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265화 흔들리는 제국 (1)
1997년.
‘세계경영’이라는 기치를 들고 확장에 몰두하던 대기업, 대우가 곤경에 처했다.
그동안 세계경영이라는 슬로건 아래 해외 여러 나라들에 진출, 해당 국가의 수장과의 딜을 통해 관세와 법인세 면제, 용지 무상제공 등 각종 혜택을 성취해 영토를 확장하던 대우가 대한민국 외환위기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에 의해 좌초한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기업들, 대한민국 내에 있는 기업들의 대부분이 겪고 있는 트러블이긴 했지만 대우에겐 그 문제가 한층 더 크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세계경영’
대우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경영전략.
한 나라의 국가 원수와 담판을 지어 해당 국가의 경제부흥 계획을 통째로 들고 들어간 뒤, (주)대우를 선봉으로 자동차와 전자 등 광범위한 사업을 기러기 떼처럼 몰고 들어가 전략, 그것은 사실 대규모의 차입을 통해 쌓아올린 탑, 페달을 밟지 않으면 곧바로 쓰러지고 마는 외발 자전거였기 때문이었다.
‘부채비율이 400% 이상’
‘자기자본 비율은 50% 이하’
‘이 상황에 쏟아진 연 20%대의 고금리’
물론 그렇다고 그냥 쓰러질 수는 없는 법. 은행 자금줄이 끊긴 대우는 또 다른 주머니, 회사채 시장에 회사채를 팔아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으며 덩치를 불리기를 계속했지만 그 시도는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벽을 만나 버렸다.
1999년 3월,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실물경기 지표들이 회복세를 나타냈던 때, 금융감독위원회가 국내 기업들의 재정건전성 증대를 위하여 국내 투자신탁회사들에 회사채 투자 비중을 제한하라는 공문을 발송한 것이다.
그것도 ‘동일 대기업그룹당 15% 이내’라는 구체적인 수치도 적시해서.
그러자 곧 1967년 섬유류 봉제품을 생산, 수출 기업으로 시작한 기업.
1999년 한때 재계서열 3위, 자산총액 75조 원, 396개에 달하는 현지법인과 15만 명에 달하는 고용인원을 자랑했던 대기업, 대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때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매출 500대 기업 중 18위의 기업 선정되기도 했던 이 기업의 아성이 순식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
쾅-
있는 힘껏 테이블을 두드린 김우중, 그가 큰 소리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질타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거대한 회의실, 그 안이 빙하처럼 얼어붙더니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정부에서 칼을 꽂았습니다.”
모두 다 오늘 벌어진 사건, 금융감독위원회가 국내 투자신탁회사들에 회사채 투자 비중을 제한하라는 공문을 발송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건 나도 알아! 도대체 왜 그동안 알지 못했냐는 거야!”
“그건…….”
“됐어. 이제 와 알아서 뭐해. 경제부 총리한테 연락해 봤어?”
“죄송합니다. 발표가 나온 다음부터 도저히 연락을 받지 않는 것이….”
“단 한 통화도?”
“네.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자리에 없다는 연락만….”
순간, 김우중의 표정이 굳었다.
대우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경제관료가 회사채 한도를 제한한 뒤로 자신들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그렇다면 그 의미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빌어먹을 이 새끼가 내 연락을 무시해? 아니 지금까지 받아쳐먹은 게 얼만데.”
대우, 그들을 타겟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지.
하긴 생각해 보면 떠오르는 이유들은 많았다.
일단 IMF가 처음 왔을 때부터 그와 정부 측은 서로 삐걱거렸다.
정부 측은 허리띠 졸라매기를 통한 완화를, 그는 확장을 통해 공세를 추구하며 그동안 꽤나 많은 마찰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게다가.
‘빌어먹을 금 모으기….’
금모으기 사건, 김준영이라는 이레귤러에 의해 초전 박살 나 버린 그 사건, 그 사건 이후로 제법 온건했던 그와 정부 측의 관계가 완전히 어긋난 톱니 같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정부 측에서는 그와 대우를 말 안 듣고 위험한 가시로, 대우 측에선 정부를 고루한 탁상물림들로 치부하며 연일 갈등을 빚어 왔던 것이다.
“빌어먹을, 아니 그렇다고 이 정도로 한다고? 아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위해 주었냔 말이야. 말마따나 이번 선거 때도 내 돈으로 선거를 해 놓고 뭐? 이제 와서 이렇게 입을 닦아?”
김우중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이번 사건이 끼치는 영향이 큰 만큼 그의 분노는 컸다.
회사채를 제한한다는 것은 그동안 대우가 추구하던 세계경영, 차입경영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자 그의 옆에서 그의 분노를 바라보던 직원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회장님.”
“왜?”
이 기회에 눈도장을 찍으려 한 것이다.
“이러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
“그동안 김대중 대통령이 회장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건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렇지.”
“네. 그러니까 이번에 들어간 저희 측의 대선자금을 빌미로….”
다음 말은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대선자금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자네 말은 대선 자금을 빌미로 협박을 하자? 그래서 정책의 향방을 바꾸자?”
“그렇습니다. 일단은 뭐라도….”
일순, 김우중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가 테이블 위에 있는 재떨이를 잡았다.
그리고선 빠르게. 그의 손이 움직였다.
쨍그랑-
순간, 사람들 모두가 얼어붙었다.
