 김준영, 그가 한 말은 간단했다.
자신에게 기업을 넘기기로 한 이상 그녀의 자식들, 장남 김명석과 차남 김명현, 삼남 김명준과 막내딸 김성아 같은 이들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겠느냐. 그것을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김귀란 그녀는 김준영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곧 그녀의 자식들이 한성의 경영에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제거해 버린다는 것, 기업가로서는 사형 선고를 내려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성을 위해,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버리라고?’
‘네. 완전하고 완벽한 경영권, 그것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필요 없어요.’
‘정말로 그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이냐?’
‘물론이죠. 내부의 적은 제거한다. 그것에는 혈연도 지연도 중요하지 않다. 그걸 알려 주신 분이 바로 할머니죠.’
순간, 그녀의 그러자 차가운 테이블의 냉기가 그녀의 손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는 뜨거워진 그녀의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하, 고얀 녀석 내 말로 나를 겁박해.”
하지만 그 말과는 반대로 그녀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방금 전 있었던 일, 김준영이 서늘한 낯으로 자신을 압박하던 것을, 자신에게 선택을 종용하던 것을 생각하자 그 순간, 묘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 어느새 그렇게 컸는지.”
그리고 그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잔잔한 바람 같던 웃음이 이윽고 커다란 파랑이 되어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하하.”
평소 그녀의 얼굴에선 볼 수 없었던 모습, 그녀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그 녀석은….”
그리고 그렇게 한참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그녀, 그녀의 웃음이 어느 순간 딱 멈춰 섰다.
그녀의 얼굴에 남은 것은 차가운 맹수의 표정이었다.
“그래. 대도무문(大道無門)이다. 어차피 장성한 자식 놈들을 위해 큰일을 도모하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지. 나이 마흔 줄이나 되었으면 마땅히 자신의 밥그릇을 챙겨야 하는 법이니까.”
결국, 결정을 내린 그녀 그녀가 빠르게 인터폰을 눌렀다.
삐익-
[네. 회장님]
“전 실장 올려 보내.”
그리고는 서둘러 전진호를 호출한 그녀가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진호.”
“네. 회장님.”
“지금 즉시 사장들 불러서 실무진들과 함께 이쪽으로들 오라고 해. 비밀리에.”
“…지금 이 시간에 말입니까?”
결정을 내린 이상 한시라도 빨리 이번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촌각을 다투는 일이야. 한성의 미래가 걸린 일이지.”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런데 비밀리에라고 하시면… 혹시 아드님들께는….”
“그놈들한테는 당연히 비밀이지. 그리고 그놈들 측근들한테도 알리지 마. 핵심들만 불러 핵심들만 알았지?”
“…아, 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모든 명령을 마무리 한 김귀란, 그녀가 마지막으로 전진호를 향해 말했다.
“……자네도 준비하도록 해.”
“……무슨 말씀이신지?”
“그동안 이 늙은이 챙기느라 고생했다는 소리야.”
일순 눈을 크게 뜬 전진호 그를 향해, 김귀란의 마지막 말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새 주인을 모셔야 할 테니까.”
전진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
며칠 뒤.
한성그룹의 혈육들에게 한 가지 연락이 당도했다.
“도련님.”
“어, 전 실장 여긴 어쩐 일이야?”
그 명령은 오는 주말 가족들 모두가 모여 저녁 식사를 진행할 테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라는 명령이었다.
“……회장님의 명령이십니다.”
“그래? 오랜만인데? 그 외 다른 말씀은 없으시고?”
“그렇습니다.”
그러자 한성의 핏줄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의 욕망을 감춘 채 평창동으로 몰려들었다.
“홍래 엄마! 빨리 준비해. 시간 없어.”
“아, 알겠어요.”
분명 요즘 들어 조금 주춤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한성그룹은 거대기업. 김귀란의 마음에 들어 그 기업의 자투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남는 것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봐! 어머니 밝은 색 옷 안 좋아하는 거 몰라! 당장 갈아입고 와 당장!”
“이거 신상인데….”
“신상이든 지랄이든 당장 갈아입으라고!”
하지만 모임 당일, 김귀란의 마음에 들어 어떻게든 한성의 한 귀퉁이를 얻어 보려는 그들의 욕망은 곧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왜냐하면.
곧 김귀란 그녀의 입에서 충격적인 선언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늘부터 한성그룹의 수장은 여기 있는 준영이 이 녀석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일순 깨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