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거인(巨人) (1)
‘이봐, 해 봤어?’
정영주.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산증인이자 한국 경제 성장 신화의 대명사.
1915년 강원도 두메산골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994년 현재 재계서열 1위의 거대한 그룹 현대를 만들어 낸 존재.
그리고.
국내 최초의 자동차 개발.
중동 진출.
88 올림픽 유치.
울산 조선소 건설.
소양강댐 건설.
경부고속도로 건설.
원자력발전소 건설 등.
국민소득이 80달러에도 못 미치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전설 같은 기담들을 만들어 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
그가 바로 정영주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때문에 나는 차를 타고 정영주 회장을 만나러 가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영주 회장은 하나의 신화.
자수성가의 아이콘.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긴 실제로 그를 모델로 한 드라마도 나올 정도였으니···.’
물론 정영주 회장의 사후 현대그룹 왕자의 난으로 그가 만들어 낸 거대한 제국, 현대그룹은 사분오열 쪼개지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분명 예전이었다면 정영주 회장은커녕 정영주 회장의 수많은 자식들, 아니 그 자식들의 자식들도 만나지 못했을 내가 이제는 당당하게 그를, 재벌들의 재벌인 정영주를 만나러 가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뭐 김귀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귀란이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전 내가 그녀의 집에 도착 차에 탔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줄곧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덕분에 차 안에 탄 나는 줄곧 음소거 상태. 강제 면벽수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나를 태운 차가 인왕산 중턱에 있는 정 회장의 청운동 저택 안으로 스미듯 흘러들어 갈 때쯤, 갑자기 김귀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장되는 것이냐?”
응? 무슨 말이지?
정영주를 만난다는 것에 대한 기대 그리고 흥분은 가득했지만 긴장은 상대적으로 엷은 상태라 일순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김귀란을 바라보자 김귀란이 특유의 고요한 눈으로 나를, 아니 정확하게는 나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허허허. 뭐, 긴장한다는 것 자체가 칭찬해 줄 일이지.”
이게 무슨 소리람······?
나는 빠르게 내 손을 확인했다. 그러자 내 손,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아 여린 내 손에서 송글송글 배어나와 있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
아무래도 그녀는 내 손에 배어나온 땀, 기대와 흥분 때문에 배어나온 땀을 보고 내가 긴장한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하긴 현대가.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재계서열 1위의 현대그룹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그녀 또한 내가 긴장한 것이라 생각했겠지.
현대, 그리고 정영주라는 이름은 그 정도의 값어치가 있는 이름이니까.
하지만.
“아니요. 기대는 되는데 긴장은 안 되네요.”
나는 달랐다.
나 또한 이 당시 현대그룹의 힘을, 또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영주 회장의 위업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이름에 압도 되거나 혹은 그 힘에 두려움을 갖지는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상황, 내가 만날 사람들에 대한 기대만이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간이 커진 건가. 아니면 내가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인가?’
아마도 두 가지 모두 다 맞겠지.
그러자 잠시 묵묵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귀란이 이내 피식,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치기인지 정말 알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됐다. 하긴 내 앞에서도 능글능글하게 할 말 다 하는 놈이 정 회장 그 늙은이 만나러 간다고 긴장할 리가 없지.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그리고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다소 뻔뻔해 보일 수도 있을 내 태도가 그녀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저 참. 성격 하난 진짜 특이하다니까.’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한성그룹의 재계서열은 12위.
자산총액은 8조 원 정도.
그에 반해 현대그룹의 재계서열은 부동의 1위.
자산총액 88조 원 정도였다.
단순히 계산으로 봐도 무려 8배.
자산총액을 제외한 매출, 인재풀, 사회 경제 문화계에 대한 영향력 등을 고려해 보면 한성과 현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4차원의 벽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내가 정영주 회장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 말한 당일에 그와의 약속을 잡을 수 있었던 거지?
아무리 같이 재벌가라 묶인다고 하더라도 한성과 현대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텐데?
궁금한 마음에 김귀란에게 그 이유를 묻자 묵묵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담담히 내 질문에 대답했다.
“가 보면 안다.”
그리고는 그냥 꾹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니 뭐? 이게 끝이야?
나는 어이없는 마음에 김귀란을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입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잠시 뒤.
나는 왜 그녀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와 김귀란을 태운 차가 정영주 회장이 있는 청운동 자택 안에 도착, 사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저택 안쪽으로 들어간 그 순간.
“아이고 누이! 이거 오랜만이야. 저번 모임 이후로 6개월 만인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목소리.
그 세대 사람으로는 드물게 180㎝에 이르는 큰 키를 가진 노인 한 명이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이내 김귀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뭐···?’
순간, 나는 멍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소박하다 못해 다소 무뚝뚝하고 투박한, 전형적인 시골사람의 풍모를 지닌 노인.
그 노인의 얼굴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정영주 회장, 그 사람의 얼굴이 맞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누이? 지금 누구한테? 김귀란한테?
하지만 정영주 회장에 말에 대한 김귀란의 대답도 제법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요즘 빨빨 거리고 돌아다니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용케 집에 붙어 있었구만.”
어?
지금 김귀란이 정영주 회장한테 야자를 튼 거야?
전생에서 보았던 자료들 중에 정영주 회장의 성격에 대한 자료도 있었기에 순간적으로 긴장을 했다.
정영주. 그는 필요하다면 일개 사원들 앞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대중가요가 부르며 디스코를 출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격렬하고 직설적이며 간결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영주는 그저 사람 좋게 웃을 뿐이다.
