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오라클 (1)
정 회장이 고요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퇴직금?”
약간은 놀란 어조. 슬쩍 떠진 눈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그에 퇴직금에 대해 말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네. 퇴직금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알기로 1993년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정영주 회장이 지난 50년간 현대그룹의 총수, 현대그룹을 이루는 24개 계열사의 이사로 근무하면서 쌓은 퇴직금의 액수는 총 217억 원. 이중 소득세 31억 원을 뺀 186억 원이 정 회장이 정산 받은 퇴직금의 액수다.
일반인들이 1억, 2억 정도의 퇴직금에 목을 매고 아둥바둥거리는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돈, 로또를 10번에서 20번은 더 맞아야만 하는 금액인 것이다.
“하··· 지금 나한테 퇴직금을 투자하라고?”
“네.”
“허허, 허허허, 거참 이거 재미있는 농담이구만. 재미있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는 정회장. 하지만 그의 눈은 차갑게 식어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나의 저의 나의 의도를 알아보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눈빛 속에는 약간의 당혹과 약간의 의문이 묻어 있었다.
하긴 뭐 그가 퇴직한 공무원도 아니고 이런 제안을 어디서 받아 보겠어?
일반인들이야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을 불리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그만큼 투자의 유혹도 많이 들어오고 또 그걸 노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정 회장쯤 되면 그런 유혹이 들어오기는커녕 언감생심 근접해 보지도 못할 것이다.
뭐 정 회장의 아들들, 그러니까 현대그룹의 상속자들이야 조금이라도 더 상속 받기 위해 그 돈 마저 노리고 있을 테지만, 내가 알기로 정 회장이라는 인물은 죽기 직전, 그러니까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자식들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
상왕.
권좌를 아들들에게 물려 준 후에도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 존재, 그게 바로 정영주였다.
그런 만큼 그가 쥐고 있는 퇴직금 또한 상당할 것이다. 아직 권력의 유지를 위해 잡고 있는 회사의 경영권이 많긴 하지만 계열사의 숫자가 숫자인 만큼 유예하고 있는 돈 또한 어마어마할 테고.
그러니 그의 돈, 묵혀둔 쌈짓돈을 받아낼 수만 있다면 단번에 날아오를 수 있다. 들고 있는 돈의 규모란 언제나 중요한 법이니까.
“작은 선생.”
한참을 묵묵히 멈춰있던 정 회장이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네, 회장님.”
“한 가지만 물어보지.”
“말씀하시죠.”
“내 퇴직금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건 자네가 내 퇴직금이 얼마나 되는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가 짐작하고 있다는 듯 깊은 눈으로 말했다.
“네.”
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묻겠네. 혹시 이번과 같은 정보가 있는 건가? 그러니까 김일성이나 성수대교 일 같은 일에 대한 정보 말이야.”
정 회장의 번뜩이는 눈으로 말했다. 정 회장의 눈에는 새로운 사업에 대한 욕심. 나의 정보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요.”
“···아니 그럼 왜?”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정 회장.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맺었다.
“제가 이번에 회사 하나를 차렸거든요.”
***
데카르트는 말했다.
결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해악이라고.
언제까지 어영부영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을 좀 먹는 일이라고.
그렇기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준영아! 준비 끝났어!”
“네. 아저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드디어 내가 회귀한 지 약 2년 만에 나는 나만의 회사를 차린 것이다.
“빨리 와. 아무리 그래도 주인이 현판을 달아야지 않겠어?”
“에이, 사장은 아저씨잖아요. 그냥 아저씨가 하시지.”
“하하, 바지 사장이 현판 달면 사람들이 웃어. 이런 건 주인인 니가 해야지.”
웃는 얼굴로 말하는 이어진, 나는 이어진에 재촉에 밖으로 나가 그에게 현판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천천히 사람들의 눈빛을 디딘 채 천천히 회사의 정문에 현판을 걸어 올렸다.
그러자.
[Oracle Investment Inc.]
오라클.
자본금 85억 원. 직원 수 총 15명.
회사 전체 지분 중 95%의 지분을 내가 가지고 이어진을 대표로 내세운 주식회사 형태의 벤처캐피털 업체.
창업투자, 사모투자전문회사(PEF)의 설립 및 운용, 기업인수합병(M&A), 특수인수목적회사(SPAC)을 목적으로 한 회사.
그리고 내가 만든, 온전한 나의 회사. 그런 회사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현판을 건 뒤 고개를 돌리자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직원들, 그리고 그 옆으로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이어진의 모습이 보였다.
“아따 잘 나왔다. 역시 100만원이 넘는 현판이라 그런지 삐까뻔쩍하다. 안 그래?”
“이거 100만 원짜리에요?”
“어. 아마 이쪽 빌딩에서 우리 현판이 제일 비쌀 거야.”
나는 감개무량하다는 감정이 물씬 풍기는 이어진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창업에 대해 생각한 것은 제법 오래전에 일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지식. 그것만 있으면 분명 주식과 부동산만으로도 전생에 만져 보지 못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돈을 벌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 그리고 영향력.
