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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253화   미래를 잡다 (1)

“준영아! 여기 양말.”

“네.”

“여기 넥타이!”

“네.”

“여기 행커칩!”

“네?”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법 화려한 색의 행커칩을 들고 있는 최선영 여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웃는 표정으로 내게 행커칩을 들이밀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아니 엄마 아무리 그래도 행커칩은 좀….”

때문에 내가 조심스럽게 어머니에게 입을 연 그 순간, 어머니의 표정의 시무룩하게 변했다.

“왜? 이거 엄마가 직접 디자인 한 건데. 별로야?”

아차.

이건…….

내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행커칩을 손으로 그러쥐었다.

아무래도 실망이 큰 것 같았다.

“아뇨. 이뻐요. 이쁜데….”

“이쁜데?”

“어휴, 할게요. 하면 좋죠.”

결국, 나는 백기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 순간,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어머니의 얼굴에 활짝 꽃이 피었다.

“하하. 고마워. 역시 우리 아들.”

그리고는 빠르게 행커칩을 정리, 상의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보아하니 또 그녀의 연기에 속은 것 같았다.

‘이거 보아하니 또 걸려 버렸구만.’

하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약간은 유쾌했다.

과거, 언제나 고요한 얼굴, 이 세상 모든 시름을 다 가진 듯 힘없이 웃고 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모습보다는 지금처럼 밝게 웃는 어머니의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다웠으니까.

“자 그럼 시계는… 롤렉스랑 율리스나르덴이 괜찮을 거 같은데 어때?”

“아니 이것들은 다 어디서 샀어요?”

“레이첼이랑 쇼핑 좀 했지.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을지 몰랐는데 있더라고.”

이거 며칠 전부터 바쁘게 움직이시더니….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입고 쓸 것들을 고르셨던 것 같다.

하지만.

“전 이거면 돼요.”

나는 내 앞에 내밀어진 명품 시계들을 일별하며 팔목을 들어보였다.

그곳에는 ‘Oracle’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시계.

심플한 디자인의 손목시계가 자리해 있었다.

“준영아 그건….”

“엄마가 처음 디자인한 시계죠.”

그러자 잠시 촉촉해지는 어머니의 눈빛, 그녀가 애정과 걱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래도… 높은 사람들 만나는데.”

“괜찮아요.”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한텐 엄마가 제일 높은 사람이니까.”

그러자 그 순간, 어머니의 눈이 촉촉하게 변하더니 이내 두 손으로 내 두 볼을 부여잡는다.

“아이구 우리 아들. 엄마 순간 설렌 거 알아? 누굴 닮아서 이렇게 멋진 거야?”

어느새 커진 키 때문인지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뿌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이내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준영아 정말 괜찮겠어?”

“뭐가요?”

“아니 오늘 가는 곳. 그러니까 청와대잖아.”

“에이 뭐 괜찮아요. 어차피 저번에 한번 다녀온걸요.”

“아니 그래도… 이번엔 완전 다른 사람이니까. 들어보니 요즘 심상치 않다는데?”

그녀가 조금은 조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가는 장소가 장소인 만큼 약간 걱정되는 것 같았다.

“뭐 그렇긴 하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그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걱정을 하는 건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일 테니까.”

*

잠시 뒤.

청와대에 도착한 나는 청와대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청와대의 접객공간, 상춘재로 향했다.

“김 회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다들 도착하셨나요?”

곧 있을 대통령, 재계인사들과의 회의를 위해서였다.

“네. 거의 대부분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곧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늘의 회의에 초대된 사람들, 재계서열 상위의 사람들과 오늘 회의를 주최한 남자. 김대중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오라클의 김준영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 반가워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지요?”

인동초(忍冬草).

겨울을 버티고 피어난다는 꽃.

민주화 투쟁에서의 수많은 시련, 대선에서의 수많은 고배, 그리고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대권을 잡은 남자.

그 남자의 첫인상은 부드러우나 강고한 느낌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 전에 한번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하하 아니에요. 아니야. 뭐 사업하시는 분이니 제법 바쁘신 게 당연하지.”

그러나 상황이 상황, 우리는 채 인사를 마치기도 전 빠르게 회의를 시작해야만 했다.

“자 그럼 다들 도착한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과 경제수석, 그리고 그외 실무진들, 재계서열 상위의 대기업들의 총수들과 경제학자들, 우리나라 경제의 핵심들이었다.

“자 그럼….”

재계 인사들과 대통령의 문답이 이어졌다.

“허심탄회하게 묻겠습니다. 이 상황.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 상황이라 하심은… IMF 상황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 상황.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라는 이 상황.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만약 타당한 해결책을 제시하실 분이 계신다면 기탄없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내 전향적으로 받아들일 테니까.”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주도한 회의.

대한민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오늘의 회의는 그러나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만큼 현 상황, 대한민국의 상황이 답이 없는 상황이었던 데다가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각계의 입장 또한 극명한 차이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렵습니다.”

“…어렵다고요?”

“그렇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외신용도가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어느 국가도 대한민국 기업에 돈을 빌려주지 않고 수주를 주지도 않고 있습니다.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한번 넘어졌었으니까요.”

“……그 문제라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이번에 모인 금을 통해 충분히….”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무리 200톤이 넘는 금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단기간에 신용을 회복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기업들이 쓰러질 거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일단 정부의 신용 보증과 더불어 상위 20개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 그리고….”

“그리고?”

“고용체계의 완전한 자유화. 그것이 필요합니다.”