“끌끌. 오랜만에 누이가 오라버니 집에 놀러 온다는데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빼놔야지. 안 그래?”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김귀란이 피식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오라비는 무슨 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왜 저번에 포철 박태준이 전경련 건 이후로 그런 말 안 하기로 한 거 기억 안 나?”
“아. 그랬나? 이거 늙은니까 영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맨날 자긴 몸이 건강해서 치매 걱정 없다느니 120살까지 산다느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양반이 무슨··· 꼭 자기 불리할 때만 그런 말을 하지?”
“허허 들켰나?”
이쯤 되자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김귀란이랑 정영주가 이렇게 편안한 사이였나?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이북 출신, 그리고 맨손으로 남한에 내려와 자수성가 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설마 그 정도 공통점으로?
하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그림이었다.
‘······’
그러는 사이 나와 김귀란은 손님 자격으로 청운동 저택의 안쪽으로 안내되었다.
달칵-
주변을 돌아보자 재벌가의 응접실 치고는 다소 소박한, 아니 솔직히 말해 볼품없어 보이는 가구들과 실내 장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정영주 회장이 자신이나 주변을 꾸미는 데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니 그건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데? 응접실 문에 페인트 색은 다 바래 있고. 어? 저긴 타일이 좀 깨져 있잖아?’
그런데 그때.
“왜 구경할 게 별로 없어?”
정영주 회장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이에 비해 제법 뚜렷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잠시 멈칫한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아니요. 회장님 댁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 신기해서요.”
“그래?”
“네. 굉장히 정갈하고 담박한 분위기여서 사람의 가만히 있으면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에요.”
순간, 정 회장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허허. 이 녀석 보게. 누이. 오늘 이거 놀러온 게 아니라 자랑하러 온 거구만. 요 녀석 자랑하러 말이야.”
그리고는 파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 몇 살이냐? 내 손주 사위 하지 않으련?”
그러자 잠시 나와 정회장을 모습을 바라보던 김귀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신소리를 하는 걸 보니 120살까지는 너끈하겠구만. 난 또 저번 대선 때문에 꽁해져서 골골대고 있나 했더니.”
그 말에 정 회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요즘 김영삼 그 양반 때문에 아주 골치야. 아니 대결에서 이겼으면 그러려니 하던가 할 일이지 괜히 꽁해 가지고 세무조사다 지랄이다. 아주 사람을 못살게 굴고 있어.”
아무래도 저번 대선, 그러니까 김영삼 대통령과 맞붙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거친 모습으로 찻잔을 내리는 정회장의 모습에 김귀란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게 정치하지 말라니까 괜히 헛바람이 들어가지고.”
“허허 사내로 태어났으면 대통령 한번 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언제까지 정치인들한테 경제인들이 끌려 다녀야 하냔 말이야. 제 놈들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게 누군데.”
“그래서 이겼어?”
“졌지. 염병할 놈들 당원수만 1200만인데 꼴랑 400만이라니. 어휴,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들이란···.”
정 회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과거 정치에서 패배한 것이 떠오른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 여긴 어쩐 일이야? 언제 한번 놀러 오라고 해도 생전 안 오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손자 놈까지 하나 데리고?”
의아함이 감도는 정 회장의 말에 김귀란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국수 먹으러 오라며? 그래서 왔지.”
“그럴 리가. 내가 아는 귀란 누이는 절대 그런 일로 넘의 집에 행차할 사람이 아닌데. 그러지 말고 어디 한번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 봐. 왜 누이도 내 성격 잘 알잖아.”
정 회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잠시 말을 아끼던 김귀란 그녀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 회장. 요즘에 북쪽 일 때문에 아주 바쁘다며?”
“어? 소문 들었나?”
“뭐 알려고 하면 알만한 거리니까. 그런데 김영삼이 얼굴은 꼴 보기도 싫은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그치 일에 손을 들어주려고 해?”
그 말에 정 회장이 가벼운 미소를 입에 물었다.
“뭐 김영삼이야 꼴도 보기 싫지만 그래도 공은 공이지 않은가. 자네도 이북 출신이니 알 거 아니야.”
“···이만한 기업을 일으켜 놓고서도 아직도 그 이북에서 늙어 죽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나 보구만.”
“흐, 수구초심 아닌가. 한평생 여한 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마지막은 날 낳아 준 땅에 묻혀야지.”
정 회장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귀란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간··· 후, 좋아. 정 회장. 내 같은 이북 출신으로서 정 회장을 위해 한 마디만 하지.”
잠시 말을 아끼던 그녀가 슬쩍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 일 그냥 접어.”
김귀란의 말에 정영주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미소가 사라진 그의 눈과 입가에서는 알 수 없는 묘한 힘이 뿜어져 나온다.
주변을 압박하는 듯한 기운, 대한민국의 1세대 기업 총수로서의 위엄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귀란은 많이 겪어 보았다는 듯 시큰둥한 기색이다.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이유를 들을 수 있나, 김 회장?”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정영주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에 없던 호칭까지 붙여 가면서.
그러나 김귀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측면으로 살짝 기울인다.
“그건 이놈한테 물어보든가.”
그리고.
두 1세대 거인(巨人)들의 시선이 한 곳, 바로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한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첫 말부터 잘 꺼내야 한다.’
11살짜리가 멋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되지 않게 잘 준비해 왔으니 걱정 없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난쟁이가 쏘아 올리는 작은 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