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226화 포식자 (3)
“그런데 준영아. 회사를 사는 건 좋아. 그런데… 어떻게 살 거야?”
“어떻게 살 거라뇨?”
“아니 기업을 사는 방법도 여러가지잖아. 뭐 주식을 매집한다던가 아니면 주주들과 딜을 한다던가. 뭐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거 아니야.”
“물론 그렇죠. 하지만 저는 그런 방법은 되도록 지양할 거예요.”
“그럼?”
“정공법. 이번엔 그걸로 접근할 거예요.”
“정공법?”
“네. 자고로 돈 앞에 장사 없는 법이죠.”
충분한 정도의 돈은 모든 방법을 무색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
“1천억이요?”
내가 말을 마친 순간, 김종호, 그의 얼굴에서 노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대신한 것은 당황과 두려움 그리고 그 와중에 나타난 공손함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천금이 얼마 정도인진 모르지만 대략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말이 그렇다는… 그런데 누구시죠?”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약간 당황이 가라앉자 이제서야 내 정체가 궁금했나보다.
고개를 돌려 슬쩍 옆을 바라보자 수행역으로 따라온 직원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김종호에게 건넸다.
[오라클(Oracle)]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 오라클이라는 글자 이외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명함. 그것을 받아든 김종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화했다.
“오라클이요?”
살짝 떠진 눈, 그의 눈은 오라클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자의 반응이었다.
“네. 알고 계신가요?”
“그게 라디오로만….”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요즘 들어 매스컴에 오라클의 이름이 많이 나온 덕분인지 하나하나 설명할 일은 던 것 같았다.
“다행이군요. 설명할 시간은 덜 수 있을 테니.”
“아…….”
“정식으로 소개드리죠. 저는 오라클의 수장 김준영이라고 합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러자 잠시 당황하던 그가 이내 바지춤에 손을 닦더니 내 손을 잡았다.
“바, 반갑습니다. 저는 신화양행의 김종호라고 합니다.”
중견기업의 사장치고는 약간 순진한 태도. 그 모습에 나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제법 유명하신 분이시니까요.”
“아. 그런가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손님이 왔는데… 그러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시죠! 김부장. 사람들 시켜서 차 좀 내와요. 좀 좋은 걸로.”
그 말에 한쪽에 서 있던 남자, 김 부장이 눈치 좋게 밖으로 나가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중요한 자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떠십니까?”
나는 김종호가 권한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내 맞은편에 앉은 김종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제가 좀 갑작스러워서… 무슨 말씀이신지 잘….”
“간단합니다. 신화양행, 귀사를 저희 오라클 측에서 인수하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순간, 맞은편에 앉은 김종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심이십니까?”
아무래도 내 말을 믿기 힘든 것 같았다.
“네. 그렇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입니다.”
“아니 왜…? 오라클은… 그러니까 자동차 회사 아닌가요?”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아하니 우리의 정체에 대해 약간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라디오로만 들으셨다니 사실인가 보군요.”
“그게…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요즘 바깥으로만 다녀서 통 소식을 못 들어서요.”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말씀하신 대로 오라클은 자동차 회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일부분일 뿐이죠.”
“그럼…?”
“저희 오라클은 모든 분야를 타겟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화양행의 주요 산업인 정밀 화학분야도 저희의 사업이라 볼 수 있죠.”
일순, 김종호가 뭔가 알겠다는 듯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본격적으로 다른 사업들을… 대기업처럼….”
뭐 단순한 대기업과는 조금 다른 기업이 되겠지만 일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신화양행의 매각. 관심 있으십니까?”
“그게…….”
“가격은 충분히 책정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파악한 귀측의 가치, 그러니까 지난 70년의 세월에 대한 가치는 꽤나 높으니까요.”
천천히 말을 마친 나는 신화양행에서 준비한 차를 마셨다.
고개를 들자 김종호 그가 심각한 표정, 뭔가 생각이 많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긴 생각이 많을 만도 하지. 그로서는 갑작스럽게 가업을 정리하라는 말이었을 테니까.
물론 IMF 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겠지만, 설마 이렇게 단도직입적인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뒤.
“…감사한 말씀이군요. 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그의 입이 열렸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듣기로는 제법 상황이 급하다 들어서요.”
내가 그 이유를 묻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그, 그가 이내 눈을 질끈 감더니 결연한 얼굴을 만들었다.
“그건… 이 회사가 저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유비에 대한 절의를 지키는 관우의 표정, 조조의 섭외를 거절하는 운장의 단호함에 닿아 있었다.
“그 때문에 회사가 무너진다고 해도 말입니까?”
“저희 회사 역사만 수십 년입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버텨냈죠. 이번에도 같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르다고 해도 말이죠?”
“그런 말이야 위기 때마다 나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가 고집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가볍게 웃어보였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내가 살던 2020년에는 흔하지 않던 사람들이지만 이 당시엔 그래도 심심치 않게, 바로 회사에, 가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이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사실 좋아하는 쪽이지만, 문제는 이런 이들일수록 고집이 세다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뭐 그렇다고 그들의 담장을 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는 없었다.
시간은 금, 언제나 빠른 결정이 중요했으니까.
때문에 나는 조금 쉬운 방법, 빠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아저씨.”
나는 고개를 돌려 이어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어진,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직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 안으로 십여 명의 직원들이 들어왔다.
