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227화 새 집을 짓다 (1)
신화양행과의 일이 마무리된 뒤, 우리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회사는 어디죠?”
“일단 한영정밀, 전우기전공업. 설화영공. 진우어패럴. 이수화학 정도야.”
현재 코스피 지수는 300대, 환율은 1600원대.
신문을 보던 라디오를 틀던 매체에서는 연일 기업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로 인한 연쇄도산, 실업자 급증 등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시점.
마치 물 빠진 저수지와 같은 상황인 대한민국에서 이곳저곳에 팔딱거리는 물고기, 기업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 설립된, 한때 도급순위 20위의 건실한 중견기업이었으나 IMF의 풍파를 맞아 거침없이 흔들리고 있는, 후일 업계 3위 대운건설에 인수되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잘 나갈 때엔 총 자산규모 1천억 원대로 추정되었던 중견 건설기업.
[우경 건설]
그리고.
계절가전, 생활가전, 주방가전, 환기제품으로 유명한, 70년대 산요전기와의 기술제휴로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같은 제품을 생산한 경험이 있는 역사와 전통의 기업.
[한주 전기]
프랑스의 전설적인 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발명한 살균법, 파스쳐라이제이션을 도입해서 만든 저온 살균 우유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인 민족고등학교를 만든 회사.
[파스쳐 유업]
이렇듯 평소에는 콧대 높았던, 한창때엔 수백, 수천억 원 단위의 매출을 올리던 알짜 회사들이 엄청나게 싼값에 시장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우경이란 한주 딜 끝났어요?”
“어, 그쪽에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을 테니까.”
“파스테 유업은요? 그쪽 창업자가 고집이 장난 아니라던데.”
“고집이 세긴 했는데. 뭐 이 상황에 장사가 있나. 그쪽도 어, 오늘 지분 매각 계약까지 완전히 끝났어. 이제 우리 회사야.”
“그래요? 정확히 얼마에 나왔죠?”
“정확히 84만6000주, 지분 100%에 300억 원.”
“…지분 100%에 300억 원이요? 그 정도면 완전 거전데요?”
“상황이 상황이니까. 아마 그 동안 벌여놓은 사업이 많아서 적자폭이 꽤나 크더라고.”
물론 현재의 상황.
자고 일어나면 회사 하나, 그룹 하나가 무너지고 있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조금만 더 기다리면 완전히 무너진 회사들, 부도선언 후 잘게 회쳐져 시장에 나올 회사들을 엄청나게 싼 값에 집어올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굳이 그렇게까지는 하지는 않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한다면 돈이야 적게 들지 모르지만 그래선 내가 욕했던 과거의 외국인들, 그들의 행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무서울 만하죠. 벌써 300대 기업들 중에서 20%가 무너진 판국이니까. 아마 그쪽에서도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내수로 먹고 사는 시장인데 답이 없을 거라고.”
“그렇겠지. 아무래도 식품이나 유통 쪽은 국내 경제나 정세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게다가.
‘그렇게 하면 껍데기만 남는다.’
분명 회사의 이름, 회사의 주식은 남겠지만 그렇게 하면 회사를 만들어 낸 이들, 사람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노하우가 흔들렸다.
시설 또한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 시설을 움직이는 사람 또한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으니까.
‘싼 값에 껍데기를 사 오는 것보다는 좀 더 돈을 주고 알맹이를 지키는 게 나아. 알맹이는 소모되면 채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때문에 나는 되도록 정석적인 딜을 통해 회사들을 인수했다.
그들 기업이 가진 액기스를 온전히 뽑아내려 한 것이다.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저렴한 가격이었으니까.
“한 사장님. 저희를 믿으시죠. 우경건설이 한때 업계 20위의 규모를 자랑했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 또한 뚜렷하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러니까 저희에게 팔려 간다 생각하지 마시고 파트너를 얻는다 생각하십시오. 업계 1위 한번 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사장님. 듣기로 과거 산요와 지술 협력을 통해 생활 가전 분야 개척을 시도해 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오라클과 함께 하신다면 5년 내에 업계 3위, 10년 내에 업계 1위의 기업으로 만들어 드리죠.”
“주 사장님 아시잖습니까.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고사한다는 걸. 뭐 우유를 먹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에 일반 우유보다 훨씬 더 비싼 프리미엄 우유를 먹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희와 함께 하시죠. 저희가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천사의 얼굴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회사들이 현재의 시점, IMF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에 나의 제안을 조심스럽게 대응하며 받아들였지만 개중에는 정말이지 상황 파악을 못하고 멋대로 날뛰는 사람들, 정신없이 뻗대는 회사들도 있었다.
“5천억 원. 그 이하로는 못 팝니다.”
바로 이런 자들.
나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 가벼운 미소를 보이는 남자, 영원무역이라는 무역회사를 이끌고 있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5천억 원이요?”
그러자 그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회사의 한 해 매출만 무려 1천억 원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 정도의 값어치는 있는 것 아닙니까?”
…아무래도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만큼 나를 돈 많은 호구 취급을 하려는 것 같았다.
뭐 생각해 보면 그럴 생각을 가질 만도 했다.
아직 IMF 초기. 아직은 버틸 만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을 시즌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나라가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4년간 정말 지옥과 같은 기간이 펼쳐진다는 것을 인식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했겠지. 이 기회에 한몫 크게 잡아 보겠다고.
