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남들과는 다르게 (2)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를 보면 주인공 개츠비와 주변 인물들, 그러니까 미국 대공황 시기의 미국 부자들의 화려한 삶이 묘사되어 있다.
수만 달러짜리 명품정장과 비슷한 가격의 수제구두. 수십 만 달러짜리의 시계와 수백만 달러짜리의 차. 그리고 수십 명의 하인과 하녀들을 거느린 채 거대한 대저택에서 사는 사람들.
미국이 가장 아팠던 시기, 가장 휘청거렸던 시기에도 남들과는 다른, 남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화려한 삶을 사는 사람들.
마치 하늘에 있는 별빛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그들의 삶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영화에 나타난 그들의 삶이 약간 과장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에이, 설마 저렇게 사치를 부리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
‘허… 저렇게 화려한 집에 살면서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아니 저런 광란의 파티를 매일 같이 한단 말이야? 말도 안 돼.’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내가 김귀란의 집에 들어간 이후로도 바뀌지 않았다.
물론 김귀란의 저택에서의 삶은 그 전의 삶의 모습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틀.
예를 들어 아침, 점심 저녁 세끼 밥과 국이 꼭꼭 나오는 밥상.
제법 넓긴 하지만 잠을 잔다는 것에 충실한 침실.
꽤나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국산인 차량 등.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의 인식을 벗어나는 삶은 아니었던 것이다.
‘뭐 김귀란은 인물이 사치와는 조금 먼 인물이긴 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나는 오늘 내 생각, 그러니까 위대한 개츠비에 나온 미국 부자들의 화려한 삶이 사실은 과장된 것일 것이라는 내 판단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왜냐고?
…그거야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조금 특별했거든.
띵동-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보이는 풍경. 그것은 내가 전에 보았던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공간의 모습.
축구장 한 개쯤은 너끈히 들어갈 정도의 거대한 홀과 이층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아치형 계단, 그리고 위쪽으로 보이는 개인 테라스.
홀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유리창과 그 밖으로 보이는 찬란한 맨하탄의 야경.
마치 근대 유럽의 궁성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려하다는 수식어가 옹색하게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인 분위기의 장식품들과 눈부신 샹들리에, 초상화들.
홀 안을 분주히 오가고 수십 명의 사용인들과 아스라히 들리는 관현악 연주를 들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십 수 명의 신사들까지.
그간 서울에 있는 특급 호텔들을 경험하며 쌓아올렸던 내 화려함의 대한 지평을 다시 리셋시켜 버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한마디로.
화려하고, 화려하고 또 화려하다.
그것이 내 앞에 나타난 클럽 카본의 첫 인상이었다.
하지만 뭐 그럼 좋은 거지. 이런 곳에 돈을 쏟아 부을 정도로 그들에게 돈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거니까.
나는 살짝 굳어 있는 이어진을 잡아끌며 그 안, 돈벌레일지 맹수들일지 모르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일순, 정적.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말끔한 인상의 사용인. 알음알음 귓속말을 하며 우리를 바라보는 신사들. 그리고 그 와중에 나를 향해 ‘어린애가 여긴 왜?’ 라는 시선을 보내는 벨보이의 모습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이어진에게 모였다.
뭐 이정도면 나름대로 관심을 끈 것 같다.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좀 허술한 것 같은데?
아니 손님을 불렀으면 마중을 나와야 할 것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먼저 들어가면 되지.’
나는 공간의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일순 사람들의 눈가에 이채가 어렸다. 분명 옆에 있는 성인, 이어진보다 먼저 걸어 들어오는 나의 모습에 약간의 호기심을 느낀 것 같았다.
뭐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이니만큼 태연하게 움직인다.
그때.
이채를 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 사이, 한 남자 나타났다.
“Mr Lee? Are you Eujin Lee. the CEO of Oracle Investments?(미스터 리? 당신이 오라클 인베스트먼트의 CEO인 이어진입니까?)”
훤칠한 키에 잘 정리된 머리, 성공한 백인 남성의 전형처럼 생긴 남자. 곧장 우리에게 다가와 묻는 그 남자의 물음에 이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이어진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나름 능숙한 영어. 한국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조금 어색한 티가 나던 이어진의 회화 실력이 미국에 온 뒤로 엄청나게 빠르게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 환영합니다. 미스터 리. 제가 당신을 초대한 에릭 슈미트라고 합니다. 편하게 에릭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순간, 이어진의 눈이 꿈틀거렸다.
에릭 슈미트 그라면 나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우리가 처음 조지 소로스의 일본침공에 끼어들 때, 우리 측에 100만 달러라는, 개인 투자자들 중에선 제일 높은 금액을 투자한 인물의 이름이었다.
뭐 지금에서야 100만 달러 정도를 투자하는 사람이 제법 많긴 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보고 미친놈들이라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때라 특별히 기억하고 있었다.
‘뭐 그가 부동산 재벌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데 보아하니 우리를 이곳, 카본에 초대한 주체 또한 그였던 것 같다.
하긴, 그 동안 내가 보고 들은 것에 따르면 자본주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인맥이라는 개념이 차지하는 의미는 생각보다 더 크다고 들었다.
사업을 할 때는 물론 취업이나 대학입학에 이르기까지, 인맥, 정확하게는 믿을 만한 존재의 추천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우리의 상식보다 더 많은 것이다.
