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215화 총알을 든 자 (2)
며칠 뒤.
삼성(三星).
대한민국 재계서열 2위의 대기업 삼성 안에서 한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이 이 대리.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그것은 바로 이번 사건, 쌍호자동차 인수 건을 두고 그룹의 총수인 이건주가 후계자를 정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만약 이번 일의 총 책임을 맡고 있는 이재영 상무가 성공적으로 쌍호자동차 인수를 마친다면 곧 기업의 승계를 준비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아니 왜 이번 쌍호차 건을 두고 회장님이 후계자를 결정하시려 한다는 소문 말이야.”
“어? 뭐 정말?”
“이 사람이 정말 이렇게 소문이 늦어서야. 다들 알고 있는 소문인데 정말 깜깜하구만.”
물론 그 전에도 이런 소문이 왕왕 돌았던 적이 있긴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소문의 진실이라는 듯 이건주가 이재영을 불러 친히 치하를 하는 등 구체적인 액션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 이번에도 그냥 뜬 소문 아니야? 왜 저번 태양광 사업때도 그랬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이번엔 좀 확실한 것 같아.”
“그래?”
“어 그렇다니까. 왜 비서실에 내 대학 후배 하나 있잖아. 걔가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심상치 않더라고. 저번에는 회장님이랑 이재영 상무님 두 분이서 식사도 하시고 또… 이번엔 따로 독대도 하셨다고 하더라니까.”
“진짜?”
그러자 사람들, 삼성 내에 있는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확실시 되지 않았던 후계구도가 확실시되어 간단 소문에 다들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뭐 그러니까 나름 신빙성이 있는 거지. 왜 평소에는 거의 혼자 지내시는 분이시잖아. 그러니까. 우리도 빨리 줄을 서자고.”
“줄?”
“그래. 왜 자네 선배 중에 이재영 상무 라인 좀 있잖아. 응? 나도 같이 살자.”
말마따나 후계구도가 정립된다는 말은 곧 그룹이 하나의 의지로 통합된다는 말. 더 이상 흔들림 없이 도도히 흐를 수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그렇겠네. 좋아. 그럼 총알 좀 넉넉히 준비해 놔. 그 선배가 다 좋은데 여자랑 술을 좀 밝히거든.”
“하하 맡겨둬.”
하지만. 이 와중 온전히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부영, 삼성가의 차남이자 이재영의 동생, 그리고 삼성의 왕좌 그것에 욕심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
“…그러니까 형님이 이번에 김우중이 그 양반과 직접 결착을 봤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김석원 그 양반 모가지를 조르고 채권단이랑 직접 합의를 이뤄냈다?”
고요한 목소리.
이부영의 목소리에 그의 측근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분명 조용한 목소리, 아무런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재 이부영, 그의 심기가 많이 불편하다는 것을.
조금만 건드리면 곧 터질 것 같은 폭탄, 그것이 현재의 이부영의 상태라는 것을.
하긴 그럴 만도 할 것이다.
현재 삼성가 내에서 돌고 있는 소문, 정상적인 귀가 있는 이상 그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는 없었으니까.
‘아마 지금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대답을 회피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결국 이부영의 측근들 중 가장 연배가 높은 한 사람이 총대를 매기로 했다.
“그게…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현재로서는 소문대로 이 상무님이 움직이신 것도, 그리고 대우 김 회장과 손발을 맞춰 김석원을 거세시킨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순간, 이부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재영, 그가 이번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말은 곧 그에게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 아니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더라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말이 안 되잖아. 그 양반은 내가 잘 알고 있어. 그 양반 깜냥으로는 김석원이가 숨긴 걸 찾기는커녕 제 잘난 맛에 끌려다니다가 된통 당하기만 해야 한다고. 그런데 뭐? 김석원이가 숨긴 걸 찾은 것은 물론 그걸로 대우 김우중을 끌어들여? 거기다 채권단을 움직여서 인수가격을 내렸다고?”
“그게…….”
“왜 우리는 알지 못했지? 왜?”
“죄송합니다. 그게… 아무래도 요즘 저희 쪽 끈이 많이 끊겨서….”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이부영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능력이 있는 것들은 모두 다 그의 형인 이재영에게 가 달라붙고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이런 쭉정이들뿐이었다.
현상은 보지만 본질은 보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 그의 속이 터질 것 같았다.
“후… 됐어. 그건 그렇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뭐라시지?”
“회장님께서는… 관망 중이십니다. 다만 이번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라고…”
“명령으로?”
“아닙니다. 들리는 말에는 이 상무님과 식사를 하시면서….”
남자의 말을 들은 이부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간해선 홀로 식사를 즐기는 그의 아버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아버지가 직접, 그것도 식사를 하면서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확실합니다. 다행히 호텔에 넣어둔 선은 무사해서….”
그러자 이부영의 눈빛이 참혹하게 변했다.
“빌어먹을.”
생각해 보면 정말 분기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었다.
학벌이면 학벌, 성과면 성과 그동안 정말 그는 자신의 형을 이기기 위해,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 왔다.
왕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아버지, 왕좌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필연이자 본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까짓 순서가 뭐라고.’
그가 바꿀 수 없는 한계. 장남과 차남. 그 차이가 언제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도 그랬다. 그동안 삼성의 자동차 사업에 보다 큰 노력을 기울였던 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회사의 사업에 큰 영향을 미칠 사업에서 밀려나지 않았는가.
단지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러니 이재영의 움직임을 보는 그의 속이 부글거릴 수밖에 없었다.
