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늑대와 함께 춤을 (2)
탁-
테이블에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 그 소리에 고개를 든다, 그러자 내 앞으로 초조한 안색을 보이고 있는 남자. 구현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망입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구현진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이야기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내가 생각했던 정보. 그러니까 이번 일에 구현진의 LG칼텍스가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말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히 구 회장님. 구 회장님까지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구현모 회장님과 저의 관계를 아시잖습니까?”
일순 그의 얼굴이 흐려진다.
그의 형님이자 얼마 전 재계를 은퇴한 남자. 구현모. 그와 나 사이에는 제법 많은 교류가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머릿속은 복잡할 것이었다.
형제와 관계가 있던 나를, 그것도 공격을 해 보려다 실패하고 온 상태였으니 면목이 없겠지.
아니나 다를까 다시 보인 그의 눈빛이 꽤나 착잡한 빛을 띠고 있었다.
“면목 없습니다. 제가 뭔가에 씌었던 것 같습니다. 오라클 쪽에서 유전을 발견하고 그걸 들여온다는 소리를 듣자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연배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보기 힘든 모습, 하지만 그도 나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와 나 모두 일반적인 사람, 일반적인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가만히 있었다면, 저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면, 보다 원만한 관계가 이뤄졌을 테니까요.”
“……그건….”
“뭐 좋습니다. 지난 일이야, 차지하고.”
잠시 구현진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이곳에 오셨다는 말은 뭔가 결단을 내리셨다는 말씀이시겠죠?”
그러자 진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구현진,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묵묵히 입을 열었다.
“김 회장님.”
“네. 구 회장님.”
“살려 주십시오.”
그러더니 쿵- 무릎을 꿇었다.
“살려 달라?”
“네. 살려 주십시오. 그렇게만 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뭐든 다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려 한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마주 몸을 숙였다.
“구 회장님. 이러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그럼….”
“이런 식으로 퉁칠 만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네?”
살짝 놀란 눈, 그 눈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구 회장님. 저는 구 회장님을 좋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 많은 분들 중 이렇게 먼저 사과를 하러 오신 분은 처음이시니 말입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 그것을 바라보며 바지를 툭 털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특이하다.
상대에게 상처를 줄 땐 참으로 가열차게 상처를 주면서도 용서를 구할 땐 꽤나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곤 한다.
마치 이 사과를 받아 주지 않으면 네가 나쁜 놈이라는 듯이.
“……그럼 어떻게….”
아니나 다를까. 예상외의 사태라는 듯 약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구현진, 그가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만족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나는 구현진, 한때 나를 물어뜯으려던 늑대였으나 이제는 야성을 잃어버린 존재,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대가.”
“대가라면….”
“제 상처를 후벼 팠으니 그것을 메울 수 있을 정도의 대가, 그것을 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지막 기회와 함께.
“…살려는 드리죠.”
*
잠시 뒤.
“……가지.”
오라클을 나온 구현진이 수행원에게 말했다.
그러자 잠시 고개를 숙인 수행원이 차를 운전, 오라클을 떠나기 시작했다.
“…….”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서울의 야경을 바라본 구현진, 그의 머릿속에 방금 전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김준영이라….’
사실 처음 그는 이번 만남, 이 만남에 대해 제법 가벼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김준영을 충분히 설득,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킬 자신이 있었다.
아무렴 그는 지난 수십 년, 이 나라의 경제계에 자리해 온 남자, 김준영의 나이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 동안 이 나라를 지켜본 남자였으니까.
‘적어도 모가지는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오늘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니 얻기는커녕 무거운 숙제만을 안게 되었다.
그것도 풀지 않으면 자신이 일궈 온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질 만한.
“후….”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이제 막 스무 살, 자신의 손자보다 더 나이가 어린 청년, 그가 자신의 앞에서 자신을 압박하다니.
하지만 문제는 그, 김준영이 자신에게 제안을 걸었을 때 그가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김준영, 그가 가진 힘 그가 가진 생각, 그것들이 일순 그를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김귀란 회장의 자식이라더니… 그보다 더한 것 같군.’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두려움은 더욱 커진 상태였다.
이제 막 스무 살에 불과한 청년.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파릇파릇한 새싹.
그 청년이 만약 5년, 아니 10년이 지난다면 그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자 절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현재의 김준영이 가진 것들조차 감당이 안 되는 그로선 도저히 그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건 지금의 그보다 더욱 더 무거운 존재가 되어 있을 거라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빠르게 생각이 정리되었다.
“이봐.”
“네. 회장님.”
침몰하는 배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들어가는 대로 약속 하나 잡지.”
그의 눈동자 안으로 여의도, 63빌딩의 모습이 따갑게 박혀 들었다.
*
며칠 뒤, 한 가지 뉴스가 신문을 탔다.
[이번에 또? 오라클 이번에도 해외 유전 개발 성공! 무려 ‘13억 톤’ 규모! - 한성일보. 2002. 05. 20]
그러자 얼마 전 있었던 김준영 회장의 발표로 후끈 달아오른 국내 분위기가 한층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코요테123 : 뭐? 하… 13억 톤? 아니 저거 실화냐? 배럴로 치면… 미친 100억 배럴?]