‘물론 중국의 꽌시처럼 비합리적인 친분관계는 아니지만.’
중국의 꽌시(?系)의 비합리성을 약간 제거하고 그 자리에 합리성을 집어넣은 문화 그것이 미국의 인맥인 것이다.
“아. 당신이… 반갑습니다. 에릭.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제법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어진 또한 알고 있는 지 생전처음 보는 남자, 에릭 슈미트를 향해 그가 반가운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
이쯤 되자 주변 신사들도 에릭이 초대한 손님이라는 것을 파악했는지 우리를 향해 우호적인 인사를 건네 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 오라클 인베스트먼트. 그곳이라면 나도 들은 적이 있지.”
먼저 고약한 성격으로 잘 알려진, 너무 나도 완벽함에 집중하는 성격이라 잘못한 직원에게 과격한 언사와 해고통지서를 날리는 것으로 유명한, 매일 같이 과속을 하며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를 하며 ‘효율성 때문이다’라는 대답을 날린.
전자기기를 설계, 개발, 제조, 판매하는, 시가총액 10억 5천만 달러의 다국적 기업 휴노스사의 소유주인 레온 와이슬러.
“오. 그래 그럼 투자했나?”
그 다음으로 레온 와이슬러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회사의 직원들을 갈아 성과를 내기로 유명한, 금융업계의 큰손 데릭 엑손.
“이거 우리집 밥버러지들을 데려왔었어야 했는데. 그놈들 소로스가 확실히 이긴다고 1억 달러나 날려먹었거든.”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해고하지 못해 시간을 끌수록 더 일찍 해고했어야 한다는 후회만 늘어간다’라는 명언을 남긴, 10년이라는 세월을 같이해 온 비서가 직급을 올려달란 말에 가차 없이 해고해 버린 테크 업계의 기린아 테크론의 덴 멀혼까지.
그동안의 자료조사를 통해 내가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수십 명이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아무래도 아직 우리가 카본의 회원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 자신들과 미래의 사업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물론 우리로서도 그들과 친분을 쌓아 나쁠 것이 없었기에 그들의 인사에 우호적인 태도로 대응했다.
“반갑습니다. 오라클 인베스티드먼트의 경영자 이어진이라고 합니다. 각계의 유명한 분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니 무척이나 반갑군요.”
“하하. 이어진이라 이름을 들어보니 혹시 한국 사람입니까?”
“네. 한국. 정확하게는 남한에서 왔습니다.”
“그렇군요. 하하 저희 아버지께서 전쟁에 참전하셔서 한국에 가셨었는데. 이거 반갑군요.”
그런데 그렇게 한창 이어진과 카본의 회원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던 그때.
“그런데 이쪽에 있는 꼬마 신사는 누구신지?”
휴노스의 소유주 레온 와이슬러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것이 궁금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미스터 리의 아들인 겁니까? 그런 것 치곤 미스터 리의 나이가 제법 젊어 보이는데.”
“아. 아닙니다. 이쪽에 있는 아이는…”
잠시 말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는 이어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희 오넙니다.”
일순, 놀람의 파도가 사람들의 얼굴에 퍼져나갔다.
“뭐라고요?”
“이 꼬마가 말입니까?”
사람들의 질문에 이어진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이쪽에 있는 소년이 저희 오라클의 오넙니다.”
“…아니 미스터 리. 오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오너는 당신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CEO죠. 실질적인 소유주는 여기 있는 이 소년입니다.”
그러자 잠시 여러 가지 표정을 짓는 사람들.
어떤 사람은 불쾌한 표정을.
어떤 사람은 다소 멍한 표정을.
또 어떤 사람은 제법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들 내가 오라클이라는 회사의 소유주이리라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이곳에 처음 오기로 했을 때 나는 고민했었다.
과연 이곳에서 나의 이름을 밝히고 나의 정체를 밝힐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어진의 이름 밑에 정체를 감춘 채 움직일 것인가.
물론 마음만 같아서는 내 이름, 내 몸으로 활동하고 싶었지만. 11살이라는 내 나이. 바꿀 수 없는 내 한계가 마음에 걸렸다.
본디 인간이란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믿고, 자신의 믿음을 벗어나는 것을 배격하는 존재. 그런 만큼 내 정체를 밝혀 얻는 손해 또한 무시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수면 아래에서 있을 순 없지.’
나는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보다 능동적인 선택을 하기로 결심했다.
약간의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편이 미래를 위해 보다 더 높은 층계를 쌓는 길이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라면 가능해.’
자유의 나라. 개척의 나라. 개인주의의 나라 미국이라면 어쩌면 내가 어리다는 것이 큰 흠은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정체를 밝히고 채 1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방금 전 나의 정체를 물었던 장본인 레온 와이슬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하. 그럴 수도 있지. 나는 13살 때 처음 사업을 시작했으니까.”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데릭 엑손이 씨익 웃으며 말을 받았다.
“레모네이드를 판 것도 사업인가?”
“그렇게 따지만 누구처럼 우표를 판 건 사업인가?”
그러자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에 온기가 실렸다.
역시 그들 대부분 사업가. 그런 만큼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한, 그리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나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이쯤에서 나의 존재감을 극대화, 그들의 머릿속에 나의 이름 석 자를 다시는 잊어버릴 일 없도록 박아 넣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