그간 김우중을 모시긴 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어 있는 시점, 김우중이 으르릉 거렸다.
“다들 잘 들어. 지금은 비상사태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선자금을 이야기를 꺼낸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놈이 있다면 지금 당장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다간 대통령이 죽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고.”
말을 마친 김우중,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 전의 일로 인해 얼마간의 분노가 사그라든 듯 했다.
“다들 이야기해 봐. 이 사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그러자 잠시 눈치를 보던 사람들, 그들이 앞 다투어 말을 이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들을 설득하는 겁니다.”
“설득?”
“네 솔직히 정부 측 권고.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기업의 재정 건전성을 강화시켜 경쟁력을 강화한다. 물론 좋은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가 죽겠지.”
김우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분명 일리는 있었다.
IMF시기 방만한 경영을 일소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재정 건전성을 높여 위기를 극복한다.
분명 원칙적으로는 맡는 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약이 대우에게는 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기업은 양적 팽창을 통해 몸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네. 그렇습니다. 저희 그룹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희는 이미 호랑이 등에 탄 상황이니까요. 그러니 저희는 사람을 노려야 합니다.”
“……봉황을 노리는 짓은 금물이라고 말했을 텐데? 그치가 유해 보이지만 이 나라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버텨온 사람이야. 피아가 확실한 사람이라고.”
“물론입니다. 그러니 저희는 다른 사람을 노려야겠죠.”
“누굴?”
김우중의 시선을 받은 측근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이 정책을 만든 선수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순간, 김우중, 그의 얼굴에 빛이 들었다.
“……관료들을 노리자?”
그 순간, 직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대통령이 나서 이런 짓을 벌어진 않았을 겁니다. 모두 다 강봉구 정책기획수석과 김동태 경제수석 쪽 사람들의 짓이겠죠.”
“그렇지. DJ 그 양반 이런 쪽으로는 약간 무딘 편이니까.”
“네. 그러니 그쪽 사람들을 설득해 시간을 버는 겁니다. 솔직히 이 기간만 어떻게 견디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잠시 말을 멈춘 김우중,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 뭐 그쪽 치들을 건드리는 것은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만약 그게 실패하면, 그 시장주의자들이 반대하면 어떨 요량이지?”
“그건…….”
그 모습을 본 김우중, 그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사람들을 향했다.
“은행들 대출은 모두 다 막힌 건가?”
“네. 아무래도 모든 은행들이 더 이상의 대출은 거절을….”
“어음이랑 회사채는?”
“둘 다 불가능합니다. 이번 명령으로 완전 굳었습니다.”
“일본 쪽에 돈을 융통하는 건 안 되겠지?”
“시도는 해 보겠지만 어려울 겁니다. 아무래도 그쪽 또한 라인이 있으니까요.”
“좋아. 그럼 딜을 해 보는 건 어떨까?”
“딜이라고 하시면….”
김우중 그가 주먹을 꽈악 움켜쥐며 말했다.
“삼성과 오라클, 그 둘에게 빅딜을 거는 거지.”
빅딜, 그것은 대기업 간의 계열사 구조조정 방안, 문어발식 확장에 따른 중복 과잉투자에 대한 비효율성을 극복하고 전문화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대기업의 비주력 및 부실 계열사를 그룹간에 상호 인수 및 매각을 추진하는 거래다.
물론 당장에 돈이 되는 거래는 아니지만 빠르게 기업의 가치를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니는 방법이었다.
“……전자와 자동차 스왑하실 겁니까?”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무게가 맞지 않겠나? 그런 다음 정부 측과 협상을 한다. 우리를 살리라고 말이야.”
대마불사.
전가의 보도를 꺼내든 것이다.
“우리를 죽이겠다면 죽이지 못할 정도의 덩치가 되면 되겠지.”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삼성과 오라클 모두 전자 쪽에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니….”
“좋아. 그럼 결정됐구만. 일단 아까 말한 대로 정부 측 사람들한테 연락해 봐. 일단 보자고. 그리고….”
그가 말을 이었다.
“삼성과 오라클 양쪽 모두에게 연락해.”
순간, 그의 말에 사람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본디 빅딜이란 한 대상과 이뤄지는 것이 정석, 그런 만큼 양쪽 모두에게 연락을 하라는 김우중의 말에 다들 당황한 것이다.
“야, 양쪽 모두 말입니까?”
“그래. 기왕이면 유리하게 딜을 성사시키는 게 좋지 않겠나.”
“하지만….”
걱정 어린 직원들의 표정,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우중, 그가 짙은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그리고는 특유의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양쪽 다 모르게 하면 되는 거니까.”
그의 입가에 계략가의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올해만 버티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러자 사람들의 얼굴에도 점차 그와 비슷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물들어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최대한 들키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 왜 저번 쌍호처럼 되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한쪽이 전자를 먹으면 시장이 흔들릴 테니까요.”
“뭐 그건 그렇지. 그럼 기회를 봐서 한번 배짱을 부려 보는 것도 괜찮겠군.”
“합당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 다른 기업과의 빅딜, 그것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회장님!”
“무슨 일이야?”
그들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들은 바로….
“그게….”
김준영, 그들이 타겟으로 삼았던 오라클의 회장이었다.
“오라클 회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김우중의 눈이 크게 떨렸다.
아니 이 타이밍에 왜?
도둑의 발이 저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