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218화 높은 곳으로 (2)
“한성그룹에 연락해. 내가 한번 보자고 했다고.”
자신감 있게 말을 마친 김우중, 그가 여유롭게 쌍화차를 마시며 연락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가 명령을 내린 만큼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그룹의 총수, 김귀란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헐레벌떡 달려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한성가 회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누구겠어. 당장 보자고 해. 아니면 큰일 치를 줄 알라고 전하고.”
물론 한성그룹 또한 재계서열 9위의 대기업.
자산총액 15조 원에 달하는 거대한 기업인 만큼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 또한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뭐 지금에야 어느 정도 따라왔다고 하더라도 얼마 전까지 한성가는 재계서열 10위권 밖의 회사, 그런 만큼 그들 또한 자신의 제안, 아니 사실상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결국 오게 되겠지. 한성도 우리와 척을 지면 그리 좋지 못하리라는 걸 알 테니까.’
그러나 그의 예상, 그가 부르면 한성가 측에서 마지못해 찾아올 것이라던 그의 생각은 그러나 간단히 빗나가 버렸다.
그가 지시를 내린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한성가 측에서 아무런 연락도, 아무런 대응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처음엔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던 김우중, 그 또한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羈별? 측에서 배짱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나?”
“그게… 네 아직은….”
“한성 쪽에 연락을 한 건 확실하고?”
“네. 확실합니다. 정식 라인 쪽으로 회장님의 말씀을 한성 측에….”
하지만 뭐 사람의 일에 착오란 있을 수 있는 법, 그는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면 다시 한번 한성가 측에 연락을 넣었다. 그것도 그쪽에서 무시할 수 없도록 제법 강경한 어조로.
“…다시 연락해.”
“…또 다시 말입니까?”
“그래! 이번에는 제법 강경하게. 1시간 안에 오지 않으면 대우전자의 디스플레이 패널 납품은 한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받겠다고.”
설마하니 이런 조항을 걸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격, 그의 회심의 공격은 또다시 시작도 못한 채 무너져 버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또다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한성그룹 측에선 아무런 연락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던 것이다.
“아니! 아직도 안 온 거야! 메시지 확실하게 전달한 거 맞아?”
“화, 확실하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왜 김귀란이 그 양반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아니 직접 오지 않으면 연락이라도 와야 하는 거잖아!”
“네. 바, 바로 다시 연락해 보겠습니다.”
결국, 김우중 그는 김귀란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
“네?”
그리고는 빠르게 밖으로 진군하며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차 대기 시켜!”
그가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평창동으로 가지. 기왕 시작한 거 끝을 내야 할 테니까.”
*
잠시 뒤.
김귀란의 평창동 저택에 도착한 김우중, 그는 곧 김귀란이 있는 서재로 안내되었다.
그러자 잠시 서류를 확인하고 있던 김귀란, 그녀가 냉막한 안색으로 김우중을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야?”
무척이나 평이한 어조. 재계서열 3위의 그룹 총수에게 거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평범한 말이었다.
그러자 그녀를 찾은 김우중, 그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메시지를 받았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 회장. 여전히 입이 걸구만.”
“그럼 나보다 나이도 어린 이한테 존대라도 해 줄까?”
“그래도 내가 36년생 쥐띠인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나이 대우 먹고 싶으면 휠체어 타고 와. 그럼 어른 대우 해 주지.”
김귀란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휠체어를 탄다.
그 말인즉슨 곧 국가 기관에 조사를 받는다는 이야기. 우리나라 재벌가 총수들이 제일 껄끄러워 하는 일 중에 하나에 연루된다는 말이었다.
순간, 김우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빌어먹을 좋은 소리 한다. 그런데… 오늘 꽤나 바빴나 봐?”
김우중이 서재를 둘러보며 말했다.
방금전까지 회의가 있었던 듯 서재 안에는 찻잔과 서류들이 가득했다.
그러자 김귀란,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바쁘기야 매일 바쁘지. 먹고 살려면 정신없는 게 인생 아닌가. 그러는 김 회장은 안 바쁜가 봐? 이렇게 우리 집까지 찾아오고?”
약간의 칼. 그것이 들어있는 말을 확인하며 김우중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김 회장 콧대가 너무도 높아서 말이지.”
“무슨 말이야?”
“연락 못 들었어? 내가 좀 보자는 연통을 넣었었는데?”
살짝 찌푸려진 김우중의 표정, 그것을 바라보며 김귀란이 몸을 돌렸다.
“그래?”
그리고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김귀란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김우중의 시선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모른다고?”
“아, 이거 미안하게 됐구만. 요즘 별의별 연락이 다 와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면 거르라고 해 놨거든. 그런데 이 사람들 이거 실수했나 보구만.”
일순 김우중의 이마에 빠직- 굵은 핏줄이 섰다.
김귀란, 그녀의 성향은 독불장군, 모든 정보를 자기 손에 쥐고 흔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만큼 그녀가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 인간들 치고 자신의 손에서 정보와 지분을 놓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하, 진짜 성질 하고는, 아니 그놈의 성질은 어째 10년이 지나도 안 바뀌나 몰라?”
“이 나이에 성질이 변하면 죽어야지. 그나저나 내 집엔 갑자기 왜 온 거야?”
김귀란의 말에 잠시 한숨을 내쉬던 김우중, 그가 김귀란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 이유가 확실한 만큼 빠르게 결착을 내려 한 것이다.