‘주지 않을 거면 차라리 야심을 키우게 하지 말던가. 지금까지 야심을 키우게 해놓고 이제 와서…!’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아버지의 면전에 가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그는 알고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쫓겨나게 되리라는 것을. 삼성이라는 이름 하에 누렸던 모든 특권을 잃어버리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왕좌를 쟁취한 자의 손에 추격당해 사냥당하리라는 것을.
때문에 그는 발톱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 능숙하게.
그런데?
그가 짙은 패배감을 곱씹으며 회사를 나와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한가지 이변이 벌어졌다.
“이사님.”
“무슨 일이야?”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집을 관리하는 집사가 그에게 한가지 이야기를 전달한 것이다.
“이사님 앞으로 소포가 도착했습니다.”
일순, 이부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재벌가의 차남으로 태어나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소포? 나한테?”
그러자 그에게 말을 전달한 집사 또한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게… 네. 그렇습니다.”
“아니 누구한테?”
“발송자 이름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익명인 것 같습니다.”
일순 이부영의 얼굴이 굳었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는 물건을 안으로 들인 집사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뭐 좋아.”
그는 금세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화를 낼 만한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식사는 필요 없어. 서재에 있으니 아무도 들이지 마.”
“그래도 식사는….”
“들이지 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택으로 들어온 이부영.
그는 곧 소포가 있다는 서재로 올라갔다.
그러자 곧 그의 앞에 제법 평범해 보이는 모습의 소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의 입가에 짙은 자조가 맺혔다.
그 소포, 평범한 모습의 소포를 보니 왠지 자신의 모습이 작게 느껴진 것이다.
“거참 이젠 소포도 오고 이부영이 보통사람 다 되었구만.”
그렇게 홀로 전 정권의 유행어를 읊조린 이재영 그가 쓴 웃음을 지으며 소포를 열었다.
그 안에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요술 램프가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앞으로 온 소포, 그것이 약간은 특이한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것은 바로…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 합병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한 보고서]
날카로운 칼, 아니 누군가 보낸 반짝이는 총알이었다.
*
“선물 잘 보냈어요?”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이어진, 그를 바라보며 묻자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잘 보냈어. 아주 쌈박하게 포장해서.”
“고생하셨어요.”
“뭐 고생은 일이 일이니까 챙겨야지.”
그리고는 내 앞에 털썩 주저 앉는 이어진이었다.
“자, 이 정도면 배는 돌려줄 때가 되지 않았어?”
“아직 미련 못 버렸어요?”
“야! 그게 얼마짜린데!”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된다고 했잖아요.”
“하, 연애를 해야 결혼을 하지. 연애는커녕 잠 잘 시간도 안 주면서 무슨….”
그렇게 잠시 고개를 젓던 그가 이내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 됐다 됐어.”
“잘 생각하셨어요.”
“어휴, 그런데 준영아. 일단 보내긴 했지만 그게 효과가 있을까?”
이어진이 약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미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현대가 기아를 인수한다. 이 정도면 삼성에서도 앗 뜨거라 하고 움직일 만하잖아요.”
“뭐 그렇긴 한데… 그럴거면 그냥 이재영이한테 보내는 게 낫지않아? 굳이 둘째한테 보낼 이유는 없잖아.”
아무래도 그는 이부영이 영 못미더운 모습이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이재영이 그 사람한테 보내면 움직이기야 하겠죠. 하지만 쌍호차에서 완전히 빠지지는 않을 거예요.”
“자기 치적이니까?”
이어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게다가 지금의 삼성은 좀 더 시끄러울 필요가 있어요.”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넌 정말 욕심이 많은 녀석이야.”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어보였다.
“하하 그리고 아저씨는 그 욕심 많은 녀석의 최측근이죠.”
“말이나 못 하면… 그런데 만약에 이부영 그 사람이 이재영이랑 연계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만약 그러면 품은 품대로 들고 얻은 건 없을 수도 있는데.”
“믿음이 있거든요.”
나는 슬쩍 그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며 말했다.
“이부영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그러자 잠시 내가 내민 커피를 받아들던 이어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는 사이인 거야?”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럼 어떻게 알아?”
나는 조금 커진 그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딱히 가깝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죠.”
나는 천천히 커피향을 음미하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
“어.”
“평생을 풍족하게 살아온 사람, 떠받들어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던 사람. 그 사람을 가장 분노케 하고 또 비참하게 만드는 게 뭘까요?”
“글쎄? 뭐 욕심이나 뭐 이런 걸까?”
“뭐 그것도 일리는 일지만 저는 그게 질투라고 봐요.”
“질투?”
“네. 그들에겐 내가 가진 것보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커 보일 테니까요. 그렇게 훈육되기도 했을 테고요.”
나는 천천히 잔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그는 참지 못할 거예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그동안 재벌들을 가까이서 보아 온 만큼 어느 정도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뭐 그렇긴 하지. 그 사람들보다 편협한 사람들도 또 없으니까.”
“그렇죠. 그런 만큼 우리는 움직여야 해요.”
이어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 또 갈 데가 있는 거야?”
“그럼요. 이 계획의 단추가 될 사람이 있잖아요.”
“단추?”
“네. 일단… 오랜만에 보는 분을 만나려 가려고요.”
그리고 잠시 뒤.
우리들의 눈앞에는 익숙한, 제법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자리해 있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모습, 그 모습을 바로…
“작은 선생! 이거 오랜만이야. 그래 어쩐 일이야?”
정 회장. 정말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었다.
“하하, 회장님. 별건 아니고요….”
뭐 삼성과 현대의 싸움은 오랠수록 좋은 법이었으니까.
“…회장님께 팔 게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