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19화 높은 곳으로 (3)
삼성이 떨어졌다는 정보, 그 정보를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나는 평창동 김귀란의 저택으로 향했다.
“아저씨. 한성 쪽이랑 연락은 다 끝났나요?”
“어, 기본적인 조율은 다 끝났어. 너희 할머니가 손에 쥐고 있는 한성전자, 금융, 패션. 이렇게 세 군데 지분 일체 우리가 받기로 했어.”
“그쪽에서 순순히 주겠다던가요?”
“아니 전혀, 그쪽에서야 어떻게든 줄이려고 했었지. 하지만… 뭐 어쩌겠어 우리가 돈줄을 쥐고 있는데.”
그동안 미뤄지던 대가, 한성가의 주요 계열사 세 군데의 지분을 양도받기 위해서였다.
“좋아요. 그럼 바로 가도록 하죠.”
“응? 우리만?”
“네. 지금은 품을 크게 해서 움직일 때가 아니니까요.”
물론 현재의 상황, 쌍호자동차 건으로 바쁜 와중이긴 했지만, 일의 무게가 무게인 만큼 되도록 빨리 한성그룹의 일을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와 김귀란. 둘 사이는 아무리 조손간이라 하더라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사이였으니까.
“할머니 저희 왔어요.”
“……빚쟁이가 오셨군.”
“하하 빚쟁이라뇨. 그저 할머니를 위해 큰 집을 짓고 싶은 것뿐인걸요.”
“효손이 될지 깡패가 될지는 지켜봐야겠지. 쯧, 뭐 좋다. 일단 앉거라. 남은 돈을 받으려면 주인 말을 들어야 할 테니까.”
그런데?
내가 평창동 저택에 도착, 김귀란에게 한성 계열사 지분을 양도받고 있던 그때, 한 가지 예상외의 상황이 나를 찾아왔다.
“그러니까 전자 쪽 인사들은 되도록이면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거죠?”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말이 아니라 건드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분명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구조조정이다 뭐다 시끄럽긴하지만 전자는 절대 안 돼. 만약 건드리게 되면 회사 전체가 좌초할 거야.”
“맨입으로요?”
“…이 녀석이 이 정도나 줬는데도 욕심을 못 버려?”
“욕심이 아니라 주주의 당연한 권리죠. 뭐 하지만 일단은 걱정 마세요. 저도 이번 사업이 끝나기 전까지 인사를 건드릴 생각은 없으니까.”
갑자기 김귀란의 저택으로 김우중, 그가 찾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당도한 것이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후, 내가 끝날 때까지 방해하지 말란 말 하지 않았나?”
“그게…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무슨 일인데 그래?”
“김우중 회장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순간, 나와 김귀란의 시선이 마주쳤다.
김우중의 도래, 그것은 조금은 예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김우중이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네. 회장님 아무래도 아까 그쪽 연락을 무시한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 무례한 인간. 오늘 하루 종일 시덥지 않은 연락이나 해 오더니 뭐? 이젠 다짜고짜 내 집으로 찾아와?”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사이, 그들 사이에 뭔가 대화가 오간 것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하루 종일 시덥지 않은 연락이요?”
“…별일 아니다. 김우중이 그치가 억지나 부리려고 하는 것 같으니까.”
“그래요?”
“그래. 아무래도 이번에 네 녀석이 터뜨린 말. 그것 때문에 속이 타는 모양이다. 아침부터 주구장창 연락을 하더구나. 나한테 제 집으로 오라고.”
그래?
그러고 보니 저번에 내가 터뜨린 기사, 한성의 입김을 진하게 받은 언론사를 터뜨린 기사가 제법 큰 이슈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하긴 4조 원이라는 돈, 그 거금을 현금으로 준비했다는 것이 가벼운 일은 아니니까.
그때.
내 머릿속에 재미있는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이거 잘 하면?’
그것은 바로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통해 김우중의 속내를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김귀란과 김우중, 그 두 사람의 관계라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현재 김우중, 대우의 상황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겠지.’
때문에 나는 빠르게 김귀란, 그녀를 설득했다.
“할머니.”
“…왜 그러느냐.”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이렇게 해 보자고?”
“네. 그러니까….”
그리고 그 결과,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김우중, 그가 더 심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음을.
…그리고 그가 그 조급함으로 인해 그와 김귀란 사이의 골이 더 깊어졌음을.
‘설마 그렇게 둘이 드잡이질을 할 줄은 몰랐지.’
아무래도 평소 그 둘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않았던 것이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비슷한 성향, 비슷한 사업 스타일. 분명 공적인 일에선 어느 정도 합을 맞춰 왔지만 태생적인 불협화음은 어쩔 수 없었을 테니까.
‘뭐 김귀란, 아니 할머니 쪽엔 그 이외의 이유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런데 그때.
“…들었느냐?”
문밖에서 김귀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저택 서재의 딸려 있는 그녀의 방, 저번에 그녀가 쓰러졌을 때 정리를 해 놓은 방이었다.
‘아무래도 감정 조절이 끝났나 보네.’
그렇다면.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서재 중앙, 고요한 안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귀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 들었겠지?”
“물론이죠.”
“그래. 원하던 바는 얻었느냐?”
“네.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아요. 김우중 저 사람 지금 꽤나 애가 닳아 있는 상태라는 걸.”
내 대답에 穩尻塚?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좋다. 좋든 싫든 한 배를 탔으니 한번 물어보마. 그래 자신은 있느냐?”
자신 있느냐.
매우 간결한 김귀란의 말.
하지만 그것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방금의 일로 확신을 얻은 것이 맞느냐.’
‘그렇다면 김우중을 이길 수 있겠느냐.’
