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근본(根本) (3)
내가 아버지의 무덤에 절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조금 이상한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무덤에 절을 하고 있던 사이.
김귀란.
한성가의 주인이자 내 아버지의 어머니, 내 어머니의 시어머니이자 나의 할머니.
그녀가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있던 것이다.
“오랜만이구나.”
가볍게 시작된 그녀의 말, 나는 그녀의 말에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사실 오늘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 송승우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공항에서 한성가의 직원을 보았다’라고.
때문에 나는 잘 하면 오늘 이곳에서 김귀란을 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녀가 한성가, 대한민국 재계서열 9위, 시가총액 15조의 거대기업 한성그룹의 총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설마 했는데 진짜로 왔네?’
주변을 바라보자 그녀가 데려온 사람들.
수십 명의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내가 데려온 사람들이 아버지의 무덤가, 화려한 제사상이 차려진 곳 주변에서 긴장 어린 대치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어색한 표정, 뭔가 애매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하며 윗사람들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
“…….”
하긴 우리 사이가 뭔가 어색하고 애매한 사이이긴 하지.
평범한 조손(祖孫)도.
평범한 고부(姑婦)도.
평범한 모자(母子)도 아닌 그런 관계.
미약한 실과 기대로 이어진 그런 관계.
일반적인 일상에서 보다는 아침 막장 드라마에 더 어울리는 관계가 바로 나와 어머니, 그리고 김귀란의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관계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재계서열 9위의 기업을 이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가치는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뭐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면 그녀의 인맥이 중요하기도 하니까.’
때문에 내가 막 그녀에게 대답을 하려던 그때.
“네.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회장님.”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
나는 의아한 낯으로 내 앞을 확인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 앞으로 나와 김귀란과 나의 사이를 가로막은 존재,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여리디 여린, 쾌활하지만 아직 소녀 같은 면이 남아 있는, 하지만 요즘 들어 사업을 진행하며 조금씩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사람.
그런 그녀의 도발적인 모습에 김귀란이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나를 향하고 있던 김귀란의 시선이 스르륵 어머니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자 곧 미묘했던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고 그 때까지 미묘한 대치를 하고 있던 사람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아우라(Aura).
김귀란 특위의 분위기. 서릿발 같은 기운이 주변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
그러나 어머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서기는커녕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오롯하게 허리를 펴고 김귀란을 바라본다.
본래 여자는 약한 법이지만 어머니는 강한 법이니까.
그러자 잠시 이채 어린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던 김귀란, 그녀가 고요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하더니, 이내 피식- 가볍게 웃음을 보였다.
“그래. 뭐 생각해 보니 너도 있었구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어?
저 할머니 왜 저래?
순간, 나는 살짝 놀랐다.
김귀란,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퍅한 할머니.
과거 몇 번이나 나의 긴장감을 자아낸 존재.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불타는 분노로 주변을 태워 버리는 그런 양반이었다.
일반적인 이미지의 호호할머니보다는 정복자, 측천무후. 그런 이미지에 더 가까운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양반이 지금 어머니에게, 말마따나 자신이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그런 이에게 저리도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고?
물론 2년 전에 있었던 몇 번의 만남, 그 만남에서 그녀가 그 전과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이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상대의 존재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그런 태도였던 것이다.
‘혹시 2년 사이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나?’
아니 그럴 리가.
그랬다면 그녀가 데려온 수행원들, 그들이 저리 긴장된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았겠지.
슬쩍 보니 그녀의 옆에 있는 전진호도 약간 놀란 모습이니까.
그렇다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데…
‘설마 전략을 바꾼 건가?’
그러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그녀, 김귀란,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부숴버리는 심보를 가진 존재.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와신상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그런 이중적인 존재였으니까.
‘그렇다면 놀라운 일이긴 하네.’
그리고 동시에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원래 안 하던 놈이 하면 특별해 보인다고 김귀란, 그녀가 보인 정상적인 반응, 부드러운 반응에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날을 바짝 세우고 있던 어머니마저 움찔, 가시를 조금 누그러뜨리는 모습이었으니까.
“……네. 잘 지냈죠. 회장님도 건강해 보이시네요.”
세우고 있던 가시를 내린 어머니의 말, 그 말에 김귀란,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또다시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너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왠지 새삼스럽구나. 그래 듣기로는 이번에 의류 사업을 하나를 시작했다지?”
“네. 준영이의 도움으로 작게 사업을 하나 시작했어요.”
“그래. 좋아 보이는구나. 잘 생각했다. 본래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려면 사업을 해야 되는 거거든. 전부터 생각했지만 너는 밑에 있는 것보다는 위에 있는 게 더 나아.”
고개를 끄덕이는 김귀란, 그녀의 계속된 말에 어머니의 몸이 일순 움찔거렸다.
“…….”