‘아마 다른 회사들 이야기를 들었겠지.’
…문제는. 내가 그 장단에 춤을 출 생각이 없다는 거지만.
“남윤중 사장님.”
“네. 김 회장님. 그럼 받아들이실….”
“정신 차리시죠.”
“……뭐?”
“헛소리 작작하고 정신 차리란 말입니다. 우리 오라클이 파악한 귀사, 그러니까 영원무역의 평균 매출은 한 해 300에서 500억 원, 당신이 말한 매출 1천억 원은 1994년 한 해, 그것도 고베 대지진으로 인한 일시적인 특수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거기다 그 1천억 원이라는 것도 극히 이익 폭이 적었던 사업이라 영업이익은 꼴랑 50억 원… 솔직히 저희 측에서도 마이너스 B등급, 투자 유의로 책정했던 것이 바로 귀사란 말입니다. 기껏해야 500억 원도 안 될 기업가치를 가지고 뭐요? 5천억?”
“…….”
“그러니까 결정하십시오. 그냥 온전히 저희가 책정한 가격에 수긍해서 고개를 회사를 정리하시던가 아니면….”
“…아니면?”
“부도처리된 다음에 개털이 되어 쫓겨나시던가. 아, 참고로 귀사의 채권일체는 저희가 매입을 진행 중이라는 걸 알아 주시죠.”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남자, 영원무역의 사장이라는 작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뭐 그로서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지만 이미 힘의 강약은 명약관화, 그와 나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
그리고 그 결과.
“아저씨 영원무역 건 어떻게 됐어요?”
“아 거기? 뭐 방법이 있나. 이곳저곳에서 눈치 보다가 결국 우리한테 넘기기로 했어.”
“얼마예요?”
“10억 원. 그나마 빚은 안 만들었을 거야.”
“10억 원이요?”
“어. 뭐 가뜩이나 찾아보니까 덩치만 컸지 회계도 엉망이더라고.”
“…뭐 자업자득이네요.”
나는 총 15군데의 기업.
IMF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범접할 수 없었던, 꽤나 높게 평가받던 기업들의 이름들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좋아요. 그럼 지금까지 끝난 딜이 몇 개나 되죠?”
“딜 끝난 것만?”
“네.”
“잠깐만 기다려 봐.”
[1. 쌍호자동차. 1996년 기준 자산총액 5조 원]
[2. 신화양행. 1996년 기준 자산총액 1천 5백억 원]
[3. 우경건설. 1996년 기준 자산총액 1천억 원]
[4. 한주전기. 1996년 기준 자산총액 1천억 원]
[5. 파스쳐유업. 1996년 기준 자산총액 1천억 원]
.
.
1997년 이전 시가총액 합산 총 7조 원.
총 매출액 1조 원의 거대한 기업 집단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
그것도 제법 염가에.
[1. 쌍호자동차. 3조 7천 500억 원 인수.]
[2. 신화양행. 500억 원 원 인수]
[3. 우경건설. 250억 원 인수]
[4. 한주전기. 175억 원 인수]
[5. 파스쳐유업. 300억 원 인수]
.
.
“총 15개쯤 되네.”
“그런데 가격이… 이거 이렇게 싸게 인수해도 될까 싶을 정도의 가격이네요.”
“뭐 그렇긴 하지. 평소였다면 적어도 7조, 많으면 8조까지 갔을 기업들이니까. 하지만 뭐 지금은 많이 떨어져서 그 정도는 아닐 꺼야. 기껏해야 한 재계 40위 정도? 아니다 요즘 무너진 기업이 많으니까. 한 30위권은 가능할 거야.”
내게 자료를 건네며 말하는 이어진, 그의 말에 가볍게 입을 열었다.
“재계 30위라… 그 위로 가는 건 힘들까요?”
“아무래도. 뭐 우리도 그동안 제법 규모를 키우긴 했지만… 사실 우리만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잖아.”
뭐 하긴 그랬다.
내가 알기로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 경제적 상황은 거의 춘추전국 시대.
약한 기업은 추락하고 강한 기업, 여력이 있는 기업들은 약한 기업들을 먹고 덩치를 불리는 약육강식의 시즌이었다.
아무리 죽는 소리를 해도 그 와중에 힘이 있는 자들, 욕심이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선명하게 표출시키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어디가 제일 먼저 움직였죠?”
“대우. 현대랑 삼성은 서로 싸우느라 정신없고 대우 혼자 미쳐 날뛰고 있지. 들어보니까 이번에 못 쓴 돈 아주 팍팍 쓴다고 하더라고.”
그 양반 성질 하고는.
아무래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의 성미 상 지금 이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쌍호차에 쓸 돈이 굳은 만큼 자금력은 충분하겠지.’
하지만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승부사. 사냥꾼으로서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지.’
좋아 그렇다면.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사람, 이어진을 향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좋아요. 아저씨. 그럼 여기서 일단 스탑이에요.”
그러자 이어진이 두 눈을 꿈틀, 크게 뜨며 나를 향했다.
“아니 왜? 좀 더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지금 이 타이밍, 이 황금 같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요. 지금은 멈출 때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냐하면.
“제법 덩치 큰 먹이를 먹으러 갈 거거든요.”
사냥 장소는 바로 평창동, 김귀란의 사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