‘그 이길 방법이라는 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이겠느냐.’
‘그리 하여 최종적으로는 쌍호를 거머쥘 수 있겠느냐.’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뭐 내가 그럴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쌍호를 노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럼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걸요?”
“확실히?”
이번에는 진짜 순수한 의미의 질문이었다.
서류에 싸인하기 전에 으레 하는 말처럼.
그렇기에 나는 사람 좋은 미소로 답했다.
“확실히요.”
“…그래, 믿을 수밖에 없는 얼굴이구나.”
그녀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내 말에 만족한 것 같았다.
“좋다. 그렇다면 준비하도록 하마.”
“준비요?”
내가 묻자 김귀란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전진호를 불렀다.
“그래. 대우와 척을 졌으니 우리도 준비를 해야지. 이번에는 제법 시끄러울 것 같구나.”
…아무래도 그녀는 본격적으로 대우와 결전을 벌일 생각인 것 같았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서도 이번 일은 큰 모험이었다.
분명 한성 또한 우리나라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거대 기업이긴 했지만 재계서열 3위, 대우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걸요.”
나는 가볍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뭐?”
왜냐하면 그녀와 김우중이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제가 그럴 일 없게 만들겠다고요.”
이번 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김우중, 그를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그런 만큼 김귀란 그녀가 직접 김우중과 대적할 필요는 없었다.
뭐 견제 정도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굳이 나서 몸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컨트롤 할 수 없는 변수는 최소화 하는 게 좋겠지.’
그러자 김귀란의 얼굴에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엔 의아, 그 다음엔 기대, 그리고 마지막은 인정이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모든 실수는 방심에서 나오는 법이다. 잘 알겠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잘 알고 있어요. 그냥 정말 혼자 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요.”
“뭐 좋아. 네가 그렇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으마. 하지만 너무 방 하? 말거라. 그래도 김우중이야. 자칫 잘못하면 목을 물릴 수도 있어.”
그녀의 표정은 걱정에 닿아 있었다.
“걱정되세요?”
“걱정은 무슨… 그래도 지난 20년 위로만 올라온 놈이다. 제 앞을 가로막는 놈 재끼고 때리려는 놈 뚫고 온 놈이니만큼 제법 만맣? 않을 거야.”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조만간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반대로 그 사람의 목을 조를 거란 말이죠.”
김귀란이 의아한 눈막? 나를 바라맘年?.
“…?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려는 게로구나.?
“공개입찰만으? 끝내지 않겠다 한 것은 響各? 먼저니까요.”
말을 맺은 나는 가볍게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대우와 오라클의 대한 기사, 대우에 우호적인 내용의 기사가 자리해 있었다.
[샐러리맨의 신화 김우중 회장 ‘쌍용차 정상화에 전력을 기울이겠다’ 천명 - 조선일보. 1997. 12. 06]
[격화되는 쌍호자동차 인수, 입찰 대상자들 중 대우湄온耽? 가장 유력 - 上湛瞿?. 1997. 12. 07]
[계속되는 외국계 기업들의 마수, 전문가들 ‘국내 기간 산업을 지켜야만 한다’ - 동아일보. 1997. 12. 09]
대부분 대우와 그에 우호적인 언론사가 만들어 낸 여론이었다.
나는 그 기사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그래.”
“아까 김우중 그 사람이 이야기했었죠? 정부 쪽 인사들을 움직여 보겠다고.”
그 말에 김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아마 바로 움직일 거야. 원래 그치가 언론이랑 정부 쪽에 줄이 많거든.”
“좋아요.”
“…뭐가 좋다는 게냐?”
“승리를 확신하는 적보다 쉬운 적은 없다는 말이에요.”
나는 말을 맺었다.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본 김귀란 그녀의 시선이 깊어졌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쉽게 보지 말아라. 금감원이든 국세청이든 대검이든 어디에든 대우의 눈과 귀와 손이 깔려 있어. 분명 정 회장이나 이 회장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굴러먹던 가닥이 있단 말이다.”
알고 있었다.
김우중.
그는 지난 20년간 공격적인 투자, 화려한 언론 플레이, 뛰어난 인맥을 통해 커 온 존재, 현재 재계서열 3위의 거대 기업을 일궈낸 존재였다.
그런 만큼 그가 가진 칼은 많고 또 날카로울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시국이 혼란스럽다 하더라도 그동안 뿌려 놓은 인맥이 크고 넓을 테니까.
하지만.
“괜찮아요. 그런 무딘 칼에 베일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그 칼들이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최상의 명검들인 것은 아니지.
나는 짙은 미소를 보이며 김귀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말을 들은 김귀란,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우중이 가진 칼이 무딘 칼이라고?”
“네. 분명히 김우중이가 가진 칼은 제법 날카롭겠죠. 듣자니 정 회장님이나 이 회장님 댁보다 뿌린 돈이 더 많은 곳이 김우중 그 사람이라는 소리도 있었으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이제 곧 제가 가질 패는 그 패들을 모두 다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 패, 이른바 으뜸패예요.”
“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한 음절 한 음절 말을 내뱉었다.
“저는 왕을 움직일 거거든요. 모든 칼의 정점에 있는 칼이죠.”
그러자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귀란, 그녀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너 설마?”
아무래도 내가 말한 바가 뭔지 파악한 것 같았다.
하긴 그녀 정도의 사람이면 내가 어떤 것을 추구할 것인지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나의 앞에 있는 사람, 김귀란의 혼란스러운 시선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문기사 하나를 손으로 짚었다.
“네. 아마 예상하고 계시는 게 맞을 거예요.”
아마 대우는 절대로 쌍호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는 청와대를 잡을 겁니다.”
내가 잡을 패가 더 높은 패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