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 / 303화 신세계의 신 (1)
1990년대 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솔로(Robert Merton Solow) 교수는 “미국 경제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경제임이 입증되고 있고, 따라서 갑자기 침몰할 우려는 없다.”고 말했다.
역사상 최장기 호황을 구가하며 낙관론에 빠진 당시 미국 경제학자들은 미국 경제에 경기 사이클이 사라졌으며, 주식시장은 항상 오르는 것이라고 주장 ‘창의적 아이디어와 신기술’에 의해 경제가 성장하는 ‘신경제 이론(new economy)’을 제기했다.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 경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이론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나스닥 버블의 붕괴.
21세기 첫 불황에 거치면서 미국의 신경제 이론도 붕괴했다.
창의적 아이디어의 선구자였던 인터넷과 IT 산업은 폭발하고 시장경제를 지향했던 미국 경제는 각종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기업들은 시장의 요구에 따라 단기적 수익을 올리기 위해 직원들을 대량해고하는 바람에 실업률을 급증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그러자 저축을 하지 않고 여유자금을 증권시장에 부어버린 미국인들은 주가 하락으로 소비 둔화에 직면했다.
거기에 시장을 속인 기업인과 금융인들의 회계부정, 주가 조작등 범죄사건이 터지면서 세계 경제의 모델로서의 자격을 잃고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던 미국 경제는 흔들렸으며, 주식시장은 장기침체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렸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투자처였던 미국 시장은 이제 외국인들의 기피 대상이 됐고, 팍스 아메리카나의 상징인 그린백(Greenback, 달러)은 급전직하 절벽 아래로 꺾였다.
지난 10년 간 높이 날아올랐던 만큼 그 추락은 한계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고 그 와중에도 기회를 잡는 사람들, 추락한 날개들을 하나하나 모아 날아오르려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게 누구냐고?
바로 나다.
*
캘리포니아, 애플과의 일을 모두 마무리한 우리는 곧장 뉴욕으로 돌아왔다.
“아저씨. 현재 상황은 어때요?”
나스닥 시장붕괴.
사상 초유의 사태로 인해 혼란에 빠져있는 미국 경제 상황 하에서 누구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난리야. 우리가 캘리포니아에 다녀온 사이 더 안 좋아졌어.”
“얼마나요?”
“나스닥 지수는 2500 언더. 다우지수도 7500대로 하락하면서 자본들이 미쳐 날뛰고 있어. 그 동안 묶혀놨던 자본들이 선불맞은 멧돼지 떼마냥 날뛰고 있는 판국이야.”
“그래요?”
“그렇다니까. 아니 오죽했으면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시스코 같은 회사들도 주가가 폭락하고 있어. 들어보니 시스코 같은 경우엔 재고가 25억 달러 어치를 폐기 처분했는데도 22억 달러 어치에 달하는 재고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고. 거참 애플 주가 떨어진 건 진짜 애들 장난이었다니까.”
현재의 상황이라면, 지금처럼 시장이 공포에 질린 상황이라면 아주 적은 돈으로도 어마어마한 물량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잘됐네요. 그럼 이 기회에 한번 싹 쓸어 먹죠.”
“돈을 풀 생각이야?”
“이 경우엔 돈을 아끼는 거죠.”
“범위는?”
“나스닥을 비롯한 미 증권시장 전체.”
“분야는?”
“IT, 자동차, 에너지, 그리고 의약.”
“의약?”
“네. 의약. 그리고 그 외 우량종목들 모두. 쓸어모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쓸어 모아요.”
물론 약 500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 한화 50조 원에 달하는 자금이 내 손에 있는 이상 흔들리는 기업들을 먹어치우는 일은 여반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라는 나라. 세계자본의 중심이자 자본주의의 총아.
하루에도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오고 가는 자본의 바다 한복판이 바로 이곳인 만큼 방심하는 순간 내가 원하는 먹이가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어. 그런데 모든 종목을 다 소화할 수는 없을 텐데? 차라리 주가가 더 떨어지는 걸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건 어때?”
물이 깊은 만큼 그만큼 거대한, 자본과 정보를 동시에 소유한 자들 또한 많았으니까.
“불가. 너무 오래 기다리다간 선수들이 붙을 수 있어요.”
“선수들?”
“네. 큰손들. 돈을 쌓아두고 쓸 곳을 찾지 못하던 사람들이 이 기회를 놓칠리 없죠.”
“이 시국? 돈을 쌓아둔 사람들이 있을까?”
“제법 많죠. 이번 사태를 미리 파악해 뒀던 금융재벌들이나 각 국가의 기관들, 그리고 중동의 오玖鍛? 같은 것들이 아마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움직이기 시작할 거에요. 뭐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그만큼 반등이 확실한 시장이니까요.”
때문에 나는 한동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사냥에 몰두했다.
아비지옥으로 변해 버린 미국 증시에서 진주들을 솎아내기 위해서였다.
“하긴 요즘 들어 사람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소리가 들리긴 하더라.”
“어디서요?”