“후, 그래 간단하게 이야기하지. 오라클… 한성 꺼지?”
순간, 여유로운 시선을 견지하던 김귀란의 시선이 굳었다.
“오라클이 우리 꺼냐고?”
“그래.”
김우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잠시 그를 바라보던 김귀란 그녀가 알만 하다는 듯 탁-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하, 참 안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 요즘 대우가 오라클과 한판 붙었다고. 하지만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오라클은 우리랑 전혀 상관없는 곳이거든.”
제법 여유로운 그녀의 말, 그 말에 김우중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좋아. 그렇다면 우리가 밟아도 상관없겠군.”
“……뭐?”
김귀란의 시선이 찌를 듯 김우중을 향했다.
그 시선을 확인한 김우중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왜 상관 없다더니 손자 걱정은 되나 보지?”
아무래도 승기를 잡았다는 듯한 시선, 그 시선에 김귀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 회장. 맨날 김치죽만 먹고 다니더니 벌써부터 노망났어?”
“하여간 대꾸는… 말로 할 때 물러서란 말이야.”
김귀란의 눈이 찌를 듯 김우중을 바라보았다.
“…물러서라고?”
“그래. 그동안 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받아들여. 어차피 한성이나 오라클이나 차도 만져 본 적 없잖아.”
김우중이 약간의 비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그의 말은 공격, 우위의 선 자의 여유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김귀란, 그녀 또한 사자, 그녀는 두려워하기는커녕 김우중의 발언에 이를 드러냈다.
“이봐 김우중이.”
“뭐?”
살짝 흔들린 김우중의 시선, 그것을 밟으며 김귀란이 입을 열었다.
“자네 죽는 소리하러 와서 왜 이리 혀가 길어. 솔직히 말해. 자네 우리 손자가 무서워서 이리 온 거잖아. 안 그래?”
그러자 순간, 김우중의 눈이 가라앉았다.
두려워하다.
그 말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려는 것뿐이야. 말마따나 가야 할 길이 머니까.”
“거참, 그게 변명이라면 실망이구만.”
“이건 변명이 아니야. 협박이지.”
김우중 또한 이를 드러냈다.
김귀란과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협박?”
“그래. 만약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나도 생각이 있어.”
잠시 말을 멈춘 김우중, 그를 바라보는 김귀란의 시선을 확인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일단 한성 쪽과 관련된 우리 업체들의 오더가 중지될 거야. 그리고… 한성그룹 쪽으로 사람들이 움직이겠지.”
김우중의 말, 그 말에 김귀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부 쪽 연줄을 움직여 보겠다? 허 참 어이가 없군. 우리는 뭐 놀고만 있는다던가?”
“그렇지는 않겠지. 다만 한성 쪽 줄보다는 우리 줄이 더 두껍다는 게 문제지. 어쩌나 김 회장. 서열 10위권 올라온 지 얼마 안 되는 데 고생 좀 하겠어.”
비아냥거리는 듯한 김우중의 말, 그 말에 김귀란이 서릿발 같은 시선을 만들었다.
“김 회장. 방금 전에 협박이라고 했었지?”
“그랬지.”
“뭔가 착각하고 있구만.”
“내가 착각하고 있다고?”
의아한 듯 기울어진 김우중의 시선,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귀란이 단언했다.
“그래. 협박이란 건 원래 강한 놈이 약한 놈한테 하는 거거든.”
일순 김우중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헛소리야? 대우와 한성, 어느 쪽인지 구분이 안 돼?”
“헛소리는… 이미 나라가 망했는데 이 판국에 줄이고 재계서열이 뭔 상관이야.”
김귀란이 김우중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거 하나만 남은 거지.”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눈빛이 김우중을 내리눌렀다.
“그러니까 한번 해 봐.”
“……진심인가?”
김귀란이 씨익 웃으며 말을 받았다.
“진심이고 말고. 방금전에 자네 입으로 이야기했지 않은가. 우리랑 오라클이 한통속이라고.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나는 내 것을 건드리는 놈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그러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김우중, 그가 고요한 눈으로 김귀란을 바라보다 이내 쯧, 혀를 차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 참, 할머니나 손자나 아주 똑같구만.”
그 말에 김귀란의 얼굴이 짙은 미소가 맺혔다.
분명 김우중의 말은 비난의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받아들이는 자에겐 그렇지 않은 듯했다.
“피 도둑질은 못 하는 법이지.”
그리고 잠시 그와 김귀란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간의 숨소리, 그것 이외에 아무런 소리도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지난 뒤.
“좋아. 해 보자고.”
김우중, 그가 美??【?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김귀란을 향한 짙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제부턴 후회해도 늦을 거야. 알아? 김 회장. 당신은 마지막 기회를 걷어찬 거라고.”
“마지막 기회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자네야말로 조심하지. 잘못하다간 모가지를 물릴 테니까.”
“빌어먹을 끝까지 한 마디도 안 지는군.”
그리고 그렇게 왔던 것처럼 김우중, 그가 서재 밖으로 사라졌다.
“…….”
홀로 남은 김귀란, 그녀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가볍게 입을 열었다.
“들었느냐?”
그러자 그 순간.
드륵-
서재 한쪽에 있던 문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이죠.”
그것은 바로… 만면의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 김준영이었다.
“김우중이 꽤나 애가 닳았나 보네요.”