그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돈은 벌 수 있지만 그 영향력은 어쩔 수 없지.’
뭐 그렇다고 단번에 회사를 창업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일단 창업이란 면밀한 준비 하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하고 있었던데다가 그외에도 약간의 두려움이 내게 남아 있었다.
전생에서 보았던 섣부른 창업자들, 그들의 몰락을 기억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좋겠지.’
그런데 얼마 전, 창업에 대한 내 생각에 변화를 준 일이 생겼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
근래 있었던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통해 거대하고 유형화된 기업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영주 회장 같은 힘. 그런 힘을 가지고 싶다.’
때문에 나는 그 길로 이어진에게 창업을 지시했다.
‘아저씨. 시작할게요. 준비해 주세요.’
‘응? 무슨?’
‘독립이요. 지금 바로 시작할 거예요.’
물론 창업이라는 게 동네 치킨집 내는 것도 아니니만큼 이것저것 준비하고 또 처리해야 할 일이 제법 많았지만, 돈 좋다는 게 뭔가.
원래 물주는 물주로서의 역할이 있고 일꾼에게는 일꾼의 일이 있는 법.
이어진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전문가들에게 의뢰를 한 뒤, 모든 일을 순식간에 일사천리로 끝내 버렸다.
‘일단 회사의 종류에는 합명회사, 합자회사, 유한회사, 유한책임회사 그리고 주식회사. 이렇게 다섯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뭐 사실상 우리나라에 있는 회사 대부분이 주식회사니 다른 것들은 그리 신경 쓰실 것 없을 겁니다.’
‘그래요?’
‘네. 합명이나 합자야 자본금 규모가 1억도 안 되는 기업들이 대부분이고 유한책임이나 유한회사의 경우 몇몇 외국계기업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니까 자본금 규모를 봤을 때나, 벤처 캐피탈이라는 종목으로 봤을 때나 주식회사로 시작하시는 게 일반적일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야 제대로 된 것인지 나중에 확인, 사리에 맞지 않거나 내가 조사한 바와 다른 것을 수정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
오라클의 모습이었다.
“자 다들 이제부터 화이팅 합시다! 저희 회사 일한 만큼 확실하게 챙겨드릴 겁니다! 그러니까 다들 열심히, 아주아주 빡세게 일해 보자고요!”
이어진의 말에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아직까지는 작은 회사, 때문에 강압적이고 고식적인 분위기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흐르는 회사의 모습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소박하지만 제법 의미 있는 현판식을 마치고 난 뒤, 나는 이어진과 함께 사장실로 돌아왔다.
“직원들은 어때요?”
내가 이어진이 내준 우유를 마시며 묻자 자신 몫의 커피를 내리던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아직 괜찮아. 대부분 그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니까 한동안은 특별히 문제가 되거나 하는 건 없을 거야. 뭐 시간이 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다들 능력도 괜찮고 의욕도 확실하니까.”
“그래요?”
“어. 사실 이쪽 업계가 돈이 돌긴 하지만 그거야 실제 돈을 돌리는 사람들 이야기고 일반직 사원들 같은 경우엔 그냥 월급쟁이거든. 그런데··· 일반적 사원들한테도 대기업 수준의 급여랑 성과급을 맞춰 준다니까 다들 영혼을 묻을 기세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대우를 해 줘야죠. 그래야 사람들이 움직이고 그에 따라 우리가 돈을 벌 테니까요.”
그러자 이어진이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지.”
아마 나를 만나기 전 고려증권에서 박봉에 혹사당하던 그로서는 격한 동감을 할 만한 말일 것이다. 과거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회사의 노예 그 자체였으니.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팀워크를 해치는 사람은 별로에요. 우리는 사람을 모으자는 거지 상어나 하이에나를 모으자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마.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 선에서 잘라 내버릴 거니까.”
내 말에 이어진이 잔뜩 힘이 들어간 눈으로 말했다.
사장이라는 직위를 맡고 보니 나름 책임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리 바지사장이라도 사장은 사장, 그의 입장에서는 이 회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고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직원들에 대한 대화를 마친 뒤, 나는 곧바로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슬슬 일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러자 커피를 홀짝이던 이어진이 살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네. 얼마 뒤에 덩치 큰 물주가 하나 들어오긴 할 텐데 그 전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으니까요.”
내 말에 이어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뭐 빨리 시작할수록 좋겠지. 좋아 그럼 이게 우리 회사 첫 일거리네? 일단 먼저 기업 분석을······.”
아무래도 첫 투자인 만큼 확실한 자료를 통해 업무를 시작하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 회사의 이름.
[오라클]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투자였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이어진의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슬쩍 웃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첫 번째 타겟은 이미 정해 놨거든요.”
그리고는 천천히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그의 앞에 내어놓았다.
“이건?”
“네. 그 회사가 바로 우리의 첫 타겟이에요.”
그 회사는 바로.
[(주) 캐스닉 디지털]
세계 최초로 MP3플레이어 기술을 개발한 회사.
하지만 투자자를 찾지 못해 그 기술을 외국에 팔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회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