“고용의 완전 자유라는 말은….”

“IMF가 권고했던 대로 고용탄력화를 전방위적으로 시행하자는 말입니다. 일단 우리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가합니다. 물론 우리가 IMF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완전 자유화라니 그것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습니다.”

“각하, 현실을 보셔야 합니다. 어차피 국민들은 나중에라도 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이 무너지면 이 나라는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될 겁니다. 각하. 일단 이 나라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계 인사들과 대통령의 말과 눈빛, 그것이 쉴새 없이 부딪쳤다.

“그것은…! 그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마속을 참하는 마음으로 용단을 내리셔야 할 땝니다. 잘못하면 이 사태가 장기화 될 수도….”

결국, 6시간이 넘는 정부와 재계 인사들의 회의.

대한민국의 향후 100년을 결정한 회의는 마땅한 해결책도 나오지도 않은 채 끝나고 말았다.

“후…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겠군요.”

“……동감입니다.”

물론 단기적인 협의, 단기적인 약속 같은 눈에 띄는 해결책들은 제시되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보여 주기식, 현 사태를 해결한 눈에 띄는 해결책을 제시되지 않았다.

뭐 사람들의 욕심은 때론 국가의 존망보다 더 깊은 것이었으니까.

“……그럼 일단 구조조정 정도의 경우 차차 조율해 나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정부 지원 정책 또한 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리도 곧 조절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장기간의 회의가 끝난 뒤, 회의의 주재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나섰다.

“크흠.”

그러자 눈치를 보던 재계 인사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벗어났다.

다들 이번 일로 인한 미래를 준비하려는 모습이었다.

“빨리. 회사에 연락해. 곧 정부 지원책 발표가 있을 거라고.”

“구조조정 올 스탑해 놔. 들어가서 다시 손볼 테니까.”

그런데 그때.

툭툭-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뭐지?’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곳에는 얼마 전 보았던 얼굴들.

정영주와 구현모.

현대와 LG 두 기업의 총수가 자리해 있었다.

“작은 선생. 오랜만이야.”

“오랜만이군 김 회장. 허허 신수가 아주 훤하구만 그래.”

방금 전까지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터였다.

“안녕하세요. 미처 인사도 못 드렸네요.”

“한가롭게 인사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지. 그런데… 김 회장은 안 왔나 보구만. 이상하군 명단에는 분명 있었는데.”

정영주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김귀란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 같았다.

“할머니요? 할머니라면 지금 유럽에 가 계세요.”

“응? 유럽?”

“네. 유럽 쪽 현지 법인에 일이 생기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정영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쉽구만. 기아차 문제로 긴히 이야기할 게 있었는데.”

“뭐 금방 돌아오실 테니까 걱정마세요. 아마 다음 주쯤 돌아오시겠죠.”

“그렇겠지. 허허 생각해 보면 부러워, 외국에 있는 덕분에 이런 지리한 회의도 벗어날 수 있었으니.”

그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의 말 속에는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이 자리해 있었다.

“방금 전 회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때문에 내가 묻자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뭐 그렇지. 이런 회의야 백날 해봐야 소용 없으니까.”

“그래요?”

“그래.”

그런 뒤 다시 고개를 돌린 그가 눈살을 찌푸르며 청와대 직원들을 향했다.

“봉황이 추구하는 해결책은 꿈같은 이야기야. 인내와 절치부심.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 어차피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 사니까. 안 그런가?”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구현모,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지. 뭔가 해법이 나오기에는 너무 늦었지. 그러니 버티고 또 버텨 다른 놈들의 신뢰를 끌어내야지. 뭐 대통령은 그게 싫은 것 같지만 말이야.”

두 사람의 시선에는 자신들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잠시 냉소적인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던 정영주, 그의 시선이 돌연 나를 향했다.

“그런데….”

“네?”

“혹시 자네 오늘 한가한가?”

응?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한가하냐고요?”

때문에 내가 약간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묻자, 그가 사탕을 노리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나를 향했다.

“아니 한가하면 오랜만에 우리 집에서 차라도 한 잔 하는 게 어떤가 해서. 마침 우리 막내 손녀도 마침 집에 와 있고.”

말을 마친 그의 눈에 짙은 집착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손녀를 소개시켜 주려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아 그게….”

그때.

“에이, 가희동까지는 너무 멀지. 그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는 건 어때. 내 막내딸이 딱 자네 나이 또랜데? 같이 이야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구현모, 그가 정영주와 비슷한 시선으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가희동이 청와대에서 먼 곳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만.”

“허허 효자동에 비하면 먼 곳이지 안 그래?”

“효자동에 구 회장 집이 있었어?”

“몰랐어? 효자동에도 있고 삼청동에도 있지.”

……아니 이게 무슨 그림이지?

순간, 두 사람, 방금 전까지 제법 우호적이던 두 양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니 구 회장 정말 이런 식으로 할 거야?”

“허, 이런 식은 무슨. 어떤가? 김 회장. 우리 집으로 갈 텐가?”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두 분 다 죄송해요.”

“응?”

왜냐하면.

“죄송하게도 스케줄이 남아 있거든요.”

나에겐 아직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아니 어디에서?”

나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향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내려 가리켰다.

“바로 여기서요.”

곧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이뤄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 나라의 미래가 내 손에 잡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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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회귀 재벌 - 1993 회귀 재벌-2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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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회귀 재벌 - 1993 회귀 재벌-2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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