“일단 버크셔 해서웨이에서 500억 불을 투자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어. 소로스 씨도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서로 스타일이 다른 두 사람이 한 번에요?”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까. 하지만 타게팅은 달라 워렌버핏은 미국 시장 투자, 소로스씨는 유럽과 니케이를 공략하고 있다는 게 다르지. 거기다 아직 소문일 뿐이지만 로스차일드, 록펠러, 카네기가 움직였다는 소리도 들리고.”
“의외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네요. 좋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입니다. 뭐 동네방네 소문내서 맛집이라 알리기는 아까우니까. 일단은….”
그 결과.
9월.
뉴욕 유엔본부에서 189개국 국가원수, 정부수반, 정부대표가 참여한 ‘유엔 새천년정상회의’가 개최되고 김대중 대통령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진행, 남북한과 미국, 중국 간의 4자회담 제의하던 그때.
‘인텔(Intel) 지분 4.32%’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7.25%’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17.94%’
‘시스코시스템즈(Cisco Systems) 10.35%’
.
.
내 손에는 제법 많은 기업들, 앞으로 성공이 확실한 기업들이 들어와 있었다.
“현재 아마존(Amazon) 지분 보유율이 얼마나 되죠?”
“조금 정리해서 25% 정도. 왜 다시 사들여?”
“네. 적어도 35%. 필요하다면 그 이상을 노려 보도록 하죠. 기왕이면 구글(Google)도요.”
“…돈이 꽤 많이 필요하겠는데?”
“필요할 땐 써야죠. 이제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이른바 버블의 끝이었다.
*
9월.
여름의 막바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달의 마지막 날, 나는 장이 마감하자마자 오라클 뉴욕지사의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내로 보너스가 지급될 겁니다.”
“네? 보너스요? 아니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네. 일단 약속했던 보너스에 더해 100만 달러씩 더 넣었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십 명의 백만장자들이 탄생하는 순간, 나는 그들의 기쁨의 겨운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회사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월가(wall street). 미국의 심장이라 일컬어지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 그동안 일에 치여 단 한 번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뉴욕에 온 적은 꽤 많았는데 그동안 이렇게 천천히 돌아본 적은 없었지.’
그렇게 나는 허드슨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월가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장 먼저 1697년에 처음 세워진, 이후 지난 3세기 동안 월스트리트를 지켜보고 있는 트리니티 교회의 모습과 월스트리트의 장이? 세계 경제의 심장이라 불리는 ‘뉴욕 증권 거래소’의 모습.
그리고 뉴욕 증권 거래소 맞은편에 위치한 ‘페더럴 홀 국립 기념관’의 모습과 사람들에 둘러싸인 ‘돌진하는 황소’.
마지막으로 아직 굳건히 서 있는 쌍둥이 빌딩, 얼마 뒤 피치 못할 사건으로 인해 사라지는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다 조금은 새로운 모습, 차에 탄 채 지나쳤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이 건물을 직접 보다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 변두리 달동네 단칸방, 바퀴벌레들과 좀벌레들이 친구 먹자고 달려들던, 월세 15만 원짜리 단칸방에 살던 내가 이 순간 뉴욕의 전경을 눈에 담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
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으면서 또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서 있다는 것은 나의 길,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니까.
‘이미 씨앗은 뿌려뒀다. 그러니 이제 그 씨앗이 발아하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가 나의 것이 될 수도 있겠지.’
그때.
“여기서 뭐해?”
등 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돌아보자 커피 두 잔을 들고 있는 한 남자, 이어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옆을 보자 십수 명의 사람들, 경호팀 인력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갔다는 소리를 듣고 보라 쫓아온 모양이었다.
“생각을 좀 정리하고 있었죠.”
“생각?”
“월가에서의 일들 말이에요.”
그러자 피식- 웃음을 보인 이어진, 그가 내 옆으로 다가와 내게 커피를 내밀었다.
따뜻한 커피.
내가 그에게서 커피를 받아들자 그가 가벼운 웃음을 유지하면 내 옆에 섰다.
“왜 새삼스러워?”
“그렇죠. 아무래도 짧은 시기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하긴 생각해 보면 그렇지.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요?”
“그래. 그리고 생각하지. 만약 그날, 그때 그 꼬맹이의 말을 듣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쯤 어디에 서 있을까라고.”
그가 슬쩍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에는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이 묻어있었다.
“그래서 만족하세요?”
“만족? 글쎄? 너는 만족해?”
그가 내게 물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만족.
나는 만족했을까?
현재의 나는 현재의 상황에 만족했을까?
분명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의 상황은 만족할만한 상황이었다.
지금 내 손에는 제법 많은, 아니 사실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뇨.”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 만족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욕심쟁이네.”
“잊으셨어요? 저 욕심 많아요.”
“하지만 선은 있을 거 아니야. 어느 정도가 되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어진 그가 진지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끝이 어디인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적어도 무너지는 빌딩을 무너지지 않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뭐어?”
“무너지는 빌딩, 침몰하는 배, 그 모든 것들을 막을 수 있는 힘. 그것이 제 손에 온다면 어느정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커피를 마셔 버렸다.
그런 뒤, 다 마신 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경제계의 신이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