“이게 무슨…?”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는 김종호,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직원들이 들고 들어온 서류 가방을 열었다.
찰칵-
순간, 제법 묵직한 서류 가방 속에서 시퍼런 세종대왕 뭉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 신화양행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
“50억 원입니다.”
“50억 원이요?”
“네. 계약금입니다. 뭐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이 가져오고 싶었지만 요즘 화폐는 크기가 커서 말이죠. 물론 어음이라면 모르지만 아무래도 어음은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이게… 이게 그냥 단순한 계약금이라고요?”
“네. 방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천금은 몰라도 1천억 원까지는 맞춰드릴 수 있다고. 저희의 자금력은 김 사장님의 생각보다 더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종호, 그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장님의 회사, 신화양행이 망가지는 것을 걱정하시는 거겠죠.”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김 사장님.”
“…네. 회장님.”
“일단 신화양행을 저희에게 파십시오. 그리고 이끌어 주시면 됩니다. 지금까지처럼 말이죠.”
“네…?”
의아한 듯 멍해지는 김종호의 눈,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바뀌는 건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인수한 신화양행의 사장 자리는 김종호 사장님의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그의 눈에 또렷한 초점이 돌아왔다.
“…설마 쓰다가 버리려는 겁니까.”
짙은 의심, 합당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앞으로 알게 되시겠지만 저는 절대로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뭐 사람이 아닌 자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솔직히 버린다 하더라도 제가 드릴 자금이면 만족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러니 묻겠습니다. 어떠시겠습니까. 이대로 무너지는 사업을 가만히 지켜만 보시고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일순, 침묵이 찾아왔다.
나와 그 사이의 거리는 불과 1미터.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제법 긴 거리를 떨어진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기다림이 끝난 뒤.
“하나만, 하나만 묻겠습니다.”
김종호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죠.”
“솔직히 놀라운 제안입니다. 사실… 그동안 방법이 없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궁금합니다. 도대체 왜 저희에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 손해를 봐 가면서까지 저희를….”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김 사장님.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군요.”
“……착각이요?”
“네. 김 사장님. 저는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죠.”
“그럼…….”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단, 그 손해의 층위가 다른 이들과 다를 뿐입니다.”
그런 뒤 자세를 펴 담담히 그를 바라보았다.
“저희가 얻고자 하는 건 두 가집니다. 신화양행이라는 기업의 기술력과 숙련도. 그리고….”
말을 맺었다.
“신화양행의 역사 바로 그것입니다.”
*
“70년의 역사? 아니 그걸 돈 주고 산다고?”
신화양행을 빠져나온 뒤, 이어진의 의아한 낯으로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아까 내가 했던 말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1990년대 지금 이 시기에 과거의 역사란 그저 ‘그랬던 일이 있었다’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저씨.”
“왜?”
“말은 똑바로 해야죠. 지금은 그걸 돈 주고 산다고? 라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걸 돈 주고 살 수 있어? 라고 물어보셔야 맞아요. 왜냐하면 앞으로는 그런 것들을 돈 주고서도 살 수 없는 세상이 올 테니까.”
나는 알고 있었다.
밀레니엄 시대를 지나 개인과 개인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고 개인의 의사표명이 손쉬워지는 시대가 오면 지금은 쓸모없어 보이는 신화양행의 역사, 지금은 그저 어리석어 보이는 그들의 삶이 앞으로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보물이 된다는 것을.
그런 만큼 나는 신화양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그들의 가치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지금이라면 염가에 그들의 가치를 내 손에 쥘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또 그것만 있는 게 아니죠. 신화양행의 성장 가능성은 충분해요. 지금이야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상황이 좋지 않아 흔들리고 있지만 아마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1천억 원은 물론 그 갑절, 아니 갑절에 갑절을 주고도 못 살 회사에요.”
신화양행의 가치 그것은 객관적으로 봐도 충분했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미래가 그것을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신화양행은 무너진다. 그리고 헐값에 삼성에 팔려 쪽쪽 빨려 나가지. 삼성이야 그를 바탕으로 쭉쭉 치고 나가고.’
물론 그걸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지만.
“그 정도란 말이야?”
“네. 물론이죠. 미래엔 디스플레이, 그러니까 신화양행이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제품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오거든요.”
그러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어진,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어차피 회사에서도 그 회사에 잠재력만은 높이 평가했으니까. 그런데 준영아. 다른 회사들도 신화양행처럼 후하게 쳐 줄 셈이야?”
“아뇨.”
“……정말?”
그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뭐 신화양행 같은 회사가 또 있다면 모르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저런 회사가 흔치는 않을 테니까.”
“그럼?”
나는 슬쩍 웃으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최대한 싼값에 사야죠. 상태가 좋으면 깎아서 상태가 안 좋으면 헐값에. 뭐 과거 행적에 따라 가감을 해 가면서요. 때론 압박도 하고요.”
그러자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정도면 수긍할 만하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저씨. 이제 움직이죠.”
그러자 이어진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벌써? 우리 나온 지 이제 5분도 안 지났는데?”
“그러니까 움직이자는 거에요.”
나는 일그러지는 이어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맺었다.
“오늘 안에 5군데의 회사. 그걸 제 것으로 만들 겁니다.”
이제, 재벌이 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