하긴 이날 이때껏 정상적인 대화 한번 나눠 본 적 없는 사이.
한 사람은 아들을 앗아간 존재로. 다른 한쪽은 남편을 앗아간 존재로 한 평생을 살아온 사이였으니 이런 반응이 당연하겠지.
물론 나라는 존재, 나라는 접착제로 미묘하게 이어져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둘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둘의 관계.
서로 붙을 수 없는, 서로 인정할 수 없어 보이던 그 관계에 일대 균열이 일어나 버렸다.
김귀란, 그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소나무. 그녀가 자신의 태도를 바꿔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해 온 것이다.
그러니 김귀란을 대하는 어머니, 최선영 또한 시종일관 그녀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만큼, 그녀 또한 뒤바뀐 관계를 생각해야 할 테니까.
그러자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어머니, 그녀의 몸이 스르륵 멈췄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회장님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녀 또한 김귀란의 입장 변화에 대응한 것이다.
그러나.
김귀란, 그녀의 변화, 그녀의 공격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귀란, 그녀가 가볍게 입을 연 것이다.
“…그래 힘든 일은 없고?”
아니 이 양반 진짜 왜 이래?
순간, 예상치 못한 김귀란의 말, 그 말에 어머니의 몸이 움찔했다.
아니 움찔하는 것을 넘어 조금 잘게 떨렸다.
왜냐하면 그 말은 절대 그녀에게서 나오지 않을 말, 김귀란, 그녀의 입에서 절대로 나올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
뭔가 대답을 하려던 어머니, 어머니의 말이 시작도 전에 흐려졌다.
비록 어머니가 내게 들을 보이고 있어 내가 그녀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그녀의 뒷모습만으로도 그녀의 흔들림, 그녀의 속에 숨겨 있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어려운 점은 많지만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어요.”
“그래. 그렇겠지. 여자 몸으로 사업체를 이끌어 나가는 일이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힘든 법이니까. 내 미국 땅은 잘 가지 않았어도 그건 잘 알지.”
어머니의 말을 들은 김귀란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무뚝뚝했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말하거라. 혹시 힘든 일 있으면 내 손이 닿는 선에서 도와줄 테니. 뭐 우리 사이가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어찌 됐건 나도 저 녀석 할미가 아니냐.”
그리고 그 순간,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 아주 예리한, 탐욕으로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을 본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네 녀석의 할미다’
그러니.
도망갈 생각하지 말라고.
그전까지의 그녀가 나를 향해 그저 짙은 기대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에 그쳤다면, 지금은 어떻게든 포섭할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눈빛, 먹이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암사자와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던 것이다.
‘이 양반 못 본 사이에 더 의뭉스러워졌네.’
아무래도 지난 2년간의 나의 생활, 그녀가 알아본 나의 현재가 그녀에게 일종의 확신을 준 것 같았다.
하긴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갑자기 판교로 내려오지도 않았겠지.
그녀에게는 시간이 금(金). 그녀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짧다면 짧은 대화를 마친 두 사람, 어머니와 김귀란의 분위기는 그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분명 일반적인 고부관계, 일반적인 인간관계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의 회복은 이뤄진 것이다.
덕분에 긴장으로 치달았던 주변 사람들의 안색 또한 가볍게 풀어졌다. 다들 내심 말은 안 했지만 그 둘에 분위기에 긴장하고 있었거든.
“이 대표님. 저 사람이 누구라고요?”
“아, 레이첼. 레이첼은 모르지. 저 사람 준영이네 할머니야.”
“보스의… 할머니요?”
“어, 한성가라고 시총 150억불 정도의 회사를 이끌고 있는 사람이지.”
“아… 역시….”
하지만 모든 것이 다 끝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게 누구냐고?
누구긴 바로 나지.
고개를 들자 보이는 얼굴, 그것은 어머니와의 대화를 마친 김귀란, 나를 바라보며 짙은 입맛을 다시고 있는 늙은 사자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나를 바라보며 묵묵한 표정을 짓는 김귀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짙은 미소를 보였다.
“오랜만은요.”
안 그래도 한국에 오는 즉시 김귀란을 찾아가려고 했었다.
뭐 단순히 핏줄을 챙기는 감정, 내가 웃어른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그런 예의바른 새 나라의 어린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당연히 앞으로 내 행보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성.
재계서열 9위.
시가총액 15조 원,
전자, 금융, 유통, 철강, 화학, 생명, 호텔, 패션, 식품에 이르는, 총 23개의 달하는 계열사를 지닌 거대 그룹의 총수였으니까.
그리고 그곳에… 내가 한국에서의 첫 행보를 시작할 아이템.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
1997년은 물론 앞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뒤흔들 거대한 공룡, 거대한 사냥감을 사냥할 수 있는 무기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사태.
대한민국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공룡을 사냥하는 첫 칼질을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