[Y2K : 100억 배럴 ㅋㅋㅋ 아니 뭐 석유가 이렇게 찾기 쉬운 거였어?]
[그렌라간 : ㅋㅋㅋ 그럴 리가 다른 회사들은 저거 찾다가 몇조씩 손해보고 막 그러는데. 왜 저번에 SL에너지에서 해외 유전 찾는다고 찾았는데 쪽박이었잖아. 꼴랑 하루 125배럴짜리. 저건 오라클이 이상한 거임]
[딸기공듀 : ㅋㅋㅋ125배럴? 역시 우리 회장님 최고라니까!]
[nayo241 : 회장님 날 가져요 헉헉!]
[JAE-DRAGON : 아… 빌어먹을…]
모두가 예상한 것이다.
중국에 있는 유전 5억 톤 그리고 13억 톤에 이르는 해외 유전들.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남자라면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뭐 여론이란 원래 그런 법이었으니까.
[허구윤♡ : 야 이 졍도 슥유 양이믄 진쨔 우리나라 프로 야구 경기장에 돔구장을 맹그는 것도 가능하그등요? 그라뮨 우리나라 쳬육슨수들 셩적도 팍팍 올라가버기믄서 우리니라의 국격또한 올라가 버리는 그그든요?]
[딸기공듀 : ㅋㅋㅋ 아니 왜 갑자기 돔구장?]
[Y2K : ㅋㅋㅋ 야구장만 가능하겠냐! 축구장도 다 돔구장으로 만들 수 있지!]
[딸기공듀 : 그러게? 월드컵 경기장도 다 돔구장으로 만들 수 있겠다ㅋㅋㅋ]
하지만 그 기사를 보고 웃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 사람의 이름은 우정인. 우리나라 최대의 정유기업이자 에너지 기업, SL에너지의 총수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그의 측근들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요즘 들어 우정인 회장의 신경이 날카로웠던 만큼 혹시나 싶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뭣 때문에 이런 큰일도 잡아내지 못한 거야!”
“그게… 아무래도 그동안 국내 언론사에 집중하던 차라….”
순간, 우정인 회장이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측근들의 대답을 들은 그때. 지난 두 달간의 일들이 그의 발목을 콱 하고 물어 버린 것이다.
“젠장….”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온 자도, 그렇게 훈육된 자도 아니었으니까.
“……13억이라는 수치는 확실한 거야?”
“아무래도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노펙, 페트로차이나, CNOOC, 엑손, 로열더치셸, 셰브런 모두가 같은 내용을 발표를 했습니다.”
“아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때문에 그는 움직였다.
무려 13억 톤. 그 검은 폭포수가 쏟아지고 나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테니까.
“물량이 들어오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최대 2년, 아니 1년도 간당간당할 겁니다. 아마 가격 경쟁 자체가 안 될 테니까요.”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단 말인가?”
“원유가 자체가 차이가 납니다. 근본적인 가격이 차이가 나는 만큼, 세금에서까지 문제가 이어지게 될 겁니다. 물론 지금이야 우리가 인프라 측면에서 앞서 나가고 있긴 하지만 가격 경쟁력에서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유가가 떨어지거나 그러진 않을까? 20달러 밑으로만 떨어지면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한동안은 힘들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미국과 중동의 관계가 지금처럼 험악한 이상,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될 겁니다. 물론 유가가 떨어진다고 해도 버티기 힘든 건 매한가지고요.”
“빌어먹을! 어쩔 수 없겠군. 좋아! 정유사들에 연락해! 긴급이라고.”
“하지만… 저번 일로 다들 몸을 사리고 있는 상태라….”
“웃기는 소리 말고 지금 당장 오라고 해! 이런 상황에 자중해 봐야 말라죽을 뿐이야! 정 오기 싫으면 각오하라고 해! 말라죽기 전에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빠르게 약속을 잡은 우정인, 그는 빠르게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라클에 관련된 자료들 무조건 긁어모아! 그놈들이 약속한 물량이 국내에 들어오기 전에 무조건 결판을 낸다!”
이른바 울프팩(wolf pack) 작전.
가일층 악화일로를 겪고 있는 기업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려 한 것이다.
아무리 건장한 거인이라도 사방에서 물어뜯다 보면 실수가 생길 테니까.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놈인 거야. 아니 무슨 놈의 석유가 그렇게 팡팡 나와. 후… 정말 미쳐 버리겠구만.”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의 결단은 꽤나 늦어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본디 늑대들이란 폭압적이고 능력 없는 우두머리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왜냐하면….
“오셨습니까?”
이미 대세는 기울었으니까.
그렇게 그가 국내 정유사 회장들과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당신은?”
김준영, 그리고 그가 자신의 프라이드라 생각했던 이들의 모습이었다.
순간, 우정인, 그는 깨달았다.
늑대들이 새로운 우두머리를 세웠다는 것을.
그리고,
“……젠장.”
자신의 꿈, 자신의 왕국이 무너졌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